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는 고적했다.

오랜 기간 사람이 살지 않은 탓인지 서까래와 기둥은 군데군데 날카로운 들쥐의 이빨자국으로 쏠려 있었고 문 창호지는 크고 작은 구멍으로 뻥 뚫린 채 하나같이 누렇게 빛이 바래 있었다. 장석이 떨어져 나간 문짝은 바람이 불 적마다 덜컹거리며 인적이 끊긴 고가를 지키고 있었다. 얼기설기 잡목으로 얽어 놓았던 삽짝은 반쯤 쓰러져 있었고, 뜰에 사람 키만큼 자란 무성한 잡초는 겨울바람에 말라 죽어 있었다. 처마 밑 고드름은 한 발이 넘게 누런 쇳물 빛으로 팔을 늘어뜨렸고, 녹이 슬어 구멍이 숭숭 뚫린 양철 물받이에는 눈 녹은 물이 한 방울 고드름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형편없이 쇠락해 있기는 해도 기물은 대체로 온전히 보존된 편이었다. 아마 고가를 떠나며 최해수가 걸어 놓았을 게 분명한 자물쇠로 안채는 굳게 잠겨 있었다.

동삼은 자물쇠를 뜯어 냈다. 그리고 벌겋게 녹슨 방문고리를 밀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서가에 진열된, 한지로 만든 고서적과 바둑책들이 오랜 세월 해묵은 먼지를 뿌옇게 덮어쓰고 스산하게 꽂혀 있었다. 서가 옆 문갑도 먼지를 덮어쓰고 있었다. 동삼은 문갑을 열었다. 낯익은 스승의 글씨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應無所住, 而生其心(응무소주, 이생기심)

화선지 위에는 그런 글씨가 적혀 있었다. 세월이 많이 지나 화선지는 퇴색해 있었지만 글 첫머리의 두인(頭印)과 낙관만은 세월을 비껴 갔는지 아직도 선명하게 붉은 기운을 내비치고 있었다.

혼신의 힘을 기울여 그 글씨를 쓰던 스승의 모습이 생각났다.

기도(棋道)에 대한 견해 차이로 한바탕 다투고 난 후의 일이었다. 몇 달이 지나도록 서로 말 한 마디 없이 지낼 당시, 밥상을 들고 스승의 방에 들어갔다. 스승은 막 심(心)자를 끝내고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머무를 바 없이 마음을 낸다.’

생각해 보면 그 글은 한평생 마음의 번뇌로 고뇌했던 스승의 사상이 담긴 글이었다. 그 글에서 스승이 뜻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스승은 그 글로써 무엇을 말하려 했던가. 당시에는 스승의 그 글이 속절없는 허망한 몸부림으로까지 비화되어 오히려 작위적인 행동으로 애써 해석하기도 하였다.

육조(六祖) 혜능(慧能)은 이 여덟 자 글로 돈오(頓悟)의 깨달음을 얻었다.

비록 공문(空門)에서 쓰이는 말일지나 당시 스승의 심경을 나타내는 뜻으로 이 글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었으리라. 뒤집어 이야기하면 승부에 속하지 않고 승부를 구하는, 스승의 의지가 이 글에 함축되어 묻어나고 있었다.

그 당시의 자신의 몰이해를 영탄(永歎)하며 동삼은 그 글을 다시 문갑 속에 밀어 넣었다.

집안의 오래 묵은 먼지를 걷어 내고 급한 대로 이곳 저곳 손질을 하고 나니 고가는 그런 대로 흡족하리만큼 예스런 분위기를 재현해 내고 있었다.

집안을 대충 손보고 동삼은 헛간에 남아 있는 장작을 팼다. 바짝 마른 장작을 도끼로 내리치니 장작은 시원스럽게 갈라졌다. 아궁이에 불을 때자 고가에는 이내 훈기가 돌았다.

저녁이 가까워졌을 무렵 동삼은 술과 제물을 들고 스승의 무덤을 찾았다.

스승의 무덤은 겨우내 내린 눈으로 덮여 있었다. 동삼은 무덤 위의 눈을 정성스레 치웠다. 눈을 치우고 나니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져온 제물을 무덤 앞에 늘어놓고 동삼은 스승에게 술을 올렸다.

……스승님.

생각해 보면 죽어 당신의 무덤 속까지 자신의 바둑을 가져간 스승이 아니던가. 한때는 스승이 야속하고 원망스러웠다. 단 한 번도 자신을 따뜻한 눈길로 대한 적이 없는 스승이었다. 그러나 그런 스승의 냉담함도 실은 자신의 바둑을 대승(大乘)의 경지에 올리고자 하는 한없는 애정의 채찍질이었다.

스승의 무덤에 절을 올리고 동삼은 우두커니 저물어 가는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사람이 사는 마을은 조금씩 조금씩 어둠 속으로 잠기어 들고 있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동삼은 스승의 무덤 곁에 있었다.

보름달이 훤히 떠올랐다. 달빛을 따라 동삼은 내려가기 시작했다.

스승이 걸어오던 그날의 그 밤도 이렇게 밝았으리라. 평생 지게라고는 지어 본 적이 없는 스승이 등에 지게를 지고 있었다.

동삼이 한창 바둑 공부에 열중해 있던 시절. 달 밝은 밤이면 스승은 가끔씩 출타했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런 날이면 으레 이상하게 헛간에 쌓아 놓은 장작더미가 불어나 있었다. 처음에는 무심코 보았던 일들이 날을 거듭하며 되풀이되자 동삼은 스승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차츰 보름을 전후해 그런 일이 반복되는 것을 깨달은 동삼은 보름이 가까워지자 스승의 거동을 예의주시했다. 과연 스승은 지게에 땔감을 한 짐 지고 산에서 내려왔다. 밤에 해 온 나무인 데다 일이 서툴러서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평생 일이라곤 해 본 적이 없는 스승이 나무를 해 오고 있었다. 동삼이 얼른 지게를 받으려 하자 스승은 싸늘하게 거부했다.

당시에는 스승의 그런 행동을 동삼은 자신에게 부양받아야 하는 스승의 부담감 혹은 자존심으로 해석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공부에 몰두하는 자신을 위한 스승의 배려였고 말없는 가르침이었다. 자신을 보다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몸소 행한 실천이었다.

그 길고 추운 겨울밤만 해도 그랬다. 자신의 방에 불이 꺼지기 전에 스승의 방에 먼저 불이 꺼진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때만 해도 그것이 자신에 대한 스승의 감시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것은 스승의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이었고 한없는 애정이었다.

일본 기사들이 몰려와 도장이 풍비박산 나던 시절 ‘너는 내 제자가 아니더란 말이냐’ 하며 쏘아 보던 그 무서우리만큼 냉정했던 그 눈이…… 그 가슴 아픈 눈이…….

동삼은 길섶의 고목나무를 끌어안는다.

동삼의 머리 위로 달빛이 내려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