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이 좁아지고 있었다. 군데군데 난잡하게 흐트러져 있던 말들이 제 모양을 갖춘다.

시라이시가 혼신의 힘을 다해 평사의 진영을 삭감해 들어간다.

평사는 스스럼없이 물러선다. 물러서는 평사의 운석이 절묘하고 신비롭다.

대국장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진다.

시라이시가 장고에 몰입한다. 대국장 분위기는 완전히 평사 쪽으로 기운다. 창 밖에 어둠이 깔린다. 시라이시의 장고가 끝없이 계속된다.

평사는 등을 뒤에 기대고 눈을 감는다.

가슴이 스물스물하다. 전날 많은 양의 혈을 토했다. 정신이 혼몽해지고 졸음이 온다. 시라이시가 착점하면 평사가 눈을 뜨고 응수를 한다. 시라이시가 다시 장고에 들어가면 평사는 다시 눈을 감는다.

시간이 흐른다. 반상 위로 저벅저벅 세월이 흐른다.

따악!

돌소리에 평사가 반사적으로 눈을 뜬다. 반상 위의 돌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돌들은 이내 화정의 얼굴이 된다 …… 수백, 수천의 슬픈 화정의 얼굴이 된다 ……

시라이시가 점차 핏기를 잃어 간다. 아무리 쫓아가도 거리는 좁혀지지 않고 승부는 한 곳으로 달아난다.

다가가도 다가가도 가까워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시라이시가 평사를 바라본다. 평사의 몰골이 참혹하다. 갑자기 소름이 돋는다.

유령이다!

시라이시는 평사가 유령처럼 보인다. 시라이시는 악몽을 떨쳐 버리려는 듯 좌우로 고개를 흔든다. 시라이시는 마음을 고쳐 잡고 사력을 다해 다시 반상을 내려다본다. 참으로 끈질긴 집념이다.

바둑은 종반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시라이시는 이제 미친 듯이 발악한다. 최후의 한 집이라도 파호(破戶)하기 위해 좌충우돌 시라이시는 마구 찔러 본다.

반상에는 마지막 바람이 분다. 바람은 허물어져 가는 평사의 육신 위로 거침없이 불어온다. 평사는 바람을 막으며 황막한 대지 위에 우뚝 서 있다.

바람이 불어 내 몸의 뼈와 살을 다 뜯어 가라.

바람이 불어 내 피를 말리고 내 육신마저 송두리째 앗아가라.

그러나 넌 두 집을 지리라.

내 몸이 가루가 되고 내 영혼이 갈기갈기 찢겨져도 넌 기필코 두 집을 지고 말리라.

두 집을…… 두 집을…….

평사의 정신이 가물가물한다. 마지막 고비다. 평사는 자신의 혓바닥을 깨물었다. 비릿한 내음이 입안 가득 고여 온다. 평사는 그것을 가만히 삼켰다. 흐릿하던 정신이 조금 맑아진다.

멀리, 아득히 불빛이 보였다. 평사는 그 불빛이 어린 시절 자신이 살았던 행랑채의 따뜻한 방처럼 느껴진다.

이젠 쉬고 싶다…… 이젠 정말 쉬고 싶다…….

평사의 시야에 마지막 남은 큰 곳이 들어왔다. 얼핏 보면 작아 보이는 곳이지만 한 집이 강한 반상 최대의 끝내기다.

그래.

이것으로 그만이다.

내가 살았던 그 외로웠던 삶도.

비천한 노비의 신분도.

가슴속에 응어리진 한을 품고 떠돌던 그 모든 기억들도.

그 모든 것이 이것으로…… 이것으로…….

추평사(秋平斜).

천한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열네 살의 어린 나이로 당대의 거목 여목(余木)의 눈에 들어 고향을 떠났다.

입문한 지 수년 만에 스승의 후광을 업고 뛰어난 기재를 유감 없이 발휘하여 난세의 기객이 되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말미암아 도장에서 쫓겨나 긴 세월 떠돌아다녔다.

방랑기객(放浪碁客)이 되어 떠돈 지 어언 20여 년.

이 낯선 이국땅에서 꺼져 가는 승부의 혼을 불사르고 있으니 그의 나이 향년 41세였다.

바둑은 끝이 났다.

시라이시가 넋이 빠져 주섬주섬 백의 사석(死石)을 들어낸다. 실내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승부의 결과를 이미 짐작하고 있다. 평사의 전주 엔도의 눈에 눈물이 흐른다.

반듯반듯한 집들이 모양을 갖추고 계가가 끝이 나자 거짓말처럼 평사의 두 집 승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평사를 향한다. 평사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그 순간 평사의 몸이 바둑판 앞으로 힘없이 무너진다.

아오모리 시립병원 응급실에서 잠든 평사를 보고 엔도는 잠시 눈을 붙였다.

「당신 이 사람 죽이려고 했소? 이런 몸으로 내기바둑이라니!」

엔도는 의사에게 호된 질책을 받았다.

나 때문이다. 승부에 미쳐 사경에 이른 환자를 그런 전장으로 내몰다니, 내가 미친놈이다.

비로소 제정신으로 돌아온 엔도는 뒤늦게 후회를 한다. 그러나 새벽녘에 엔도가 눈을 떴을 때, 침대에 누워 있던 평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침대 위에는 잠든 평사의 호주머니에 자신이 넣어 준 돈 봉투가 다시 놓여 있었다. 엔도는 봉투를 움켜쥐고 실성한 사람처럼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평사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고 찝찔한 바닷바람이 거리에 불어온다.

어디를 어떻게 헤매다가 이곳까지 왔는지 모른다.

눈보라가 몰아치고 세찬 바람이 몸을 에워싼다. 아오모리항을 떠나 평사는 며칠째 북으로 북으로 무작정 발길을 옮겼다. 긴 기적 소리를 울리며 증기 기관차가 거친 들판을 지나간다. 들판 가운데로 철길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멀리 역사(驛舍)의 불빛이 깜빡거린다. 드문드문 서 있는 소나무 위로 눈이 소복이 쌓인다. 가지 위에 쌓여 있던 눈은 바람소리에 놀라 우수수 땅 위로 떨어진다.

역사로 가는 눈 덮인 들판 길을 평사는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눈은 계속 내린다. 그 눈을 맞으며 평사는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발길을 옮긴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며 걸어가던 평사가 들길이 끝나는 부근에서 결국 앞으로 쓰러진다. 평사는 일어나려 안간힘을 써 보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다. 눈은 지칠 대로 지친 평사의 몸 위로 하염없이 떨어진다. 평사는 눈을 피하려 누더기가 된 옷 속으로 몸을 최대한 움추린다. 눈보라는 들판 온 천지 위로 더욱 세차게 퍼붓는다.

졸음이 온다. 평사는 눈을 집어 입 속으로 넣는다. 그러나 평사의 의식은 자꾸 희미해져 간다.

여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태어나서 단 한 번 자신을 사랑해 주었던 여자. 그 여자는 죽어 먼 곳으로 갔고 한 점 혈육인 자식의 모습은 아스라하다.

평사의 눈이 감길 듯 말 듯한다. 졸음이 점점 더 밀려온다.

그래, 잠시만 쉬어 가자.

평사는 잠시 쉬어야겠다고 생각한다. 평사는 누운 채로 다시 옷깃을 여민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역사의 불빛이 자신을 향해 손짓한다. 불빛은 쏟아지는 눈보라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시야에서 잠긴다.

평사는 역에서 기차를 타리라 생각한다. 그 기차를 타고 스승에게 가리라 생각한다. 죽기 전에 스승의 무덤이라도 한 번 찾아가 보기를 평사는 애원한다. 평사의 가슴이 사무친다.

이날 이때까지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었던 스승 여목.

속절없는 세월 속에 비탄과 애증으로 나를 울게 했던 스승 여목.

그 역수(驛水)의 강가에서 나를 목메어 울게 했던 스승 여목.

꺼져 가는 평사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눈보라가 쓰러져 있는 평사의 몸 위로 더욱더 세차게 몰아친다.

평사의 의식이 혼곤히 젖어 든다.

저 기차만 타면…… 저 기차만 타면…….

눈은 어두운 광야에 쉴 새 없이 내린다.

내린 눈은 이내 쌓여 가고 평사의 몸은 눈 속에서 서서히 식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