속리산 금각암은 자욱한 안개 속에 가리어져 있었다.

산 아래에다 동삼을 내려놓은 버스는 힘겹게 털털거리며 산구비를 돌아갔다. 먼지를 뽀얗게 덮어쓴 낡은 가게에서 동삼은 금각암으로 향하는 길을 물었다.

「올라가다 보면 팻말이 보일 거요.」

동삼은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올려다볼 땐 산행이 수월해 보였는데, 막상 산길에 접어들자 의외로 산은 깊었고 길은 가팔랐다. 무엇보다 군데군데 쌓여 있는 눈 때문에 방향을 잡기가 힘이 들었다. 쓸다 말고 버려 둔 눈길은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다져진 데다 차가운 겨울 날씨에 꽁꽁 얼어 붙어 있어 그대로 빙판길이었다.

쉬엄쉬엄 올라가며 동삼은 산세를 둘러보았다.

올라가기 힘든 만큼 겨울산은 한 겨울의 비경을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구비구비 이어지는 능선은 뿌연 안개구름 속으로 잦아들고, 진녹색과 적갈색을 푸근히 감싸안으며  하얗게 눈 덮인 산은 낮게 드리워진 하늘 아래 용트림하듯 넘실거리고 있었다.

오랜 풍상을 딛고 살아 남은 소나무 가지 위에 쌓인 잔설이 계곡을 가로지르는 거친 바람에 눈가루를 뿌렸다. 흡사 눈보라를 헤치고 걸어가는 것만 같았다. 드문드문 네 활개를 벌리고 서 있는 적송의 암갈색 가지가 바람이 불 적마다 진저리를 치며 소리 내어 운다. 산허리 중간중간 뭉쳐 있는 흐린 구름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안개 속으로 파묻힌다.

금각암은 구름 속에 있었다. 두터운 눈모자를 눌러 쓴 팻말을 따라 금각암 입구에 들어서자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짙은 구름이 부지중에 동삼의 발목을 잡아챈다. 가파른 골짜기와 빙판길을 걷느라 지치기 시작할 즈음에야 안개 속에 가려진 고성(古城)처럼 종잡을 수 없던 암자 하나가 마치 환상인 양 동삼의 눈앞에 비밀스럽게 모습을 드러낸다.

경내는 적막했다. 암자는 범속한 일상의 모습을 벗어 던지고 자연과 깊이 동화되어 있었다. 어디선가 한 줄기 향연(香煙)이 새어 나온다.

해봉처사 최해수는 법당에서 헌향중이었다. 정성을 다해 향을 사르고 초에 불을 붙인 해봉처사는 부처님에게 백여덟 번의 오체투지를 올렸다.

동삼은 해봉처사의 경건한 분위기가 어쩐지 무상(無常)함으로 와 닿았다. 누구보다 불문과 어울리는 사람, 그러나 그 절묘한 배합이 오히려 한 줄기 비애로 고스란히 굴절되는 해봉처사. 그의 청정한 설법이 미풍을 타고 동삼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커다란 바다 위에 우주를 새기려면 우선 바다는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네. 파도가 한 점 없이 잠들어야 하네. 우리네 마음의 바다 역시 마찬가지일세. 무명(無明)의 바람이 그치고 번뇌의 물결이 쉬어야만 참마음의 도장을 새길 수가 있다네.」

「번뇌라 했소이까…….」

동삼의 말에서 진한 비감이 묻어났다. 그 말 속에는 진정한 번뇌의 본연과 맞닥뜨려 수천 수만의 불면 속에 끝없이 유전(流轉)되었던, 가슴을 에여 내는 통한이 깊게 침전되어 있었다.

해봉처사는 그윽하게 동삼을 바라봤다.

「삼라만상이 빠짐없이 투영되는 고요한 바다처럼,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경지가 정각(正覺)이네. 그 지혜의 눈을 열기 위해서는 물듦도 고통도 없는 본연의 마음이 전제가 되어야 하네. 그래야 막힘도 다함도 없는 마음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어.」

산사의 밤은 고요했다. 이따금 멀리서 밤부엉이 우는 소리만 간간이 적막을 깰 뿐 암자 안은 잠긴 물처럼 적막했다.

온기가 있는 방에서 동삼은 이불을 깔고 누웠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법고 스님 생각이 났다. 스스로 돌중이라 입버릇처럼 되뇌이던, 술 잘 먹고, 시정잡배보다 더 욕설을 잘했던 법고 스님. 그러나 법고 스님만큼 진정한 스님이 어디 흔하랴. 울퉁불퉁한 맨머리에 부릅뜬 눈은 사천왕의 형상이었지만 그의 가슴은 늘 따사로웠다.

일평생 올곧게 살아왔던 스승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깊은 속을 내보였고, 증오와 턱없는 절규로 헛디딘 자신의 삶은 앙상히 뿌리가 파헤쳐진 나무등걸처럼 뒤엉켜 있었다.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바둑인가, 범속한 삶인가. 바둑의 수는 내가 윗길인지 모르나 인간을 품는 따스한 마음이나 상대를 감싸는 도량은 해봉처사가 훨씬 심오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해봉처사의 방에서 바둑돌 놓는 소리가 들린다.

「처사님, 어떡하면 바둑이 늘죠?」

「공부하는 스님이 그까짓 바둑은 늘어서 뭣하게.」

「전 바둑이 좋습니다.」

「가사장삼 벗어 던지고 떠돌이 기객이라도 되겠다는 건가?」

「원, 처사님도. 그렇다고 부처님 곁을 어찌 떠납니까.」

「그렇다면 바둑도 포기해야지.」

「그렇게 어려워요?」

「글쎄…….」

동삼은 차츰 잠 속으로 빠져 든다. 저 산 속에 서식하는 뭍 날짐승들이 밤이면 나래를 접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