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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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52회] 11부 파문당하는 제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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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사는 남작의 집에 온 이래 처음으로 남작을 직시했다. 남작의 얼굴엔 기름기가 번질번질했다. 대체로 준수한 용모였지만 선입견 탓인지 얼굴에 욕심이 가득해 보였다. 남작이 입가로 묘한 웃음을 흘린다. 「재미있지 않은가? 간접적이나마 자네들이 그렇게 원했던 여목과 대국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기횐데 이런 호기를 놓칠 수야 없지 않은가.」 판돈이 바둑판 옆에 놓여지자 기무라가 백돌통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다 놓았다. 「나이도 있고 내가 백으로 두지.」 평사가 단호하게 그 말을 거부한다. 「그럴 순 없다. 돌을 가리자.」 「기백이 좋군.」 야마다가 돌통 속에 손을 넣고 한참 달가닥거리다가 돌을 쥔다. 평사가 이례적으로 반상 위에 흑돌 두 개를 올려 놓았다. 통상적으로 한 개를 올려 놓는 게 상례였으나 평사는 두 개를 선택한다. 돌을 가리자 반상에 열세 개의 돌이 가지런히 놓인다. 평사의 백번이었다. 평사가 흑돌을 기무라에게 밀었다. 기무라의 양미간이 찌푸려진다. 기무라는 초반부터 난해한 정석으로 반상을 운영해 나갔다. 그는 의도적으로 차후 신포석(新布石)으로 각광받게 될 미완성의 큰 눈사태형 정석으로 이끌어 나갔다. 비록 미완성이라고는 하나 많은 연구가 있었는지 기무라는 자신만만했다. 방문이 열리고 자운이 비실거리며 들어온다. 어느 정도 정신을 수습한 자운은 바둑판 옆으로 다가와 앉는다. 그는 한눈에 모든 상황을 짐작했다. 이미 빼든 칼이다. 자운이 안타까운 심정으로 평사를 바라본다. 바둑이 시작되기 전이라면 어떻게 만류해 보겠는데 벌써 20여 수가 진행된 상태고 보니 자운으로선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자운이 보기에 그들이 평사에겐 버거운 상대로 느껴졌다. 자운은 걱정스런 얼굴로 반상을 내려다본다. 평사는 신정석에 대한 변화를 검토한다. 피하고자 마음 먹으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바둑은 기세 싸움이다. 어떤 경우에는 설사 진다 하더라도 기세에 밀릴 수 없어 어려운 싸움을 감수하고 강수로 일관하는 경우도 있다. 평사는 석점머리를 과감하게 두들겼다. 바둑이 없어지지 않는 한 가장 난해한 대형정석 중 하나인 큰 눈사태 정석이었다. 한 수만 삐끗해도 천 길 나락으로 떨어지는 형국이 진행되었다. 원래 대형정석은 큰 승부에서는 피하기 마련이다. 정석 자체 크기가 반면의 약 4분지 1을 차지하는 관계로 차후 변화의 여지가 적고 판이 좁아지는 탓이다. 또한 대형정석일수록 주변 배석이 중요하며, 많은 변화에 의해 한 수만 실착을 범해도 판세를 급격히 악화시키기에 쌍방간에 대형정석은 신중을 요하는 일이었다. 기무라 쪽은 실리를 취했고 평사는 세력을 얻어 피차 큰 불만 없는 형태로 정석이 마무리되었다. 기무라는 그 미완의 정석으로 인해 내심 평사가 녹록한 상대가 아님을 직감하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일본에서 이미 많은 연구가 있었고 조선에 와서 한두 번 사용하여 재미를 보았었는데 평사를 상대로 해서는 아무런 득을 보지 못하자 거꾸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조선에도 이런 고수가 있었던가. 겨우 약관을 벗어난 정도의 연령인데 이 정도라면 이 청년을 가르친 여목의 기력은 그야말로 대단하지 않은가. 어느새 기무라의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이 맺히기 시작한다. 자운은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흑을 쥔 기무라가 모양상으로 기분 좋은 곳은 혼자서 선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 국면에서 흑은 야단스럽게 기세만 올릴 뿐 별로 힘도 쓰지 못한 채 조금씩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중반에 접어들어서도 점점 더 밀리더니 종반에 가서는 손을 써 볼래야 써 볼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해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이젠 승부수를 띄울 곳마저 없었다. 별다른 완착도 없이 기무라는 주저앉고 말았다. 두다 보니 어느새 승부는 끝나 있었다. 패인이 분석되지 않는 대국. 분위기 상으로는 기무라가 몰아갔지만 실제로는 평사에게 일방적으로 밀린 대국이었다. 패배의 원인이 분명치 않고 평사의 특별한 호착이 눈에 띄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승리였다. 자운이 보기에 기무라는 기량과 감각을 고루 갖춘 기사였다. 그런 그가 맥없이 무너진 것은 근본적인 실력 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른과 아이의 싸움이랄 수밖에. 바둑은 철저한 두뇌싸움이다. 고수들의 대국에서 백지장 같은 미세한 차이도 실제 대국을 해 보면 천양지차로 벌어진다. 의외의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평사는 분명 기무라보다 기량에서 훨씬 앞섰다. 기무라는 자신의 패배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시야가 흐릿해져 오고 머리 속이 멍멍하다. 완벽한 패배였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조선의 청년에게 당한 불가사의한 패배였다. 기무라는 끓어오르는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렸다. 「졌다.」 기무라가 투석을 했다. 남작이 평사를 바라본다. 젊은이는 아무 말 없이 판 위의 돌을 갈라 자신의 백돌을 통 속에 주워 담고 조동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노인을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 청년은 단 한 번도 돈 쪽으로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저 평범하게, 어찌 보면 거칠게 생겨 바둑과 어울릴 것 같지 않은데 그의 어디에 그런 놀라운 기예가 숨어 있을까 하고 남작은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남작은 황급히 그들의 뒤를 따라 나갔다. 「젊은이, 돈은 가져가야지.」 남작은 저만치 자운을 부축하여 떠나는 평사에게 큰소리를 지르며 봉투를 흔들었다. 평사가 돌아서서 매서운 눈빛으로 남작을 노려본다. 봉투를 흔들던 남작의 손이 멈칫했다. 평사는 자운과 함께 골목길을 빠져 나갔다. 남작은 한동안 멀거니 서 있었다. 그날따라 남산의 소나무가 잡힐 듯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사흘 후, 평사는 남작으로부터 한 통의 서찰을 받았다. 서찰의 내용은 간단했다. 일본 기사들이 한 번의 승부로는 도저히 패배를 수용할 수 없어하니 그들과 다시 자웅을 겨루어 봄이 어떻겠냐는 취지였다. 승부가 있은 다음날 자운은 떠났다. 헤어질 때 자운은 평사의 손을 꼭 잡았다. 평사를 바라보는 자운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노 기객 자운은 울면서 경성을 떠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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