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초반부터 끊임없이 적진을 배회한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한 마리 매처럼 날카로운 발톱을 바짝 치켜세운 채 대상을 향해 시시각각으로 어둡고 음산한 손길을 뻗친다.

상대는 자연 그의 공세를 피하기 위해 잔뜩 몸을 움츠린다. 의외로 저항은 거세고 완벽해 그의 발톱은 매번 허탕을 치고 돌아가기 일쑤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상대를 건드린다. 상대의 튼튼한 성벽에 화공과 독화살을 줄기차게 쏘아 올린다.

상대는 서서히 지친다. 끊임없이 쳐들어오는 그의 발톱이 무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침내 상대는 유격대를 이끌고 나와 그의 동정을 살핀다. 그는 여전히 날카로운 발톱으로 마구 설쳐 댄다. 상대는 그의 발톱이 허세임을 감지한다.

이때가 고비다. 상대가 정예 부대를 이끌고 다시 나와 그와 정면으로 당당히 맞선다. 갑자기 무의미하던 그의 발톱이 본색을 드러내며 어마어마한 괴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상상을 초월한 강력한 그의 힘에 상대가 놀라서 급히 철군을 명령하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그의 무자비한 공세가 반상을 일시에 초토화시켜 버린다. 검붉은 피가 반상을 수놓고 세상은 아비규환이 된다. 그때 그는 긴 칼을 들어 그 어둡고 서늘한 눈으로 적장의 심장을 깊숙이 찔러 버린다.

그리고 그는 세인의 눈길을 피해 반상의 저편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일본 내기바둑꾼들 사이에 평사에 관한 소문이 다시 나돌았다. 5년 전에 자취를 감춘 추평사가 승부 세계에 다시 그 모습을 나타냈다는 미확인 정보가 퍼져 나가자 너도 나도 그 소문의 진위를 캐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새로 등장한 신인 강자들은 전설처럼 회자되었던 추평사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문에, 그를 꺾음으로써 단번에 바둑계에 두각을 나타내고자 하는 욕심으로 그와의 대결을 희망하였고, 과거 추평사에게 패배를 당했던 쓰라린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그 동안 절치부심 닦아 온 기량으로 그때의 패배를 설욕함으로써 과거의 상처를 보상받고자 그와의 대결을 바랐으며, 또 나름대로 바둑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일본의 자존심을 회복시키고자 그와의 대결을 희망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몇 년간의 세월을 담보로 평사를 공략하기엔 그들은 역부족이었다.

내기바둑계의 새로운 기린아로 혜성처럼 등장하여 20승 1패의 믿지 못할 기록을 세웠던 카사이(笠井), 그 한 번의 패배도 내로라 하는 강자에게 무리하게 두 점을 접고 둠으로써 오히려 패배를 훈장처럼 가슴에 달고 다녔던 카사이가 처음에는 호선으로, 이어서 선으로 평사에게 통한의 눈물을 삼켰다.

추평사에게 과거 세 번이나 내리 패해 다시는 승부의 세계를 넘보지 않겠다고 홀연히 불가(佛家)에 귀의했던 고바야시(小林), 불가에 귀의함으로써 무(無)의 경지를 바둑에 접목시켜 과거와 같은 패배는 다시는 맛보지 않을 것이라 호언장담했건만 그러나 승복자락을 휘날리며 속세로 돌아온 그는 또다시 평사에게 무릎을 꿇고말았다.

은밀히 내기바둑계를 왕래하며 꼭 필요한 판은 어김없이 이긴다는 뚝심의 전문기사 이다세(岩瀨), 과거 전문기사 선배들의 패배를 설욕하고 바둑 종주국인 일본의 자존심을 꼭 되찾겠다고 칼을 뽑아 든 그마저 추평사 앞에서 그 뻣뻣하던 허리를 꺾었다.

「소문으로만 전해 듣던 추평사. 그에 대한 소문은 잘못 되었다. 그에 대한 소문은 축소 왜곡되어 전해졌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는 강하다. 태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다. 뛰어넘을 수도 깨트려 버릴 수도 없는 거대한 벽과 같은……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다세는 그 말을 남기고 눈물을 뿌리며 어디론가 떠났고, 산에서 내려와 망연자실한 고바야시는 자신의 수양이 아직도 부족하다 통탄하며 이다세의 뒤를 이어 다시 산으로 올라가 버렸다.

아무도 그를 상대할 수가 없다. 아니 이길 수가 없다.

일본 내기바둑계는 또다시 과거 그들을 초토화시켰던 대지진의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발단의 근원지는 남단의 큐슈. 불운하게도 평사는 큐슈를 떠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리고 내기바둑계에서 미미한 존재였던 전주 엔도 마쓰기지(遠藤松吉)가 추평사를 등에 업고 한 시대를 풍미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