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 한 여관 앞에서 명운은 망설이고 있었다. 2대 2로 막판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 끝에 마침내 대망의 국수 자리에 오른 지 1주일 만이었다.

1년 전, 종로에 있는 전주여관에서 박순제 5단과 도전자 결정전을 마치고 흡족해하던 명운은 술에 만취한 동삼이 검토실에 나타나 완벽한 수순으로 강평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충격을 받은 명운은 거의 1년이 지나도록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가 여름에 접어들어서야 오랜 침체의 늪에서 헤어났다. 그리하여 절치부심 노려 오던 국수의 자리에 등극하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국수의 자리, 그 타이틀을 가졌다는 것은 공식적인 나라의 일인자로 인정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국수의 자리에 올라선 명운은 희열에 잠겼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나 번쩍이는 카메라 플래시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누구나 인정해 마지않는 국수의 자리에 올라,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동삼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사실이 자신을 더 기쁘게 했다. 마침내 명운은 오랜 동삼의 사슬에서 풀려났다.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명운에게 동삼과 양포의 대국 소식이 전해졌다. 바둑인들 사이에선 큰 화젯거리였다.

사실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묵살하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명운은 그 동안의 동삼의 변모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더불어 국수의 자리에 당당히 오른 자신을 동삼 앞에 드러내고 싶었다.

여관은 들락날락거리는 사람들로 어수선했다. 이윽고 명운은 결심을 하고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대국장은 한쪽 벽면이 스무 자가 넘는 큰 방이었다. 그 큰 방에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기침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조용했다. 몇몇 안면 있는 전문기사들의 모습도 보였다.

‘저 사내가 말로만 듣던 이양포라는 사람이구나.’

혼자서 바둑판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있는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비록 몸담고 있는 세계가 서로 달라도 내기바둑의 황제라는 양포의 이름은 명운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명운은 방 안을 훑어보았다. 창문 앞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던 또 다른 사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익은 꺼구정한 어깨, 그는 동삼이었다.

「혹시 이번에 국수가 된 정명운씨 아니오?」

문 옆에 서 있던 한 사내가 명운에게 물었다. 그때 딱 하는 착수 소리가 들렸다. 수읽기를 끝낸 양포가 착수하는 소리였다. 양포가 고개를 들자 밝은 불빛 아래 드러난 그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각이 진 턱에 턱수염이 듬성듬성 난, 어느 모로 보나 강인한 승부사의 얼굴이었다.

동삼이 천천히 돌아와 바둑판 앞에 앉더니 잠시 그의 착수를 바라보고는 곧장 백돌 하나를 집어 바둑판 위에 놓았다. 순식간에 여섯 수를 교환한 후 양포가 다시 깊숙이 팔짱을 꼈다.

뜻밖에 국수의 자리에 오른 정명운이 대국장에 나타나자 양포의 전주인 듯한 사내가 신경이 쓰이는지 자꾸 힐끔거리며 명운을 바라보았다. 명운은 사내의 시선을 무시하고 반상 위로 시선을 돌렸다. 불과 60여 수가 진행된 바둑은 백중지세로 잘 어울렸다.

10여 분의 장고 끝에 흑을 쥔 양포가 귀에서 중앙으로 한 칸 뛰는 수를 착수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귀를 지키는 것보다 그렇게 뛰어나오고 싶은 자리였다.

‘소문대로 양포의 바둑은 이름값을 하는구나.’

누가 뭐라 해도 그 이상의 수를 생각키 어려울 정도로 양포의 바둑은 고수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바둑은 중반에 접어들어 동삼이 놓은 한 수에 의해 흑백간의 균형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동삼이 변을 지킨 한 수였는데, 당시 운석의 형태로 보아 백의 입장에선 누구나 중앙의 흑말을 공격하거나 흑의 좌상귀를 침입해 귀를 도려 내고 싶은 자리에서 동삼은 끝내기 10여 집에 해당하는 변에 철주를 내려 버렸다.

대국 당사자인 양포를 비롯해 대국장에 몰려든 구경꾼들이 동삼의 그 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동삼의 한 수는 나름대로 가치가 있었고 해석하기에 따라 묘수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 수의 의미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역시 명운이었다. 한참 동안 반면을 훑어보던 명운의 얼굴이 대국 당사자인 양포보다 더 심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귀를 도려 내는 건 눈앞의 이득에 불과했고 중앙에 주력하는 건 얼핏 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나 실패하면 허장성세가 될 공산이 컸다. 변을 지키게 되면 그 자체가 열 집 두터운 데다 그로 인해 백의 운석은 전반적으로 튼튼해진다. 어찌 보면 작아 보이는 그 수는 전반적으로 형세를 주도하는 수였다.

많은 전문기사들과의 비공식 대국에서도 절대 우위에 섰다는 괴력의 사나이 양포의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낀다. 허점을 찔린 흑이 뒤늦게 눈치를 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답답하다. 갈수록 승부의 여지가 줄어든다. 평정을 잃거나 승부심이 약해지면 상대가 놓는 수는 두려워 보이고 자신의 수는 허약하게 보이는 법이다.

명운이 보기에 양포의 그날 바둑이 그런 경우에 속했다. 일단 예상치 않았던 타격을 입은 양포는 부동심을 잃었고 동삼의 착수는 점점 더 빛을 발했다. 백은 도처에서 전과를 올리며 흑의 여기저기를 흔들며 추궁했고, 장고에 장고를 거듭한 양포는 겨우겨우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동삼의 바둑은 지극히 평범하다가 어떨 땐 전혀 궤도를 달리했다. 속공으로 벼락처럼 몰아치는가 하면 어느새 느긋하게 지공으로 돌아서 있었다.

수읽기는 약하나 기리에 밝고 기리는 약하나 수읽기가 출중한 것이 일반적인 이치이거늘, 모든 면을 종합해 볼 때 양포는 천부의 자질에다가 수읽기에 강한 고수의 면모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동삼은…….

명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새벽 네 시가 되어 통금 해제 사이렌이 울리자 명운은 대국장에서 빠져 나왔다.

여관을 나온 명운은 코트깃을 올려 세우고 새벽길을 걸었다. 새벽 바람은 차가웠다. 명운은 찬바람을 맞으며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서재로 들어온 명운은 서가에서 벽송을 끄집어냈다.

벽송이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자신을 주인으로 섬기길 거부하는 것 같았다.

명운은 벽송을 눈에 잘 띄지 않는 문갑 옆 모퉁이 구석진 자리에 옮겨 놓았다.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던 명운은 미친 듯이 동삼과 양포의 바둑을 복기했다.

명운은 감각과 눈부신 행마에 있어서만큼은 동삼에게 자신해 왔었다. 그러나 지난 밤 보여 준 동삼의 확연한 변모는 다른 뜻을 시사해 주었다. 결코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의 기운과, 그 옛날 아카기와의 대국에서 보여 준 상대를 위축시키는 살기, 그리고 완벽에 가까운 수읽기는 익히 접해 온 동삼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동삼은 달랐다.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기예의 품격이 달랐다. 날카로운 듯하다가도 어느새 부드러워져 있고 화려한가 싶다가도 어느새 우둔하게 눌러 참았다. 한 번도 맡아 본 적이 없는, 정체가 모호한 향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초범한 경지를 더듬는 수들이었다.

별안간 명운은 가슴이 섬뜩했다. 얼핏 동삼의 기풍이 설숙 스승의 기운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필사적인 심정으로 명운은 판 위에 놓인 동삼의 바둑을 노려보았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지금의 동삼 바둑만 해도 공전절후의 경계에 들어서 있거늘 만약 거기다가 설숙 스승의 그 초연함까지 가미된다면…….

명운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치밀어 오르는 질투와 절망으로 명운은 바둑판 위에 머리를 박았다. 후두둑 후두둑 돌들이 방바닥 위로 두서 없이 떨어졌다.

도저히 동삼에게만은 자신을 가질 수가 없다. 국수라는 타이틀이 허울뿐인 껍데기로만 느껴졌다. 동삼을 떠올리기만 하면 자신은 그만 왜소해지고 만다.

술을 못 마시는 명운은 서재 문갑 위에 진열된 양주 한 병을 꺼내 마개를 땄다. 내방객들이 들여온 양주였다.

생전 처음 마셔 보는 술을 명운은 겁 없이 함부로 들이켰다. 술병이 반쯤 비고 알코올의 기운이 몸 속으로 몽롱하게 젖어 들었다. 밀려오는 취기 속에서 비웃음 가득한 동삼의 얼굴이 불쑥 솟아올랐다.

‘넌 이제 영원히 나를 따라잡을 수 없어. 그만 포기해.’

동삼이 낮게 속삭였다. 명운은 손 안에 든 술병을 온 힘을 다해 거머쥐었다.

‘아니다. 난 널 이길 수 있다. 또다시 처음 바둑을 배우는 초심으로 돌아가면 될 게 아닌가.’

명운은 남은 술을 유리잔에 넘치도록 콸콸 들이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