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사님께서 직접 설숙 스승의 임종을 전할 순 없었습니까?」

「스승님이 타계하신 후 나는 오랫동안 미루어 왔던 일을 실행에 옮겼다네.」

「무엇을 말입니까?」

해봉처사가 느슨하게 풀어진 승가사의 매듭을 단단히 맨다.

「언제부턴가 나는 불문에 들고자 했네. 전쟁의 참상을 겪으며 그 생각은 보다 구체화되었고 스승님이 타계함으로써 나는 나를 구속하는 마지막 굴레에서 벗어났다네. 그래서 중 아닌 중이 되어 이 산 저 산 흘러 다니며 운수(雲水)의 길로 들어선 것이지.」

열어젖힌 방문 밖으로 법당 외벽에 그려진 탱화 한폭이 박 화백의 눈에 띈다. 막 비상하려는 극락조의 힘찬 날개짓이 금방이라도 박차고 오를 듯 생생하다.

「경우야 어찌 되었던 처사님께선 연장자의 도리로 동문들의 결속에 앞장 서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기엔 그들에게 맺힌 한이 너무 컸다고 봐야겠지.」

「한이라니요?」

「박갑수는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을 것이고, 명운이는 명운이대로 평생 벽송의 빈 껍질만 부여안고 몸부림쳤을 것이야. 동삼의 한이야 더 말할 것도 없고…….」

괭…… 괭…….

둔중하게 울리는 징소리가 법당에서 흘러나온다.

스님의 저녁 예불이 시작된다.

「주사는 성씨가 뭐요?」

권 원장이 동삼에게 성씨를 물어 본다.

「추가요.」

「추씨? 희성이구만.」

동삼이 정처없이 떠돌다가 대전에 온 지는 두어 달 전의 일이었다. 대전에 와서 우연히 도청 근처에 있는 이곳 유성(儒城) 기원에 들렀다가 그 길로 줄곧 머물게 된 것이다.

권(權) 원장은 특이한 사람이었다. 좋게 말해서 무골호인이요 흠을 잡자면 인정이 많고 돈에 욕심이 없어 현실적이지 못한 사람이었다. 바둑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노동자들이나 뜨내기들이 밤늦게 슬금슬금 기원으로 기어들어 잠자리를 해결하곤 했지만 권 원장은 그들의 목적을 알면서도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고 기료조차 안 주고 아침이 되어 슬그머니 사라져 버려도 그들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모른 척했다.

게다가 권 원장은 바둑 손님들에게 기료 받는 일에도 신경이 둔감했고 오히려 틈틈이 소주잔을 돌리기도 했으니 기원엔 손님이 끊일 날이 없었다. 말하자면 권 원장의 그런 점이 오히려 기원을 운영하는 데는 장점이 되어 유성기원은 대전에서 소문 난 명물 기원이 되어 버렸다. 이런저런 일로 기원은 항상 손님들로 득실거렸고 그 결과 그리 궁색하지 않게 기원은 잘 운영되고 있었다.

「추씨라니까 생각나는 사람이 있네. 그 왜 추 사범이라고 원장님도 소문은 들었을 겁니다. 정말 바둑 하나는 기차게 둡디다.」

옆에서 줄기차게 안주를 작살 내던 토박이 방내기꾼 이필상(李必常)이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든다.

「그러고 보니 나도 들은 적이 있소. 근데 정말 그렇게 잘 두던가요?」

「그럼요. 신출귀몰, 한마디로 끝내 줍디다. 내 아직 세상에 나와서 그렇게 바둑 잘 두는 사람 본 적이 없어요. 이양포하고 둘 때 보니 내기바둑의 황제라는 양포를 어린애 손목 비틀 듯이 잡아 비틀어 버립디다.」

이필상이 자기가 직접 목격한 사실처럼 떠들어 댄다. 얼마나 실감나게 이야기하는지 동삼조차 깜빡 넘어갈 지경이다. 다른 사람은 입을 딱 벌리고 열심히 듣는데 평소 이필상과 앙숙인(돈을 많이 잃었기 때문에) 송씨가 이필상의 말에 트집을 잡는다.

「자네 정도 기력으로 언감생심 그런 사람을 어떻게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런 소리 마. 우리가 바둑은 약하지만 고수들은 많이 안다고.」

송씨는 오늘 이필상에게 다섯 판을 두어 3승 2패를 했다. 그런데 2패 중에 만방이 한 판 끼여 있어 판 수에서는 앞섰지만 돈은 송씨가 잃었다.

「추 사범이라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니까 묻는 건데 몇 살쯤 먹어 보이던가?」

송씨가 집요하게 계속 이필상을 추궁한다.

「글쎄, 30대 중반? 그쯤 보이던걸. 하지만 사람 얼굴만 보고야 그 사람 나이를 알 수 있나. 내 짐작보다 훨씬 많을지도 모르지.」

이필상이 능글능글하게 송씨의 추궁을 피해 간다.

창가에서 동삼은 묵묵히 밖을 내다본다. 통금이 다 된 거리를 사람들이 바삐 지나간다. 꽃샘 추위 탓인지 하나같이 손을 바지 주머니나 코트 깊숙이 찔러 넣은 사람들뿐이다. 골목 끝에서 어떤 취객이 고성방가를 하고 있다. 어디선가 젊은 남녀 한 쌍이 골목 입구에서 나타나더니 취객을 피해 빙 둘러 간다. 골목 한켠에 붙어 있는 여관 앞에서 남자가 여자의 팔을 잡아 끈다. 여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여관 안으로 남자를 따라 재빨리 들어간다. 그들이 들어가자마자 뚜― 하고 통금 사이렌이 울린다.

「원장님, 요즘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근간에 권 원장은 몹시 침울해 보였다. 이필상의 질문에 권 원장의 얼굴이 눈에 띄게 흐려진다.

「아니오. 왜 무슨 일이 있는 것처럼 보이오?」

「그저…… 요즘 별실에서 큰 승부가 벌어지는 것 같아서. 내가 잘못 봤습니까?」

「바둑이야 늘 두는 것 아니오.」

원장이 슬며시 비켜선다.

「솔직히 한 말씀 드리지요. 별실에 들락거리는 친구들, 그 사람들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

그 점은 동삼도 짐작하고 있었다. 보름 전부터 기원 한구석 별실에선 수상쩍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원장님, 그러지 마시고 자초지종 이야기를 해 보십시오. 누가 압니까, 무슨 도움이라도 될 수 있을는지.」

이필상이 재차 권 원장을 채근한다. 원장이 기원 안을 휘 둘러본다. 대부분의 사람은 잠들어 있고 송씨도 어느 틈엔가 구석 자리에서 담요를 덮어쓰고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원장이 한숨을 쉰다.

「알아서 뭐하겠소.」

동삼은 물끄러미 이필상을 본다. 교묘하게 은폐를 하고 있지만 이필상은 실상 대단한 바둑이다. 이필상의 능란한 위장술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지만 동삼만은 그 사실을 안다.

이필상은 기원에서 3, 4급 정도의 기력으로 행세하고 있었다. 이필상의 앙숙 송씨는 자신이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면 얼마든지 그를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기실 이필상의 위장술은 대단한 수준이었다. 우연히 그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다면 동삼도 깜빡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정확하게 속단할 순 없으나 이필상의 기력은 웬만한 전문기사 이상의 수준이었다.

이필상이 고수라는 징후를 느낀 것은 며칠 전의 일이었다. 평소 그에게 꾸준히 봉노릇을 해 온 송씨가 그날은 뜨내기 손님을 엮었다. 쌍방간에 대마가 걸린 치열한 격전이 붙었을 때였다. 분명 정상적인 수순을 밟으면 송씨가 유리한 전투였다. 그러나 초중반에 워낙 판이 좋아 오랜만에 만방이라는 대어를 눈앞에 둔 송씨는 그만 실족을 했다. 송씨는 3급인 그의 수준에서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실수를 두어 번 저질렀고, 그 결과 다 잡아 놓은 월척을 놓치고 오히려 다섯 방의 적잖은 대패를 당했다.

송씨가 처음 실수를 했을 때 옆에서 구경하던 이필상의 얼굴에는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실망의 빛이 보였다.

송씨의 두 번째 실수가 판 위에 떨어진 순간 이필상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치중은 뭐하러 하나. 그냥 내려서면 죽었는데.」

맥이랍시고 치중한 송씨의 수는 이필상의 말마따나 착각이었다. 모양상 치중수가 첫눈에 보이긴 하나 치중수는 이적수로 상대를 쉽게 살려 주는 수였다. 이필상이 거론한 일선에 내려서는 수야말로 대마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맥이었고 묘수였다. 어느 정도 고급 기력이면 젖히는 수 정도는 어떻게 둘 수 있지만 내려서는 수를 감각적으로 볼 정도면 동삼이 보기에 이필상은 대단한 고수였다.

평소 티격태격하는 호적수 송씨였지만 송씨가 다른 사람에게 무참히 당하는 것이 속상해서 이필상은 부지불식간에 실력의 꼬리를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며칠 전 이필상은 오늘과 비슷한 술자리에서 원장에게 넌지시 충고했다.

「원장님. 마포 장이란 이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