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오랜만에 황판수가 주선한 내기바둑을 두는 날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내기바둑이라기보다 지도대국의 성격이 강했다.

양포가 완전히 무너지고 내기바둑계는 명실상부하게 동삼에 의해 통일되었다. 더 이상 도전해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사장 뒤를 이어 동삼의 전주가 된 유 사장을 통해 들어오는 승부 제의는 터무니없는 치수를 요구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이래저래 동삼은 뒷전에 앉아 남이 두는 바둑을 구경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던 차에 전라도 군산(群山)의 한 갑부 아들이 김헌자 사범에게 청을 넣었고 황판수가 그날의 바둑을 주선했다. 정천명 5단까지 동석했는데 평소 친한 사람 몇몇과 어울리다 보니 분위기가 자못 화기애애해서 내기바둑이라기보다 친목회를 하는 느낌이었다.

「추 사범, 누가 찾아왔어.」

황판수의 전언이다. 동삼이 바둑을 두다 말고 밖으로 나간다. 여관 입구에 누가 서 있다. 동삼을 보자 반갑게 씩 웃는 모습, 박갑수였다.

박갑수의 행색은 괴이했다. 두루마기 가사장삼에 용꼬리처럼 끝이 배배 꼬인 지팡이까지 턱 짚고 있는 품세가 삿갓 하나 걸친다면 영락없는 산중거사다.

「오랜만일세.」

박갑수가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민다. 동삼이 그 손을 잡았다.

「모르는 척하지 않는 걸 보니 자넨 확실히 떠돌이 국수답군.」

근처 허름한 술집으로 두 사람은 자리를 옮겼다.

「얼마 전 종로 전주여관에 투숙한 적이 있었지. 마침 그날따라 정명운 그 친구 국수전 도전기가 열리고 있었네.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 친구 본 체 만 체 하더군. 원래 그런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바둑의 깊은 도를 습득한 내가 모처럼 없는 시간에 두어 수 가르쳐 주려 했더니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사람이 그래서는 안 되는데…….」

박갑수가 쓴 입맛을 다신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나?」

동삼은 그래도 박갑수가 반갑다. 어쨌거나 한때는 한솥밥 먹고 한 스승 밑에서 같이 공부를 한 동문이 아닌가. 박갑수가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내가 원래 동설 스승의 기질을 닮아 한 군데 느긋하게 붙박혀 머무는 체질이 아니질 않는가. 여기저기 떠돌다가 계룡산에 터를 잡았네. 내 이 깊은 사상과 현란한 행마에 많은 사람이 감동을 받았지.

일탈교(一脫敎)라…… 교명(敎名)이 어떤가? 핍박받는 백성들을 위해 내 큰마음 먹고 종교 하나 창립했네. 이 어두운 세상에 내가 할 일이 무어 있겠는가. 바둑은 그만뒀네. 지하에 계신 우리 동설 스승이 알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지만.」

박갑수가 너털웃음을 웃는다. 하긴 박갑수는 타고난 품성으로 보아 입신양명이나 재화를 도모하는 체질이 아니었다. 동삼은 묵묵히 자신의 잔에 술을 붓는다. 별안간 박갑수의 표정이 침중해진다.

「언젠가 자네에게 이 말을 해준다 하면서도 지금까지 전하지 못한 말이 있네.」

「…….」

「옛날 동설 스승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꼭 한 번 자네 아버지를 거론한 적이 있었네.」

동삼이 박갑수를 바라본다.

「알다시피 우리 동설 스승과 자네 선친은 여목도장의 같은 동문인 설숙 스승과 더불어 가장 촉망받던 제자가 아니었나. 내가 알기론 자네 선친이 도장에서 쫓겨난 것은 동설 스승 때문이었다고 그러더군. 동설 스승은 자네 선친 이야기를 하며 크게 후회하는 기색이었네. 사람이 인연만큼 살아야 하는데, 하시면서……. 스승은 당신의 과오가 평생 짐이 됐던 모양이었네.」

박갑수가 소주를 유리잔에 부어 마신다.

동삼은 유리잔에 소주를 부어 마시는 박갑수를 보며 까닭 모를 연민이 일어난다.

「소식은 들었나?」

「……?」

「설숙 스승님께서 돌아가셨다네.」

「…….」

「나야 엄밀히 말해서 동설 스승님의 제자가 아닌가……. 최해수 형 혼자서 임종과 장례를 치렀다더군. 솔직히 너무한 것 아닌가?」

「…….」

「한 사람은 만천하가 인정하는 국수요. 또 한 사람은 떠돌이 국수로 천하의 양대 기객을 제자로 두었으면서도 스승님의 말년이 어찌 그리 쓸쓸했으며 죽음 또한 어찌 그리 적적할 수 있는지…….」

동삼은 술잔을 가만히 들고 있다.

「최해수 형을 만났더니 자네에겐 연락이 닿지 않았고 정명운 그 친구는 국수전 도전기 때문에 스승의 임종을 못 봤다더군. 임종을 못 보다니 그게 말이 되는가. 벽송을 물려받아 적통을 이은 자가 그까짓 국수전이 무어 그리 중요하다고…….」

창 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세상에 풀리지 않는 업이란 없는 법일세. 다 마음의 문제지…….」

비가 선술집 함석 슬레이트 위에 후두둑 떨어져 내린다.

「스승에 대해 맺힌 게 있다면 훌훌 털어 버리게. 이젠 돌아가신 분이 아닌가.」

창 밖으로 보이는 흙길 위로 빗물이 쉴 사이 없이 동그란 파문을 만들어 내다가 스러지곤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라 했네.」

……겨울비였다.

「풀이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꿈이고 헛것이고 물거품이고 그림자며 그리하여 이슬 같고 번개 같은 것이다!」

박갑수는 막소주를 유리잔에 한 잔 가득 부어 벌컥벌컥 마신 후 소금 한줌을 입 속에 탁 털어넣는다.

「잘 있게, 추 사범. 나는 도탄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러 떠나네.」

박갑수는 쏟아지는 빗속으로 표표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