뛴다난다 하는 준재들이 모두 동삼에게 패배를 당하자 내기바둑계는 사실상 반분이 되었다. 남은 사람이라야 오랫동안 그 세계의 황제를 자처하는 이양포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 사장이나 양포의 전주인 강 사장도 그 대국만은 선뜻 과감하게 추진시키지 못했다. 쌍방이 서로를 견제하는 심리가 너무 팽배해 있었고 결과에 따라서는 한쪽이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추 사범. 노름에서 이기는 사람과 지는 사람의 차이가 뭔지 알고 있나?」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는지 황판수의 목소리가 고조되어 간다.

「승부에는 고비가 있기 마련이야. 돈이 올라올 때가 그 고비지. 그때 혼신의 힘을 다해 지키지 않으면 승부사가 될 수 없어.」

「거 일리 있는 말이군.」

옆자리에 앉아 있던 정천명이 황판수의 말에 동의한다. 한 사장 집에서 동삼에게 패한 이래 그들은 친한 사이가 되었다. 사람을 눈 아래로 내리깔고 보던 정천명의 오만함도 많이 없어졌다. 알고 보니 정천명은 천성이 맑고 깨끗한 사람이었다. 전문기사가 되어 주변 사람들이 자꾸 치켜 올려 주니 자신도 모르게 괜히 그러고 다녔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자기도 자기 자신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고 살았다는 이야기였다.

동삼도 황판수의 말에 공감한다. 불리한 바둑을 뒤집는 만큼이나 유리한 바둑을 지키기가 어려운 법이다. 동삼은 승부의 세계에는 바둑이나 그 밖의 다른 분야의 승부도 근본적으론 같은 맥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황판수를 통해 실감한다.

「추 사범과 같이 동문수학했다는 정명운 말야. 그 친구 요즘 성적을 꽤 올리나 보더군.」

동삼이 황판수를 직시한다. 승부 운운하며 허두를 꺼낸 끝에 그런 말을 하는 황판수의 저의가 의심스럽다. 황판수가 동삼을 향해 손을 흔든다.

「아아,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어. 어떤 특별한 뜻이 있어 말을 꺼낸 건 아니니까, 다만…….」

황판수가 하던 말을 멈추고 잠시 숨을 가다듬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내기바둑이나 두며 평생을 보내지 않을 생각이라면 지금이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적기라니?」

「한일기원 말일세.」

「입단하란 말인가?」

「그렇다네. 무엇이든 때가 있네. 자넨 지금 입단을 하여 자네의 족적을 후세에 알려야만 하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대단한 의미가 있지. 잘은 모르나 바둑이란 남기고자 두는 것이라네. 우리 같은 화투꾼은 남길 게 없지만 자네들은 그 왜 명국을 남길 수 있잖은가.」

동삼은 묵묵히 술잔을 기울인다. 황판수가 동삼에게 한번 더 권한다.

「추 사범. 어차피 승부가 아닌가?」

「난 승부에 관심이 없어.」

「그렇다면 어디에 관심이 있나?」

「주어진 대로 그냥 살겠네.」

「유유자적이라도 하겠단 말인가?」

황판수가 동삼을 빗댄다.

「승부사가 그렇게 말하면 예의에 어긋나는 법…… 승부를 떠난 자는 인간을 떠난 자야. 인간을 떠난 자가 명인이 되면 뭣하고 신선이 된들 뭣하겠나. 다, 부질없는 짓이지.」

「옳은 말이네.」

정천명이 황판수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그러지 말고, 추 사범. 더 늦기 전에 입단을 한번 해 봐. 입단하고 나서 싫으면 그때 관둬도 될 거 아냐.」

황판수의 지적은 예리했다. 오랫동안 승부의 세계에서 굴러 온 만큼 그의 말 속에는 탁월한 경륜이 녹아 있었다. 평이한 말이었지만 그의 말은 정곡을 찔렀고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는 동삼의 갈등을 정확하게 해부하고 있었다.

양포라는 내기바둑의 준재와 비록 승부를 못해 봤으나 동삼은 사실 내기바둑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숨은 강자들이 많이 있긴 하였지만 피비린내 나는 승부의 끝은 항상 허탈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염원해 왔던 기예의 길에서 자꾸만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한두 번씩 신문에서 접해 보는 정명운의 기보는 전문기사의 가치를 입증해 주는 뚜렷한 증거였다. 그만큼 정명운은 발전해 있었다.

「내 생각도 황형하고 같아. 추 사범, 한번 잘 생각해 보게.」

정천명이 황판수의 말에 깊은 공감을 표한다.

「그 해 가을 동삼은 한일기원에 입단했다네. 정 국수보다는 4, 5 년이 늦은 입단이었지.」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추동삼씨는 약 6개월에 걸친 기사 생활을 끝으로 전문기사직을 그만두었습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아마 복합적인 원인이 있었을 것이네. 동삼이 입단하고 얼마 후 최대포와 그 일당이 사기바둑으로 체포된 적이 있었지. 피해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동삼의 이름이 거론되었어. 결국 최대포의 강력한 부인으로 무혐의 처리되긴 했지만 그 일이 동삼의 심경에 어떤 변화를 주었다고 생각하네.」

「…….」

「게다가 그 당시 전문기사라는 게 지금과는 달랐네. 내 생각이긴 하지만 동삼이 한일기원을 나온 가장 큰 이유는 그 집단에서 더 이상 머무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네.」

「그래서 다시 내기바둑으로 돌아갔단 말입니까? 이해할 수가 없군요.」

박 화백이 혼란스러워 자신도 모르게 반박하자 해봉처사가 온화하게 웃었다.

「자네는 수묵(水墨)으로 족한 그림에 억지로 담채(淡彩)의 옷을 입히려 하는군.」

박 화백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해봉처사의 얼굴 어디에도 자신을 나무라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그 즈음을 전후해 설숙 스승은 결국 임종하셨지.」

설숙 스승을 회고하며 해봉처사의 음성이 처음으로 가늘게 떨렸다. 스승이 타계한 지 수십 년. 아직도 스승을 생각하면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뛰고 마음이 흔들린다. 명경처럼 잔잔한 심중에 파문이 일어난다. 스승을 향한 그리움에 목이 메인다.

「스승의 만년은 왜 그리도 적막했던지…….」

스승의 관 위에 회갈색 흙이 부스스 흩어진다.

아무도 없는 황막한 산에서 최해수는 홀로 스승의 봉분을 쌓아 나간다. 관 위로 한 삽 한 삽 흙을 던져 넣는 최해수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다.

동삼이 떠나고 얼마 안 있어 박갑수를 위시한 도장 사람들은 하나 둘 흩어졌다. 도장은 문을 닫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단란했던 한때의 시절은 가고 없고 을씨년스럽기만 한 고가에서 최해수는 홀로 스승을 보필했다.

서화에 몰두하다 말고 문득 공허한 표정으로 붓을 멈추는 스승을 대할 때마다, 우두커니 마당에 나가 산자락을 돌아드는 바람 속에 서 있곤 하는 스승을 대할 때마다 최해수는 스승을 보기가 안쓰러웠다. 한번 떠난 제자들은 거의 발길을 끊었다. 인적조차 없는 고가에서 스승은 외로운 말년을 보냈다.

스승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최해수는 여기저기 연락을 해 보았다. 동삼을 비롯한 다른 동문들은 소재조차 파악되지 않았고 정명운은 국수전 도전기 대국이 있어 내려오지 못했다. 누구 하나 임종을 지키는 사람이 없어 최해수는 홀로 스승을 땅에 묻었다.

둥그스름한 봉분이 완성되자, 술 한잔 스승의 무덤에 올리고 최해수는 절을 올린다. 회갈색 봉분 앞에 제자는 오랫동안 읍을 한다. 참고 참아 왔던 눈물이 최해수의 뺨 위로 흘러내린다.

오갈 데 없는 자신을 자식처럼 돌봐 준 스승이었다. 스승이라고 하나 자신에겐 친부나 마찬가지였다.

엎드린 채 굳어 있던 최해수의 입술을 비집고 참았던 오열이 터진다.

「스승님!」

최해수의 통곡소리가 깊은 산속에 처절하게 울려 퍼진다.

설숙(雪宿) 김성휘(金省輝).

광무(光武) 2년(1898년) 명문대가의 적장손으로 태어난 그는 일생을 바둑과 함께 살아온 근대 바둑의 마지막 명인(名人)이었다. 일찍이 자신의 조부와 막역지우인 스승 여목의 눈에 들어 바둑에 입문한 후 스승의 적통을 이어받았고, 평생을 후진 양성에 몸을 바친 추상 같은 기개와 고고한 기품을 지녔던 거인 설숙. 그런 그가 드디어 눈을 감았으니 때는 1964년 11월 초. 향년 예순 일곱의 나이였다.

그는 바둑인인 동시에 학자였고, 학자이기 이전에 서화를 즐기는 예술가였으며 기도(棋道)를 찾아 헤매는 구도자였다. 왜정시대를 거쳐 격동의 시대를 살다 간 명인 설숙. 비록 만년에는 초야로 돌아가 쓸쓸한 여생을 보냈지만 그의 기도정신만은 맥맥이 후세에 내려오고 있으며 누대에 걸쳐 길이길이 전해질 것이다.

그의 시신을 수습했을 때 그의 관은 흡사 비어 있는 듯 가벼웠고, 봉분을 끝내자 어디선가 한 무리 철새들이 날아와 구슬피 울며 무덤 주위를 선회하다가 홀연 서편 하늘로 비상하였으니, 후세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오랫동안 기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