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바람이 분다.

어둡고 차가운 거리에 매서운 바람이 분다.

그 길을 술에 취한 평사가 흐느적흐느적 걸어간다.

술집에 들러 술을 마신 평사가 술집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해가 저물어 어둑어둑한 밤이었다.

정월 보름인데 달빛은 춥고 바람은 황량하다.

다시 바람이 평사의 얼굴을 친다.

바람은 수만 가지 소리를 내며 평사의 귓전을 어지럽힌다.

가던 평사의 발길이 멎는다.

평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오던 길을 되돌아본다.

아무도 없는 빈 거리에 바람이 속절없다…… 모든 것이 속절없다…….

평사는 넋 나간 사람처럼 바람 속에 우두커니 서 있다…….

평사가 술에 취해 밤늦게 기원으로 돌아왔을 때 하치노헤에 있는 대정기원(大正碁院)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보시오 추선생! 나를 알아보시겠소!」

지옥 같은 징용지에서 자신을 구해 주었던 엔도 마쓰기지(遠藤松吉)였다.

「천하의 국수가 이 시골 도시 하치노헤에서…… 이런 골방 같은 초라한 기원에서…….」

엔도는 평사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말문이 막힌다. 엔도의 눈자위가 금시에 붉어진다.

평사는 그저 무덤덤하게 엔도를 바라본다. 엔도가 평사의 팔을 끌고 기원 밖으로 나간다. 하치노헤의 밤거리를 걸으며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평사가 떠난 후 엔도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마마쓰 중사에게 약속대로 거액의 돈을 지불해 평사를 탈출시킨 사건은 대충 유야무야되었으나 조선인 징용자를 놓아 주었다는 소문이 알게 모르게 주위에 퍼져 자신이 경영하던 군수품 납품회사는 문을 닫게 되었다. 그때부터 엔도는 팔을 걷어붙이고 전문 내기바둑의 전주로 나섰다.

평사를 등에 업고 일세를 풍미했던 그의 밑으로 여러 승부사들이 들어왔다. 엔도는 그들을 데리고 전 일본을 누비며 내로라 하는 내기꾼들과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선수들을 맞대결시켰다.

문제는 거기서 발생했다.

처음 어느 기간까지는 자기 쪽 선수들이 힘을 발휘하여 그런 대로 재미를 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승부사들의 출현으로 인해 엔도의 진영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대승부사 시라이시의 등장은 엔도에게 결정타였다.

거물 전주로 통하던 엔도의 눈에 시라이시는 일개 작은 승부사에 지나지 않았다. 시라이시가 이름을 조금 얻자 엔도는 시라이시의 기를 꺾어 놓을 요량으로 시라이시의 전주에게 대국을 희망했다. 시라이시의 전주는 엔도의 요청에 흔쾌히 응했고, 그것이 엔도의 몰락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

나고야(名古屋) 시 최고의 승부사로 불리는 미야케(三宅)라는 엔도의 첫 선수를 시작으로 하여 엔도가 애지중지하던 엔도 수하의 선수 다섯 명과 시라이시를 꺾기 위해 은밀히 포섭한 현직 전문기사들까지 합쳐 엔도가 내세운 선수들은 시라이시에게 어처구니없게도 여덟 차례에 걸쳐 내리 패배의 수모를 당하게 되었다.

시라이시는 하루 아침에 대승부사로 약진을 했고, 승부에 패한 엔도 사단은 일시에 붕괴되었으며 거기다가 여덟 번 연속 패배의 대가로 큰돈을 날린 엔도의 재산은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때 비로소 엔도는 평사 생각을 했다. 그는 승부의 마지막 종착역에 다다라서야 결국 다시 평사를 찾게 된 것이었다.

그는 연락선을 타고 직접 조선으로 들어가서 평사를 수소문했다. 평사를 찾기 위해 엔도는 조선 팔도를 이 잡듯이 뒤졌다. 그러나 평사의 행적은 오리무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때 평사는 오히려 일본으로 건너와 승부의 내리막길을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엔도가 평사의 연고를 알아내는 데 실패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을 땐 평사가 자취를 감추고 난 후였다. 일본에서 평사에 대한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접한 엔도는 다시 평사를 찾아 이번에는 일본 전역을 헤매고 다녔다. 그리고 이 한적한 소도시 하치노헤에서 마침내 그들의 조우는 이루어졌다.

난로에서 마른 장작이 타악 타악 소리를 내며 거칠게 타고 있었다. 시골의 여관은 여관이라기보다 여염집에 가까웠다.

겉보기완 달리 거실의 구조는 운치가 있었다. 엔도와 평사는 방이 딸린 거실에 앉아 창을 때리는 초겨울의 바람소리를 듣는다. 엔도는 줄곧 시거를 물고 있었고 평사는 술을 한잔 한잔 마신다.

이윽고 엔도가 품속에서 봉투를 끄집어낸다.

「이게 마지막 남은 내 전 재산이오.」

엔도의 목소리가 침통하다.

「추선생! 이 사람을 위해 꼭 한 번만 바둑을 두어 주시오.」

평사가 고개를 흔든다. 거절이라기보다는 양해에 가깝다. 자신의 바둑은 이제 갔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엔도는 완곡했다.

「이것 보시게, 추선생! 나는 당신의 바둑을 잘 알고 있소. 당신과 헤어지고 지금까지 난 단 한 번도 그 바둑을 잊어 본 적이 없소. 나는 알고 있소.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세상의 그 누구도 당신을 이기지 못해. 추선생, 벌써 잊었소? 그 절박한 순간에도 당신은 수를 내고 떠났지 않았소.」

「…….」

「추선생! 당신이나 나나 이렇게 끝날 수는 없소. 한 번이요! 딱 한 번만 나를 도와 주시오!」

여기저기 평사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지칠 대로 지친 엔도의 몰골도 거의 폐인에 가까웠다. 어떻게 보면 엔도는 평사에게 은인이었다. 어쨌거나 징용지에서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아니던가

「추선생!」

엔도의 애원이 간절하다 못해 절규에 가깝다. 엔도가 다가와서 평사 앞에 두 무릎을 꿇고 평사의 손을 꽉 잡는다.

「시라이시 그놈을 한 번만 잡아 주시오!」

「…….」

「추선생!」

「…….」

「추선생!」

「……시라이시.」

평사의 목소리가 입 안에 잠긴다. 엔도가 놀라 평사를 바라본다.

「……시라이시…… 시라이시…….」

 꺼져 가는 평사의 눈에 생의 마지막 불길이 일어난다.

추평사와 시라이시 마쓰히데의 대국.

훗날 수많은 기객들의 입에 두고두고 회자되었던 문제의 바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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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향기
벗따라
무등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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