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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회] 3부 마지막 명인(名人) (1)

2007-03 조회 3900추천 0 프린트｜스크랩

정명운, 그가 한국 바둑사에 남긴 발자취에 비해 상가는 턱없이 쓸쓸했다. 화환이 각지에서 답지하였고 기원 관계자들과 기사들이 문상을 오기는 하였으나 형식적인 방문에 그치고 부의금 봉투를 전달한 후 사람들은 서둘러 상가를 빠져 나갔다. 박 화백은 세상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밤을 새워 상가를 지키는 사람은 고인의 친척 몇 사람과 상주, 그리고 박 화백을 포함해 고작 몇 명 정도였다. 어릴 적 부친을 잃고 홀어머니의 손에서 자라 이제 겨우 고등학교 2학년인 상주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빈소를 지켰다. 박 화백은 상가에 상주하면서 들어오는 화환 중에 추동삼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을까 주시하였다. 그리고 거실 입구에 놓인 문상을 온 사람들의 방명록을 뒤져 보았으나 추동삼의 이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밤이 깊어 을씨년스러운 상가에 한 노신사가 들어섰다. 고희가 훨씬 넘어 보이는 노신사는 활달한 몸짓으로 방명록에다 서명을 했다. 석파(石波) 이강천(李剛千). 방명록에 일필휘지하여 적힌 달필을 보고 박 화백은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석파 선생은 한일기원이 발족할 당시부터 기사 생활을 해 온 두어 명밖에 남아 있지 않은 기단의 원로 기사였다. 순장바둑에서부터 출발한 기풍 탓인지 지독한 싸움 바둑으로 유명했는데 성적은 그리 뛰어나지 못해 4단에 그쳤다. 그러나 아직도 왕성한 정력으로 각종 기전에 간간이 얼굴을 내밀며 구수한 입담과 해박한 지식으로 좌중을 휘어잡는 멋쟁이 노신사였다. 신발을 벗고 빈소에 오른 석파 선생의 어이어이 하는 구성진 곡소리와 상주의 곡소리가 들렸다. 곡을 끝낸 석파 선생은 향을 피워 올리고 빈소에 절을 올린 후 손자인 상주와 맞절을 하였다. 상주와 마주한 자리에 상주의 모친인 정 국수의 며느리가 같이 배석했다. 「얼마나 망극하십니까. 세월이란 참 무정하기만 합니다. 이놈을 잡아가지…… 아직까지 할 일이 남아 있는 분을 데려가다니…….」 석파 선생의 눈가에 쓸쓸한 그림자가 스쳐 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박 화백은 서재로 들어갔다. 안방에 마련된 빈소 옆의 전화기는 쓰기가 거북했다. 박 화백은 서재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장례가 끝날 때까지 집에 들어가기 힘들 것 같다는 말과 몇 가지 사안의 처리를 아내에게 부탁한 후 서재를 나왔다. 거실 쪽에서 석파 선생의 걸쭉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래서 남송(南宋)의 그 유명한 내기바둑꾼인 오환이란 사람은 꼼짝없이 저승사자에게 이끌려 명부전을 향해 머나먼 길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지. 그런데…….」 이야기 도중 석파 선생은 상가에서 내온 맥주를 한 잔 마셨다. 거실에는 밤샘하는 상주의 친척들 너덧 명이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박 화백은 그 뒤쪽의 술상에 다가가 앉았다. 석파 선생이 이야기를 이어 갔다. 「저승 가는 길에 이 오환이란 사람이 슬슬 끼가 발동한 모양이라 저승사자를 부추겼지. 내기바둑 한 판만 두고 가자고. 저승사자가 기가 막혔어. 그래도 명색이 자신은 귀신의 반열에 올라서 모르는 게 없는데 아직 심판도 받지 못한 영혼 나부랭이가 감히 자신에게 내기를 걸어 오다니, 가소롭게 여기며 승낙을 했지. 내기에 걸린 건, 오환이 이기면 저승사자가 재량껏 오환이 원하는 곳에 보내 주고 저승사자가 이기면 절색으로 소문난 오환의 딸을 저승사자에게 주기로 했지. 인간과 저승사자의 겁나는 승부가 이루어졌어. 그런데 승부에서 저승사자가 오환에게 진 거야. 유리한 판세를 꾸려 나가다가 종반에 딱 한 수 실수를 했는데 오환이 그걸 낚아챈 거라. 저승사자는 자신의 의도와 달리 엉뚱한 착점을 한 걸 통탄하며 혹시나 싶어 오환의 전생을 훑어보았지. 그러다가 오환과의 인연이 잡혔어. 저승사자가 인간이었던 시절, 그러니까 오환의 전전생에 저승사자의 부친이 바둑 두는 사람이었던 거라. 사자의 부친이 어느 내기바둑꾼에게 잘못 걸려 전 재산을 걸어 놓고 주막에서 내기바둑을 두게 되었지. 예상대로 바둑은 갈수록 사자의 부친이 불리하게 되었고 마침내 사자의 부친은 중앙 대마에 승부수를 띄웠던 거지. 그러나 그 말〔馬〕도 쉽게 죽을 말이 아니었어. 만일 잡지 못하면 사자의 부친은 무조건 지는 형세였고 그렇다고 그걸 잡을 수 있는 기력엔 절대 못 미치고 사자의 부친은 사면초가가 된 거야. 장고에 장고를 거듭해도 잡는 수가 보이지 않자 사자의 부친은 소피를 보러 밖으로 나갔어. 그때 구석에서 구경하던 길 가던 나그네가 부친을 따라 나간 거지. 나그네는 선량해 뵈는 사자의 부친이 내기꾼의 술수에 걸린 것을 알았던 거라. 소피를 보고 오는 사자의 부친에게 나그네는 딱 한 수를 가르쳐 주고 그 길로 그곳을 떠나 버렸어. 그 한 수로 인해 사자의 부친은 내기꾼의 대마를 잡고 그 판을 뒤집어 버렸지. 알고 보니 그 나그네가 송(宋)나라의 기대소(碁待詔) 신협기객(神俠碁客) 유중보(劉仲甫)였던 거라. 그러니까 오환의 전생이지. 아비의 전생 때문에 저승사자는 덜컥 착각을 범해서 패착을 놓게 되었는 거라. 인과관계란 그렇게 오묘하고 복잡한 거야.」 석파 선생은 다시 맥주잔을 비웠고 마른 안주를 한 점 집어먹더니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모든 인과관계를 안 저승사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오환에게 물었어. 원하는 곳이 어디냐고……. 오환이 잠시 생각을 하다가 저승사자에게 되려 물었어. 고 모라는 유명한 내기바둑꾼을 아느냐고. 저승사자가 안다고 대답했지. 그가 어디 있느냐. 팔열지옥 중에서도 동활지옥에 있다고 했지. 동활지옥이 어떤 곳이냐, 그곳은 생전에 원수끼리 만나서 뼈다귀만 남을 때까지 서로 물어뜯는 곳인데 뼈다귀만 남아 더 이상 싸울 수 없으면 뼈다귀를 가루로 만들고 바람이 불면 다시 살아나서 또 물어뜯고 싸우는 그런 지옥이라고 설명했지. 오환이 태연하게 자기를 그쪽으로 보내 달라고 소원을 말했어. 저승사자가 깜짝 놀라 왜 그러느냐고, 얼마든지 좋은 데를 갈 수 있는데 왜 그러느냐고 묻자 오환의 대답이 걸작이었어. 내 생전에 그놈보다 약한 것도 아닌데 한 번도 판맛을 못 봤다. 내 그놈을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한 번만이라도 꼭 판맛을 봐야 직성이 풀리겠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어이가 없어 모두 웃었다. 석파 선생은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길게 뿜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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