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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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38회] 8부 대륙에 불어닥친 피바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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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부 치하에 번성했던 바둑 4가의 손꼽히는 기사답게 센가쿠의 기력은 눈부셨다. 하지만 대륙의 달인 귀견수 평인준에게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의 대국은 4승 1패로 평인준의 절대 우위에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나라 온천에서 돌아온 평인준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도세쓰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뜻밖에도 센가쿠와의 대국 소식을 들은 탓인지 도세쓰는 면담을 허락했다. 도세쓰와 평인준은 어두컴컴한 에도(江戶)의 외진 신당(神堂)에서 은밀하게 대면했다. 신당 밖에는 거친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미 60을 넘긴 도세쓰와 40대의 평인준은 말 한마디 없이 서로를 바라만 보았다. 도세쓰의 주름 가득한 얼굴엔 오랜 연륜의 무게가 실려 있었고 평인준의 몸에서는 준엄한 명인의 기세가 구름처럼 피어 올랐다. 그런 침묵의 상태에서 돌연 도세쓰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신당을 나가 버렸다. 그렇게도 어렵게 마련한 자리에서 도세쓰가 왜 나가 버렸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후세에 와서도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큰 기대를 가지고 일본행을 결행했던 평인준은 별 성과 없이 일본을 떠나게 되었다. 귀국길에 오른 그는 가는 길에 조선을 방문했다. 평인준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순장 바둑을 접하고 그 바둑에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자신의 제자들이 조선의 기객들을 상대로 쉽게 이기는 것을 보고 조선의 바둑은 그 역량이 대륙이나 왜국에 비해 현저히 처진다고 단정해 버렸다. 사건의 시초는 묘향산 어느 산사에서부터였다. 산수를 즐기다가 날이 저물어 절에서 하룻밤을 지낸 평인준은 묘향산의 비경에 빠져 며칠을 더 유숙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들은 우연히 그곳에서 조선 승려들 중 고수의 반열에 속하는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평인준의 제자가 그 스님에게 한 수 대국을 청하게 되었고 스님도 선선히 승낙하여 바둑을 두게 되었다. 평인준이 옆에서 관전해 보니 꽤 잘 두는 바둑이긴 하나 제자의 상대로는 부족했다. 백을 쥔 제자가 불계승을 거두고 스님을 향해 빈정거렸다. 「조선엔 정녕 고수가 없단 말이오?」 스님의 얼굴에 자비로운 미소가 흘렀다. 「빈도가 알기론 고수(高手)란 흐르는 물과 같아서 족적(足跡)을 남기지 않는 법이외다.」 며칠 후 평인준 일행은 절을 떠나 중국으로 향했다. 묘향산을 떠난 지 이틀 만에 일행은 평안북도 북진(北鎭)에 이르러 한 주막에 들게 되었다. 주막에는 때마침 내기바둑이 벌어져 소란스러웠다. 바둑은 중반을 지나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미세한 계가 바둑에서 흑을 쥔 사내가 끝내기 부분에 몇 수 실족을 하자 승부는 자연스럽게 종결되었다. 「이 끝내기가 패착이오.」 바둑에 진 사내가 자책했다. 이긴 사내가 그 말에 동의를 했다. 뒤에서 보고 있던 평인준의 제자가 나섰다. 「그렇지 않소. 승부는 이렇게 된 것이오.」 제자는 끝내기 수순을 바둑판 위에 그림처럼 늘어놓는다. 구경꾼들은 제자의 거침없는 해설에 감탄을 한다. 그때 웬 삿갓 쓴 사내가 등장했다. 「선생의 수순에 착오가 있소이다.」 제자의 표정이 굳어진다. 「무슨 말씀이오?」 제자가 사내를 쏘아 본다. 사내는 제자의 눈길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수순이란 상대에 따라 결정되는 법.」 「그렇다면 내 수순에 문제가 있다는 거요!」 갑자기 상황이 돌변한다. 구경꾼들은 사내와 제자를 주시했다. 제자는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린다. 사내는 판 위에 돌을 슬그머니 한 수 놓고 그 자리를 떠났다. 사내가 가고 처음부터 제자와 사내의 행동을 지켜보던 평인준이 무심코 반상으로 눈길을 돌렸을 때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사내가 놓고 간 수는 평인준이 보기에 가장 완벽한 끝내기의 요처였다. 다음날 주막에서 하루를 지낸 평인준 일행이 길을 나서는데 사내가 물통을 양 어깨에 메고 다시 나타났다. 사내는 인근 마을을 돌아다니며 물을 길어 파는 것을 업으로 하는 물장수였다. 평인준의 제자가 가던 길을 멈추고 사내에게 한 판의 바둑을 제의했다. 사내가 거절했으나 제자는 재차 사내에게 청했다. 사내는 마지못해 제자와 마주 앉았다. 바둑은 100여 수 만에 승부가 갈라졌다. 사내의 탁월한 기량 앞에 제자가 손 한 번 제대로 못 쓰고 압도당한 한 판이었다. 애초부터 평인준의 제자는 사내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묵묵히 관전하던 평인준이 나섰다. 「나는 청나라의 평인준이란 사람이오. 보아 하니 선생의 기예가 실로 놀라운 바, 나와 한 번 겨루어 봄이 어떻소?」 「…….」 「원하신다면 순장바둑으로 대응해 드리리다.」 평인준은 자신만만했다. 「그럴 수는 없지요. 먼 데서 오신 손님인데 그건 결코 도리가 아니지요.」 드디어 주막집 평상 위에서 중국의 국수 평인준과 무명의 조선 기객 사이에 처절한 사투가 벌어졌다. 신출귀몰한 수들이 시종 반상 위를 종횡무진 누볐고 숱한 변화와 갖은 비술이 현란하게 판 위에 그려졌다. 두 사람은 무아의 경지에서 바둑에 몰입했다. 주막엔 연일 장대비가 퍼부었으나 두 사람은 움직일 줄 몰랐다. 그렇게 사흘 밤낮으로 두어진 바둑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마지막으로 평인준은 대장고에 들어갔다. 다시 하루 반을 꼬박 새운 평인준이 반상에 한 수를 착수하자 사내는 곧바로 일어섰다. 「어디를 가시오?」 「물을 길러 가야지요.」 사내는 물통을 지고 주막 밖으로 나갔다. 평인준은 반상으로 눈길을 돌렸다. 반상을 한참 내려다보던 평인준이 돌연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이 하루 반의 장고 끝에 둔 수는 결국 성립되지 않는 수였다. 사내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사내는 평인준에게 승부를 확인시켜 주지 않고 사라진 것이었다. 평인준으로서는 일생일대의 패배였다. 평인준은 설욕하리라 다짐하고 비통한 심정으로 절박하게 사내의 행방을 찾았다. 수소문 끝에 물어물어 사내의 집을 찾아갔건만 사내는 이미 그곳을 떠났고 집을 지키던 한 노파가 평인준에게 한 장의 편지를 내밀었다. 평인준은 서신을 펼쳐보았다. 서신에는 단 한 자의 글씨만 적혀 있었다. 불(不). 평인준은 쓸쓸히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죽을 때까지 평생 짐을 지듯 ‘불’자와 싸웠다. 그리고 그는 죽음에 이르러서도 끝내 ‘불’의 숙제를 풀지 못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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