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은 아내 성부영(成富英)을 5년 전 서울에서 만났다. 이름만 그럴 듯한 친구 무역회사에 소일 삼아 출퇴근하다가 은행원인 아내를 만났다. 죽자사자 쫓아다닌 끝에 겨우 아내에게 결혼 승낙을 얻었지만 이번엔 처가 쪽에서 반대가 심했다. 장차 빙장이 될 아내의 아버지는 날건달 같은 자신에게 딸 주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김용택이 아내의 아버지에게 수십 번 찾아가 허락을 구했지만 허사였다. 하는 수 없이 김용택은 아내를 꾀어내 교회에서 식을 올리고 도망 치듯 포천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엔 부모가 물려준 전답이 넉넉했기에 먹고 사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김용택은 고향에 내려온 지 몇 달이 지나자 처음 생각과는 달리 농사일을 아내에게 맡기고 다시 서울과 포천을 왕래했다. 전에 다니던 친구의 무역회사 사무실을 같이 쓰며 친구의 사업에 동참했고 고향에 있는 전답을 팔아 일부 투자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업은 신통찮았고, 서울을 오가며 김용택은 친구와 어울려 술과 여자로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 그러다가 결혼생활 3년이 되던 해 아내는 병을 얻었다. 폐결핵이었다.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지만 병원 약값과 때마다 좋은 음식을 갖다 대기에 그 살림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 동안 친구와 어울려 시골의 땅은 거의 팔아 치웠고 남은 것이라야 논 두 마지기와 밭뙈기 서 마지기. 아내의 병수발하기에는 턱도 없는 밑천이었다.

김용택은 난감했다. 이미 수중의 돈은 바닥이 나 버렸고, 그렇다고 자신만 믿고 따라온 아내를 못 본 척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궁여지책 끝에 그나마 몇 푼 남은 돈으로 시작한 게 노름이었다. 처음엔 연전연승, 서울에서 빈둥거릴 때 우연히 배운 노름 기술이 나름대로 통했다.

김용택은 꽤 큰돈을 챙겼고 아내의 병수발뿐 아니라 노름으로 돈을 벌어들여 그 돈으로 새로운 사업을 할 계획도 세웠다. 그러던 중 황판수라는 인물이 등장하자 김용택은 서서히 빛을 잃었고 급기야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주일 동안 김용택은 죽어라고 술만 퍼마셨다.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보아도 뾰죽한 방법이 없었다. 마침내 김용택은 황판수와 담판을 짓기 위해 황판수가 머무는 여관으로 찾아갔다. 술김에 김용택은 대뜸 시비조로 나갔다.

「보쇼. 당신 나하고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그렇게 날 물고 늘어진 게요?」

「물고 늘어지다니, 거 무슨 소리요.」

황판수가 슬쩍 뭉갠다.

「내가 바본 줄 아시오? 노름판을 떠돈 지 10년이 넘었소. 고의적으로 날 물고 늘어지지 않는 다음에야 어찌 나만 이렇게 됐소.」

「그래서 어쩌자는 거요.」

「반본전이나마 돌려 주시오.」

황판수가 기가 막혀 허허거리고 웃는다.

「당신 웃기는 사람이구만. 당신 속임수로 남의 돈 따먹으면서 반본전 돌려 준 적 있소?」

김용택이 뜨끔한다.

「툭 까놓고 얘기해서 당신 구라꾼(속임수꾼) 아니오?」

「그럼 당신도?」

「난 당신처럼 순진한 사람들 상대로 구라를 치지는 않아.」

「…….」

「구라꾼이 구라꾼에게 잃은 돈을 돌려 달라. 당신 아직 멀었어. 그만 돌아가슈.」

김용택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물러났다.

그날 밤. 김용택은 읍내 술집에서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셨다. 황판수의 비웃는 목소리. ‘난 당신처럼 순진한 사람들 상대로 구라 치지 않아.’ 그 목소리가 쉴 새 없이 김용택을 괴롭혔다. 아무리 입장이 어렵기로 황판수를 찾아가는 게 아니었다. 몰려드는 수치심으로 김용택은 급하게 술을 마셨다. 술기운이 오르자 김용택은 악에 받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래, 네 놈이 난다 긴다 하는 구라꾼이란 말이지. 황판수 이놈 두고 보자.」

술에 취한 김용택은 비틀거리며 술집 밖으로 나갔다. 불행한 사건은 그날 일어났다.

술에 만취되어 집으로 가던 김용택은 읍내 다리 위에서 낙상했다. 인근 주민들이 근처 병원으로 옮겼으나 뇌에 손상을 입어 불가피하게 큰 병원으로 당장 이송을 해야 했다. 같은 노름패의 일원인 조 소령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와 김용택을 군용 지프차에 싣고 의정부로 달렸다.

그러나 김용택은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숨을 거두었다.

아내 성부영으로서는 청천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난폭한 면이 있었지만 자상한 면도 있는 남편이었다. 생전에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한마디 원망도 없던 사람이었다.

「쯧쯧…… 저 인물에 청상과부 신세라니…….」

장례 때 문상을 온 한 아낙이 혀를 찼다.

「그러게, 남편이 노름으로 다 털리고 빈털터릴 텐데…….」

아낙의 말에 성부영은 깜짝 놀랐다. 근래 들어 남편이 왜 그리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셨는지 언뜻 생각이 미쳤다. 남편이 밤늦게, 혹은 꼬박 밤을 새우고 들어오긴 했어도 노름을 한 줄은 몰랐다. 장례를 마치고 성부영은 남편 김용택이 노름을 한 여관엘 찾아갔다. 그곳에서 성부영은 비로소 일의 내막을 알게 되었다. 남편이 죽기 전 며칠 동안 술독에 빠져 산 이유가 노름 때문이란 것을 알았다. 그리고 거기서 불거져 나온 이름이 황판수였다. 남편이 황판수의 사기도박에 걸려 가산을 탕진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성부영의 머리에 황판수의 이름이 깊게 새겨졌다. 하지만 여인이 된 몸으로 어찌해 볼 방도가 없었다.

장례를 치른 후 보름쯤 지났을 때 한 사내가 누가 볼세라 조심스럽게 성부영의 집으로 들어왔다. 거적때기로 얼굴을 깊숙이 덮어쓴 사내였다. 문둥이 이석범(李錫凡). 같은 포천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죽은 남편과 같은 고향에서 자란 죽마고우였다.

워낙 유별나게 김용택과 이석범은 친했다. 그래서 김용택은 생전에 이석범이 불시에 찾아와도 아무런 내색 없이 술과 밥을 따뜻이 대접하곤 했다. 부모형제조차 꺼리는 나병환자를 박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친구 있습니까?」

대답 대신 성부영은 왈칵 눈물을 쏟는다. 이석범은 성부영의 옷이 소복인 걸 깨닫는다. 대경실색을 한 이석범이 정색을 하고 묻는다.

「무슨 일이오? 어떻게 된 거요? 난데없이 소복은 또 뭐고?」

성부영을 다그치는 이석범의 흉한 얼굴이 더욱 흉칙하게 일그러진다.

성부영은 이석범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모든 일의 시작이 황판수란 작자로부터 비롯됐군요.」

독사같이 눈을 곤두세운 이석범이 성부영을 바라본다. 성부영이 말 대신 눈물을 흘린다. 이석범의 눈이 순간 흔들린다. 불빛 아래…… 눈이 벌겋게 부은 성부영은 그러나 여전히 아름답다. 지그시 성부영을 보던 이석범이 벌떡 일어선다.

황황히 상가를 떠난 이석범은 그 즉시 친하게 지내는 몇몇 문둥이 동료를 불러 모았다.

이석범은 옛날에 주먹깨나 쓰던 건달이었다. 그런 만큼 고집도 있고 의리도 있었다.

「그냥 둘 수 없지.」

「맞아, 경우야 어떻든 사람이 죽었으니 죄값은 치러야지.」

이야기를 들은 일행은 손쉽게 황판수의 처리를 합의했다. 맨 처음에 선뜻 동의한 곽가의 희번덕거리는 눈빛을 이석범은 무심코 보아 넘겼다.

그날 밤 여관에서 잠을 자던 황판수는 한 무리의 문둥이들에게 끌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