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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1부 침묵하는 바둑판 (2)

2007-03 조회 4601추천 0 프린트｜스크랩

낙관을 찍음으로써 그림은 끝이 났다. 녹차는 이미 싸늘히 식어 있었다. 며느리 쯤 되어 보이는 중년여인이 방문을 열고 조심스레 들어와서 미리 준비한 흰 봉투를 박 화백 앞에 놓았다. 봉투 속에는 당연히 예의 사례금이 들어 있을 것이었다. 박 화백은 봉투를 정 국수 쪽으로 밀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국수님을 담아내는 것만으로도 큰 가르침이었습니다.」「……날더러 그대와의 업을 저승으로 가지고 가란 말인가?」「부담스러우시면 저의 우둔함이나 한번 깨쳐주십시오.」「…….」 사실 박 화백은 그동안 정 국수로부터 한 수 지도대국을 받고 싶었지만 그림 때문에 그러질 못했다. 한때 전문기사를 꿈꾸었던 그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이런 기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쩌다 친분이 두터운 동년배의 전문기사들과 심심풀이로 어울려본 적은 더러 있었으나 그것은 그저 평범한 수담에 불과했고 지금 박 화백이 정 국수에게 느끼는 감정하고는 근본적으로 거리가 있었다. 「가서 바둑판을 가져오시게.」 마침내 정 국수가 입을 열었다. 박 화백은 평소에 정 국수가 즐겨 사용하던 바둑판을 가져오기 위해 서재 구석으로 갔다. 그 바둑판은 두께가 여섯 치 이상 되는 꽤 무거워 보이는 바둑판이었다. 서재 안에는 수많은 동서고금의 바둑책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바닥에 있는 돌통을 판 위에 올려놓고 박 화백은 허리를 굽혀 바둑판을 잡았다. 눈앞에 다가선 바둑판은 더욱더 육중하고 무거워 보였다. 박 화백은 양팔에 힘을 주고 조심스럽게 바둑판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생각보다 바둑판은 더 무거웠고 판을 들고 일어났을 때 그의 다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참으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굳이 표현하자면) 일종의 인기척이었다. 누군가 주위에서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박 화백이 그 방향으로 끌리듯이 고개를 돌렸을 때 문갑 구석 깊숙한 곳에 놓인 또 다른 낯선 바둑판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바둑판이었다. 몇 날을 드나들면서 지금에야 발견한 것은 그 바둑판이 놓여 있는 자리가 문갑에 의해 묘하게 은폐되어 있었고 그 주위 또한 서재 구석 볕이 잘 안 드는 후미진 곳이었다. 바둑판을 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인지, 고의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함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 바둑판은 거친 삼베로 보를 씌운 것부터가 특이했다. 보는 이미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분위기로 보아 한눈에 아주 오래된 기반(碁盤)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비록 보를 씌워 그 안의 반면(盤面)은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삼베와 고색창연한 반각(盤脚)의 기묘한 조화로움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박 화백은 한동안 멍하니 그 삼베로 씌운 바둑판을 바라보다가 거실로 나아갔다. 그러나 몸은 거실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그 이상한 삼베로 씌운 바둑판이 계속 자신의 뒤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박 화백은 흑돌 세 개를 조심스럽게 반상 위에 놓았다. 두 점이면 두어볼 만했으나 노 국수에 대한 예의로 석 점을 놓았던 것이다. 물론 전성기 때의 정명운 국수라면 석 점도 장담할 수 없는 치수였다. 국수는 별반 말이 없었다. 사십여 수가 반상 위에 물 흐르듯이 진행되었다. 포석상으로는 석 점 접바둑의 위력이 충분히 살아 있는 형세였다. 「화백의 바둑은 투지가 있군.」 귀에서 중앙으로 뛴 백돌에 박 화백이 부딪혀가자 정 국수가 말했다. 「설익어서 그렇지요.」 국수가 다시 말했다. 「설익지 않은 바둑이 있던가.」 바둑돌을 반상 위로 곱게 곱게 옮겨다 놓는 국수의 야위고 긴 손가락이 아름답게 보였다. 「출중한 사람도 있지 않았습니까?」 박 화백이 평소 궁금하게 여기던 부분이었다. 「…….」「본인방(本因坊) 도샤쿠(道策)와 슈사쿠(秀策)는 어떻습니까?」 묵묵부답이다. 「기다니(木谷) 선생이나 다까가와(高川)선생 정도라면…….」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바둑은 계속 진행되었다. 접바둑인 관계로 쉽게만 둘 수 없는 형세였으나 국수는 이미 승부를 달관한 듯 편안하게 두어 나갔다. 「역시 오청원(吳淸源) 선생이…….」 국수는 끝내 말이 없었다. 국수는 반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변화무쌍한 반상 위의 수순들을 헤아려보고 있는 것일까. 깊은 수읽기에 빠져 마지막 남은 노쇠한 열정을 태우고자 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는 먼 옛날 희미한 승부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초상화가 완성되어갈 무렵 박 화백은 국수의 얼굴에서 죽음에 가까운 안식 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 무어라 한마디로 표현할 순 없으나 오랜 승부 세계의 고뇌를 훌훌 털어버린 자연인의 모습이기도 했고 영욕으로 점철된 지난 승부의 세월을 되돌아보는 회한(悔恨)의 모습이기도 했다. 앞서간 명인(名人)들의 경계(境界)를 침묵으로 일관하는 국수의 지금 심경을 박 화백은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바둑은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국수가 시종 평이하게만 두어왔던 관계로 큰 접전도 없이 흑의 유망한 흐름이었다. 대부분의 전문기사들이 아마추어와 접바둑을 두는 경우 정수 위주로 알기 쉽게 두어가기 때문에 바둑이 무미건조해지기 쉬운 경우가 많았다. 박 화백은 어렵게 얻은 국수와의 지도대국이었지만 승부욕이 점차 감소되어 갔다. 국수의 다음 착점을 기다리는 동안 박 화백은 문득 대국을 시작하기 전 서재 구석에서 발견한 삼베보로 씌운 바둑판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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