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거슬리는 것을 잘 참지 못하는 황판수가 막 나서려는데 한 사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모처럼 고수들이 오셨으니 어떻습니까. 정 사범님께서 지도대국 한 수 하시는 게.」

한 사장이 은근히 동삼을 지목하며 제안했다.

「누구 부탁이신데 거절하겠습니까.」

동삼을 대할 때와는 달리 안면 가득히 웃음을 담으며 정 4단이 한 사장의 제의를 흔쾌히 수락했다. 수입이래야 입에 풀칠이나 겨우 면할 대국료가 전부인 전문기사들은 알게 모르게 돈 많은 바둑애호가들의 도움을 받았고 그들과의 교분을 두터이 하기 위해 매사 대인 관계를 철저히 신경 쓰는 편이었다.

정 4단이 동삼을 안경 너머로 힐끗 바라봤다.

한 사장은 손수 사랑에 있는 바둑판을 조심스럽게 가져와 두 사람 앞에 놓았다.

「일본에서 직접 모셔 온 비자판인데 다행스럽게도 큰 고수님들이 개시를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바둑판에 집중된다. 덮개가 벗겨지길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바둑판을 구하게 된 경위를 한참 동안 이야기하며 잔뜩 뜸을 들이던 한 사장이 용의 그림이 그려진 비단으로 만든 보를 서서히 벗겨 냈다. 사방정목(四方柾目)으로 재단한 비자 바둑판이 그 요요한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의 입에서 절로 경탄이 터져 나왔다.

바둑판 중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비자 바둑판이 아닌가. 비자나무는 최소한 300년 이상 묵어야 기반으로 제작이 가능하다. 그런 연유로 시중에서 비자 바둑판을 구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정 사범께서 평을 좀 해주시지요.」

주위 사람들의 반응에 흡족해하며 한 사장이 정천명 4단에게 비자 기반의 평을 부탁했다.

「향도 좋고, 결도 우수하고 참으로 훌륭하군요. 가히 신선들이 어울려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정천명이 나름대로 바둑판을 훑어보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정말 진품일세!」

「그러게. 이런 바둑판은 생전 처음 보네!」

「집안의 가보야. 이런 귀한 것을 구할 수 있으니 한 사장은 복도 많아.」

여기저기서 찬사와 덕담이 쏟아져 나왔다.

벽송도 비자였다. 동삼은 불현듯이 벽송이 떠오른다.

정명운에게 벽송을 내리던 그때의 참담한 심경이 되살아났다. 갑자기 목구멍에서 비릿한 기운이 올라왔다.

그때 주위 사람들의 지나친 과찬에 심사가 틀어진 황판수가 한 마디 빈정거렸다.

「목탁이 좋아 득도를 합니까. 갈라진 바둑판이면 어떻습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황판수에게 쏠렸다. 갑자기 실내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그럼 시작하시지요. 정 사범님.」

분위기를 일신하려고 한 사장이 정천명을 재촉했다. 비자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동삼과 정천명이 마주 앉았다.

「치수는 어떻게?」

정천명이 한 사장에게 물었다. 자신이 무조건 상수라는 걸 확인시키는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글쎄요. 두 점은 놔야 되지 않을까요, 추 사범?」

한 사장이 조심스럽게 동삼의 눈치를 살폈다.

동삼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말이 없다. 주위 사람들은 동삼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이상한 듯이 그를 바라본다.

「박복한 사람이 흑으로 한번 두어 보겠습니다.」

잠시 후 동삼이 눈을 뜨며 그렇게 대답했다. 동삼은 정천명을 향해 인사를 하며 첫 수를 놓았다. 우상귀 화점에 떨어진 흑돌을 바라보는 정천명의 얼굴이 몹시 불쾌해 보였다.

40여 수가 진행되고 아직은 포석 단계에서 갑자기 바둑판에 파란이 일어났다. 백을 쥔 정천명이 우변 눈목자로 벌린 흑 두 점에 모자를 씌워 왔다. 언뜻 보기에는 별로 무리해 보이지 않지만 당연히 날일자로 비켜 나갈 자리였다.

정천명이 하수 다루는 식으로 무리하게 모자를 씌우자 흑이 귀에 선수하고 백이 받지 않을 수 없을 때, 그 세력을 배경으로 모자를 씌운 백을 도리어 몰아갔다. 궁여지책으로 백이 한 칸 뛰어 중앙으로 탈출하자 동삼의 손이 비자판을 힘차게 두드렸다.

막상 흑이 역으로 추격하고 보니 졸지에 백의 모자 씌운 점이 세력에 지나치게 다가간 꼴이 되었다. 정천명의 손이 담배를 찾아 더듬거렸고 그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바둑은 백이 양곤마로 쫓기는 형태가 되었다. 어느 쪽이 잡혀도 초반에 백이 무너질 형국이었다.

재떨이에 정천명이 피운 담배꽁초가 시체처럼 쌓여 갔다. 장고에 장고를 거듭한 정천명이 겨우 양곤마를 수습은 하였으나 별로 시간도 쓰지 않고 살려 주며 추격해 가던 동삼의 흑진은 두텁기 그지없었다. 반면에 백은 여러 군데의 약점만 남아 있었다.

바둑이 두터우면 그 두터움을 배경으로 집은 자꾸 늘어난다.

바둑은 초반에 승부의 명암이 드러났다. 흑이 초반부터 완벽하게 밀어 버린 한 판이었다. 종반에 접어들어도 시종일관 밀리기만 했던 정천명은 존재하지도 않는 승부처를 찾아 끝없는 장고에 들어갔다.

고급요리가 가득 실린 술상이 들어왔다. 황판수가 동삼에게 술을 따랐다.

정천명은 아직 승부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장고를 거듭한다. 정천명이 장고에 빠져 있는 동안 동삼과 황판수는 느긋하게 술을 마신다. 한 사장을 비롯한 관전자들은 난감한 표정들이다.

「저쪽에서 내가 소홀히 처리했군.」

마침내 정천명이 다소 상기된 얼굴로 안경을 닦으며 변명하듯 패국을 선언했다. 무명 바둑꾼의 의외의 승리에 잠시 여기저기서 소요가 일어났으나 정천명을 의식해서인지 노골적인 표현만은 삼가하고들 있었다.

동삼을 주시하는 한 사장의 눈길이 그윽하다.

한 사장을 만남으로써 동삼은 그때까지의 생활을 청산하고 정식으로 내기바둑을 두게 되었다. 그리고 한 사장과 손을 잡은 동삼에 의해 내기바둑계는 조용히 평정되기 시작했다.

국내 최고의 방내기꾼으로 통하는 남재식이 동삼에게 호선으로 두 판, 다시 선으로 들어와 세 판 도합 다섯 판을 내리 깨지며 온 구경꾼들이 보는 앞에서 통곡을 했고 내리막길에 있긴 했어도 내기바둑에서 잔뼈가 굵은 치수 조정의 귀재 나병식이 선 둘이라는 회심의 필승 치석으로도 동삼에게 무릎을 꿇었다.

1·4후퇴 때 단신 월남하여 돈벌레로 소문난 실리바둑의 대명사 평안도 출신 방선혁. 이북 5도를 대표한다고 스스로 큰소리 쳤던 그도 선에 덤 오목의 치수로 동삼에게 생말[生馬]을 때려 죽이는 개망신을 당하며 공중분해되었고, 내기바둑계의 호랑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던 김상국, 최고의 기량을 자부하며 내기바둑의 황제 이양포에게 선으로 유일하게 버틴 그도 동삼에게 선을 접히고 여덟 집의 대패를 당해 분루을 삼켰다.

영남 출신 수읽기의 귀재 조용제도 무너지고 울산의 양동식. 남부(南部)로 원정 온 수많은 승부사들을 상대로 단 한 번 안방을 내준 적이 없는 그도 바둑이 불리해지자 갑자기 두다 말고 당구로 승부를 하자고 해서 주위를 놀라게 하는가 하면 중부(中部)의 현일모. 야통 40년에 남은 건 자존심밖에 없다고 큰소리 치던 그도 막상 대국이 시작되자 초반 20여 수 만에 슬며시 밖으로 나가더니 그 길로 소식이 끊어져 버렸다.

그리고 이재사의 수제자인 호남의 김헌자, 양포가 나타나기 전 명실상부한 제일의 승부사이자 이양포의 유일한 호적수, 그도 동삼에게 호선으로 숨 한 번 못 쉬고 연기처럼 산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