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련(李寶蓮).

그 여자는 없었다.

오사카 항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평사의 손에 들린 편지지 위로 빗물이 떨어진다.

최팔용 조장의 아내 이보련은 떠나고 없었다. 최 조장이 징용지로 끌려간 지 반 년이 채 못 되어 그 여자는 인근에 사는 어떤 돈 많은 사내를 따라 오사카를 떠났다.

빗물에 편지의 글씨가 종이 주위로 검게 번진다.

보련.

이 편지가 당신 손에 당도하면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오.

단 하루도 당신을 잊어 본 적이 없었고, 살아서 꼭 당신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젠 갈 수 없소.

사랑했소.

부디 행복하시오.

평사의 손에서 편지가 떨어졌다. 편지는 허공을 몇 바퀴 선회하다가 선착장 아래 바다 위로 날아간다.

그때 누가 평사의 어깨를 툭 쳤다.

「추선생 아니시오?」

웬 사내가 놀라서 평사를 바라본다. 사내는 평사가 처음 일본을 건너온 초창기 때 자신에게 불계패당한 적이 있는 이나미(井波)라는 기정사(碁正社) 소속 전문기사였다.

「추선생이 이 오사카까지 웬일이오?」

「…….」

「어쨌든 반갑소.」

이나미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 합시다.」

이나미는 평사를 데리고 부두 근처 술집으로 들어갔다. 이나미는 자리에 앉자마자 다짜고짜 작금의 일본 바둑을 화제로 삼았다.

「지금 일본은 바둑으로 광분하고 있소.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몸담았던 기정사도 몇 년 전부터 흐지부지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소. 그 배경에는 슈사이 명인을 필두로 오청원, 기다니, 하시모도, 후지사와(호사이) 같은 걸출한 기재들이 하나같이 일본기원에 들어갔고…… 세인들의 관심이 온통 그들에게 쏠려 있으니 어쩌면 그런 결과가 당연한지도 모르오.」

이나미는 씁쓸하게 웃으며 자기 앞에 놓인 술잔을 비웠다.

「요즘 어딜 가나 사람들은 슈사이 명인의 은퇴 바둑 상대자 결정전에만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소. 아마도 기다니 7단이 우승할 것 같소.」

얼마 전 슈사이 명인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홍임보 명칭을 마이니치 신문에 양도하고 은퇴를 결심했다. 그 홍임보의 은퇴 기념 대국의 상대자 결정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고 기다니가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로 등장했다.

당시 오청원은 1년 전부터 앓아 온 결핵 때문에 요양을 하고 있었고 얼마 전 일본기원으로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그 결정전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사실 추선생이 사라지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애석해했소. 몇 년 전 오청원과 기다니가 신포석을 발표하여 전 일본이 떠들썩했지만…… 만약 추선생이 일본기원에 어떤 경로를 통하든 몸을 담았다면 오늘날의 일본 바둑은 그 판도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외다. 하다 못해 우리 기정사에 소속이 되었어도 기정사가 오늘과 같은 몰락의 길을 걷지 않게 되었을지 모르고.」

술이 어느 정도 오른 이나미는 평사를 자신이 기거하고 있는 여관으로 데려갔다.

며칠간 여관에서 같이 지낸 이나미는 어느 날,

‘바둑 두는 사람이 바둑을 멀리하면 정신마저 피폐해진다.’ 고 하며 평사의 상대로 같은 기정사 소속 전문기사 한 명을 데려왔다.

평사의 급속한 추락은 그 시점을 전후로 확연히 드러났다. 이나미가 데려온 전문기사를 상대로 하여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패배한 평사를 보고 이나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음날 일본기원 소속의 또 다른 전문기사를 데려왔지만 결과는 같았다.

평사의 납득할 수 없는 패배에 도저히 수긍이 가지 않은 이나미는 그 이유가 내기바둑이 아닌 관계로 그렇다는 속단을 내렸다. 그리하여 나름대로 평사의 상대에 걸맞는 전문 내기바둑꾼을 물색하여 스스로 평사의 전주가 되어 내기바둑을 주선했다.

그 다음날 아따미 온천의 한 여관에서 벌어진 전문 내기바둑꾼 마쓰나미(松竝)와의 대국에서도 평사는 계속 패배를 당했다. 마쓰나미라는 바둑꾼은 고베(神戶) 시에서 최고의 승부사로 손꼽히는 자였으나, 그렇다손 치더라도 옛날의 평사라면 평범한 전문기사들이나 마쓰나미 정도는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는 실력들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소문을 듣고 평사의 숙소로 두 사람이 찾아왔다. 예전의 전주 마쓰모토와 산쓰이도장의 게이오였다.

「추선생, 이게 얼마만이오? 너무나도 소식이 없어 죽은 줄만 알았소.」

마쓰모토는 평사의 손을 덥석 잡으며 어쩔 줄을 모른다.

「그 동안 추선생을 찾아 안 다녀본 데가 없었소. 큐슈로, 홋카이도로…….」

평사는 대꾸 없이 술만 마신다.

「고생이 많았소. 얼마 전에 여기 있는 게이오상에게서 추선생에 대해 자초지종 이야기를 다 들었소.」

게이오가 평사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죄송합니다. 추선생!」

게이오가 깊숙이 머리 숙여 사죄한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스승님께서 너무하셨지요. 스승님께서는 3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노환으로 꼬박 반 년을 병석에서 보냈습니다. 돌아가실 즈음에 이르러서야 추선생 얘기를 꺼내더군요. 그제사 준코와 스승님이 추선생이 사라지고 말년에 서로 소원하게 지낸 이유를 알겠더군요. 이런 말이 위안이 될는지 모르겠지만 스승님께서는 임종이 가까워지자 추선생 이야기를 하며 많은 후회를 했다오. 자신의 과오였다고……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아, 자신의 뜻을 거슬렀다고 그런 식으로 보복을 해 놓고 뒤에 와서 후회하면 뭐 하겠소!」

마쓰모토가 분통을 떠뜨린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그때는 아무도 몰랐었지요. 왜 준코가 자신을 키워 준 백부와 의절했는지…… 추선생이 그렇게 된 그 해 가을 준코는 추선생의 애를 낳았소. 딸이었지요. 불행히도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급성폐렴으로 그만…….」

「…….」

「그 후 준코는 오타루 본정목에서 제과점을 경영하는 한 평범한 홀애비에게 시집을 갔소.」

평사는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마쓰모토가 새로운 화제를 끄집어낸다. 전주로 살아오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대인 관계가 원만하다는 평을 듣는 마쓰모토였다.

「그나저나 시라이시 그놈도 이젠 드디어 임자를 만났어. 내 그놈에게는 한 번도 이겨 보지 못해 이빨을 갈고 있는 중이었는데 이제 천하 무적의 추선생이 나타났으니…… 드디어 설욕의 일전을 벌일 수 있게 되었소.」

마쓰모토는 허연 이빨을 드러내 놓고 껄껄 웃었다. 



***[100회 기념 번개 이벤트]***
소설 [승부]가 여러분의 성원 덕에 벌써 100회를 맞았습니다.
이에 조촐한 1백회 기념 깜짝 이벤트를 마련할까 합니다. 애초 계획이 없었으나 작가와 통화하던 중 그냥  지나치기에는 섭섭한 느낌이 들어 각중에 급히 벌여 봅니다. (그래서 번개 이벤트 ^^;;)

100회~107회까지 일주일간, 매회 연재물에 인상적이고 멋진, 톡톡 튀는 꼬릿글을 남겨주시는 다섯 분을 선별해 오로볼 4개와 포인트 10만점씩을 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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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참여 바랍니다.   

[100회 꼬릿글 당첨자]

당근돼지

청계천별곡

⇒  두 분은 변함없이 출근도장을 찍어주시며 힘을 북돋아주신 데 대한 감사의 표시. ^^ 물론 다른 많은 열렬독자도 계시지만 차차 마음의 점을 찍기로 하고...

숑태곤

변산거사

sarnath⇒ 인상적인 꼬릿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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