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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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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씹하네!」
기력 7급의 독립군 쪼쭘바리 조팔수(趙八修)의 대마가 일방적으로 몰리자 그는 연신 ‘겁씹’을 외친다(기원에서는 보통 바둑에 관련된 용어를 거꾸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씹겁은 겁씹으로, 치중을 중치, 장문을 문장, 손님을 님손, 개털은 털개 등).
마작판에서 돈이 거덜나자 새벽에, 남들은 한 번도 하기 힘든 쪼쭘바리(돈 구해 가지고 오는 일)를 세 번씩이나 했다고 해서 그날 이후 조팔수는 쪼쭘바리라는 직함을 가지게 되었다. 조 쪼쭘바리 맞은편에 앉은 삼류 시인 이병태(李秉泰)는 3급만 30년을 두며 집을 두어 채 날린 호구 독립군이다. 선대에 물려받은 유산이 만만찮았던지 이 시인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호구의 길을 마다 않고 많은 방내기꾼들의 살림밑천이 되어 주고 있었다.
그러나 호구일지언정 긴 세월 들은 풍월은 있어 쪼쭘바리가 방내기로 이 시인을 넘보기에는 한참 역부족이었다. 옛날에 자신의 시가 문예지에 발표되자 시단에 일대 파문이 일어나 하도 시끄러워서 은퇴를 했다는 믿을 수 없는 말을 이 시인은 곧잘 했다. 술집에 가면 이브 몽땅의 ‘고엽’을 원어로 부르는 것으로 봐서는 책 몇 권 본 것은 틀림없는 것 같은데 평소 술에 취하면 즐겨 읊어 대는 그가 좋아하는 시들을 정리해 보면 그의 시에 대한 식견은 그의 바둑 수준 정도지 않겠느냐는 것이 전직 학원강사 출신의 편 교수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런 이 시인에게 희한한 약점이 하나 있었다. 이 시인을 상대로 대국 도중 바둑이 불리해지면 시침을 떼고 혼잣말로, ‘사실 이선생님은 이런 데서 바둑을 두실 분이 아이고 어디 조용한 시골에 가서 시나 쓰시고 살아야 할 긴데……’ 하면서 시인이라고 슬쩍 치켜 주면 그 다음 순간 이 시인은 빠른 속도로 이성을 잃는다.
맨 먼저 우선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은 다 이겨 놓은 바둑을 멋대로 두기 시작하며 얼굴이 서서히 달아오른다. 끝내 ‘오늘따라 마음이 와 이리 허전한지 모르겠다. 바둑 이기가 뭐하겠노.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 하자.’하면서 일어난다. 그것으로 상대는 승부에 걸린 돈도 챙기고 덤으로 술까지 얻어먹는다. 대신 술을 얻어먹는 동안 말도 안 되는 그의 시론과 반복되는 그의 화려했던 과거를 참을성 있게 들어 주어야 한다.
이 시인의 약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조팔수는 대마가 거의 빈사지경에 이르자 마지막 승부수를 띄운다.
「내가 할 말은 아이지만…… 이 선생님은…… 이런 데서 바둑을 두실 게 아이고 어디 시골에 가서…… 시나 쓰고 살아셔야 할 긴데……」
사전에 연습을 여러 번 했는데도 불구하고 워낙 무식하고 발음이 서툰 조팔수인지라 듣기가 아슬아슬하다. 장 원장을 비롯한 독립군들이 이 시인과 쪼쭘바리를 흘깃흘깃 쳐다보는데 마음들이 조마조마하다.
이 시인의 반응이 의외로 길어진다. 언제부턴가 ‘시나 쓰고 사셔야 하는데’ 하면 가세(家勢)에 문제가 생겼는지 옛날만큼 반응이 빠르지 못했다. 얼마 전에 꼰충호가 똑같은 상황에서,
「이 선생님은 이런 데보다 어디 조용한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짓고 살아야 되는데…….」
말을 하다 보니 충호가 시를 농사로 잘못 표현했다. 그 말에 이 시인이 버럭 화를 냈다.
「뭐? 농사! 야, 이 자슥아! 니나 농사 짓고 살아라! 내가 미쳤나, 그 지랄하고 살게!」
충호가 뒤늦게 ‘농사가 아이고 시를 쓰셔야 되는데’ 하면서 여러 번 사과했지만 결국 용서를 받지 못했다.
팔수가 한 수를 아무 곳에나 두고 초조하게 기다린다. 이 시인을 바라보는 팔수의 갈망하는 눈이 애처롭다. 이 시인이 계속 두게 되면 팔수가 열다섯 방은 족히 져 보인다.
팔수는 승부에는 젬병이다. 마작을 쳐도 신통치 못하고 포커나 화투를 쳐도 그렇고 바둑은 말할 것도 없이 하수요, 기박(技博)엔 인연이 없는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며칠 전에는 다른 기원에서 괜히 1급짜리에게 여섯 점 놓고 무제한 방내기(축방)를 붙었다가 전판에 걸쳐 대마란 대마는 다 때려죽이고 무려 스물여덟 방을 맞았다. 한쪽 귀퉁이만 걸레처럼 두 집 내고 살아 실성한 놈처럼 앉아 있는데 그 기원 독립군 한 명이 팔수를 보고 기원 생활 40년에 세상에 그런 기가 막힌 일은 처음 본다는 것이었다. 결국 꽁지돈까지 다 털리고 개가 되어 기원으로 돌아왔는데 소식을 들은 장 원장이 생고함을 지르며,
「뭐 한다꼬 여기저기 돌아다니노! 그렇게 터지고도 정신을 못 차리나! 도대체 스물여덟 방이 뭐꼬!」
원장의 호통에 팔수는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됐는지,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노름하다 돈 떨어지면 밤이고 새벽이고 시도 때도 없이 일가친척, 친구들, 학교 선후배…… 팔수는 안면 트고 1주일만 지나면 돈을 빌리러 다녔다. 심지어 동네 사람까지 찾아다니면서 별의별 짓을 다해 미친 듯이 돈을 구해 왔건만 남은 건 빈 껍데기뿐. 꽁지 빠진 달구새끼 신세가 되어 이제는 신용이 떨어져 쪼쭘바리도 한계가 있고……
팔수가 바둑판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아무리 봐도 열다섯 방은 넘어 보인다. 많이도 죽여 놨다. 이 판이라도 어떻게 건져야 하는데. 팔수의 간절한 염원이다. 눈을 감고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위에서 감동했는지 마침내 기별이 온다. 돌을 놓는 이 시인의 착점이 갑자기 중심을 잃더니,
「팔수야, 오늘따라 마음이 와 이리 허전하노. 어디가 텅 빈 것만 같다.」
팔수가 한숨을 돌린다. 딴에 잔재주까지 부린다.
「날씨도 흐리구마요.」
「비는 안 오나?」
「비도 온다카던데…….」
「가자.」
이 시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팔수도 엉겁결에 같이 따라 일어난다.
「어디를 말인교?」
알면서 물어 본다.
「잔말 말고 따라온나. 이런 날은 술로 마음을 달래는 기라.」
이 시인이 앞서 나가자 팔수가 바둑판 밑에 깔린 돈을 얼른 챙겨 넣고 뒤따라 나가며 독립군들에게 눈을 찡긋한다. 시장 순대국 집에서 이 시인이 쪼쭘바리 팔수에게 막걸리를 손수 한잔 부어 준다.
「당구 삼 년 폐풍월(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이라고 팔수 니 바둑도 많이 늘었더라.」
「당구 삼 년 폐풍월도 풍월이지만 오늘 수가 잘 보이더마요.」
「팔수야.」
「야.」
「니 당구 삼 년 폐풍월이 무슨 말인지는 아나?」
팔수가 버럭 화를 낸다.
「사람을 뭐로 보는교!」
「알긴 아는구나.」
「그라문요. 학교 다닌 기 있는데.」
팔수가 한숨을 돌린다.
「학교는 많이 댕깄나?」
「우리 집안이 교육자 집안 아인교.」
「니 얼굴은 교육하고는 관계가 없는데.」
「공부를 너무 많이하마 얼굴이 이래된다꼬요.」
「팔수야.」
「야.」
「그라마 뭔데?」
「뭐 말인교?」
「당구 삼 년 폐풍월.」
「에이, 참! 안다 카이요!」
「말해 봐라.」
「안다 카는데 와 자꾸 물어 보는교!」
「그라이 말해 보라 안 카나.」
「꼭 해야 되겠는교?」
「솔직히 이야기해 봐라. 니 모르제.」
「사람을 뭘로 아는교! 대학 물까지 묵은 사람을.」
팔수는 중학교 중퇴다.
「그라마 말해 봐라.」
팔수가 더 버티지 못하고 어리석게도 대충 때려 잡는다.
「내기 당구 3년 만에 폐가망신했다는 이야기 아인교.」
이 시인이 팔수를 빤히 본다. 팔수는 괜스레 생담배를 뻑뻑 빨아 댄다.
「팔수야.」
「와 자꾸 부르는교!」
팔수가 진짜 화를 낸다.
「니 이마에 점이 복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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숑태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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