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국장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하다. 시라이시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는다.

처음 평사가 자신이 놓은 첫 수를 보고 곧바로 걸쳐 왔을 때 시라이시는 평사의 노골적인 공격을 한물 간 승부사의 객기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공세는 생각보다 훨씬 거칠고 정교했다.

기리(碁理)와 정형(定形)에 구애받지 않는 그의 행마는 나름대로 흐름이 있었으며 조락한 바둑으로 보기에는 수읽기가 깊고 운석이 능숙하다. 허술해 보여 붙어 보면 힘도 만만찮다. 지금까지 자신이 대국해 온 사람들과는 바둑의 양상을 근본적으로 달리한다. 뭔가 모르게 꺼림칙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시라이시는 잡념을 털어 버리려는 듯 머리를 좌우로 흔든다. 시라이시는 정신을 가다듬어 냉정하게 형세 판단을 해 본다. 평사의 파상공격으로 바둑이 복잡하게 얽혀 있긴 하나 실리는 자신이 다소 앞선다. 문제는 미친 듯이 발광하는 평사의 공격이다. 그는 계속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여기저기 전판을 흔들어 대며 하염없이 공세를 취한다.

바둑은 아직도 도처에 미생마투성이였다. 평사가 다시 날일자로 변의 흑말을 뒤집어 씌우며 돌진해 나가자 시라이시는 같은 날일자로 가볍게 피한다. 평사의 손길이 이번엔 반대편 흑의 말을 공략한다. 시라이시가 평범하게 응수하여 안형을 갖추자 또다시 평사는 손을 빼서 좌하귀의 흑말을 추궁한다.

평사의 행보는 계속된다. 지겨우리만큼 흑진에 포화를 퍼붓는다. 기리도 없고 형평(衡平)도 없다. 오직 이기겠다는 승부의 집념만이 잠들어 있는 평사의 혼을 일깨운다.

평사가 변에서 중앙에 걸친 견고한 시라이시의 대마를 재차 공략하고 나섰을 때 바둑은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시라이시의 얼굴에 불쾌한 빛이 역력하다. 도저히 공략할 수 없는 곳에서 자신의 약한 돌을 방치한 채 무모할 정도로 사생결단을 요구하는 평사의 수법이 고약스럽다. 시라이시가 매서운 눈으로 반상을 노려본다. 피는 피를 부르고 화는 화를 자초한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칼을 뽑아 주마.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길이라면 당신을 기꺼이 상대해 주리라.’

시라이시의 눈에서 시퍼런 불길이 솟구친다. 시라이시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백대마를 겨냥한다. 허약한 백말은 그의 몰골처럼 한 수만 찔러 가면 거의 죽어 있는 모습이다. 판세의 흐름을 보아 그 말이 죽으면 바둑은 끝이다.

생각과는 달리 의외로 승부처는 일찍 도래했고 이제 남은 건 좀더 늦출 것인가 이쯤에서 승부를 결정 지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시라이시는 마음을 추스려 한번 더 냉정하게 반면을 검토한다.

지금 자신이 집으로 약간 앞서 있다고는 하나 승부란 알 수 없다. 마지막 순간까지 어떤 변수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 유리한 바둑을 지키기란 때에 따라서 그 자체가 힘겹고 불안하다. 한번 패신(敗神)에 홀리면 다 이겨 놓은 바둑도 뒤집어지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시라이시는 평소 그답지 않은 생각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슬리는 건 쌍방의 흐트러진 말들이 수습되는 과정에서 집의 균형이 어떤 식으로 안배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만의 하나 그 과정에서 추격이라도 당한다면 승부는 미궁으로 빠지게 된다. 갑자기 엉성하긴 하나 중앙으로 얼기설기 얽혀 있는 백의 허술한 세력이 그럴 듯해 보인다.

승부는 시라이시에게 결단을 요구한다. 시라이시는 반상을 재검토한다. 아무리 봐도 평사가 공격한 자신의 말은 안형이 풍부해 한 번 손을 빼도 절대 죽을 말이 아니다. 그에 비해 평사의 말은 한 방이면 사활이 심각해진다.

자, 어떻게 할 것인가. 지킬 것인가, 잡으러 갈 것인가…….

한참 고민한 끝에 시라이시는 비로소 결론을 얻는다.

우선 백 말을 잡으러 가자. 그것이 순리다. 저렇게까지 나오는데 방관하는 건 상대에 대한 예의도 아닐 뿐더러 승부사로서의 자세도 아니다. 더구나 많은 구경꾼들이 자신의 바둑을 관전하기 위해 몰려와 있는데 굳이 궁색할 필요가 있는가, 만약 실패하면 그때 가서 자신의 말을 보강해도 늦지 않으리라.

시라이시는 나름대로 계산을 철저하게 세우고 방치해 둔 백의 허약한 말에 회심의 한 수를 치중한다.

시라이시의 한 수에 시라이시 전주를 비롯한 대국장 안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감을 표한다. 시라이시는 득의의 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 물을 한 잔 쭉 들이킨다.

사람들은 평사의 끈질긴 공세가 허세였음을 실감한다. 평사의 전주 엔도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엔도의 기력으로 보더라도 시라이시의 한 수에 의해 승부의 추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느낌이었다.

대국실은 이제 평사가 그 말을 어떻게 수습하는가에 관심이 집중된다. 설령 백말이 요행히 수습이 되어 두 집을 내고 산다손 치더라도 전판에 걸쳐 승부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백이 겨우 목숨을 부지할 동안 흑은 그만큼 튼튼해지고 두터워질 것이다. 그렇게 되더라도 결국 승부는 시라이시 쪽이다. 하지만 방도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해서라도 승부를 붙잡아 볼 수밖에.

대국장 안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것이 최선의 수순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평사는 일련의 움직임을 깨고 자신의 대마를 보강하는 대신 중앙으로 뻗어 나온 흑 대마를 다시 집요하게 공략한다.

이 작자가!

시라이시가 대노한다.

이 작자가 무얼 믿고 이렇게 나온단 말인가. 기어이 자폭을 하겠다는 뜻인가.

시라이시는 격해지는 마음을 자제하며 담배를 입에 꼬나문다. 그는 절세의 승부사답게 어떤 경우라도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애를 쓴다. 시라이시는 생각에 잠긴다.

한 수만 더 가일수하면 이제 백말은 완전히 절명이다. 그는 내친 김에 흑 대마에 승부를 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혹시라도 자신의 대마가 잡히면 자신의 대마가 그의 대마에 비해 배나 가까이 되므로 바둑은 역전이다.

절대 죽을 말은 아니지만 시라이시는 보다 완벽한 길을 가기 위해 노심초사한다.

어차피 백말은 자신이 치중한 한 수에 의해 의식불명이다. 굳이 승부의 여지를 남길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자신의 말에 한 수 보강을 해도 승세는 확실한 것.

시라이시는 한 시간 장고 끝에 자신의 대마에 손질을 했다.

평사의 흑 대마에 대한 공세가 계속 이어진다. 시라이시는 이미 마음을 정리한 듯 수습의 수순을 순조롭게 밟아 간다. 마침내 흑의 대마는 변에 10여 호 정도를 장만하고 완생을 한다.

시라이시가 느긋하게 담배연기를 반상 위로 뿜어 낸다. 그 순간 사건의 발단은 먼 곳으로부터 서서히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담배를 피우던 시라이시의 눈길이 반상 어느 지점에 갑자기 고정된다. 흑의 대마가 수습되는 과정에서 중앙으로 붙어 있는 흑돌 다섯 점이 어느 틈에 백의 제공권에 들어와 있었다. 백이 한 수로 퇴로를 차단하면 그 흑돌 다섯 점은 고스란히 백의 수중에 떨어진다.

시라이시의 눈동자가 점점 커진다.

다음 순간 시라이시는 한숨을 돌린다.

이유는 간단했다. 만일 평사가 그 다섯 점을 수중에 넣는다면 자신이 치중한 한 수에 의해 비틀거리고 있는 그의 백 대마에 한 수 더 일침을 가해 완전하게 잡아 버리면 그만이었다. 지금도 그의 대마가 자신이 치중한 한 수에 의해 사경을 헤매고 있지 않은가. 집으로 계산을 하더라도 중앙의 흑 다섯 점은 군데군데 삭감의 여지가 있어 한쪽으로 몰려 있는 백 대마에 비해 그 수효가 못 미친다. 집으로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결국은 좀더 길게 가기 위해 후수를 감수하고라도 자신의 말을 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도 왕년엔 알아주던 바둑인 터, 절망적인 길을 택하지는 않으리라. 서로가 각생(各生)하고 불리하지만 집을 맞춰 끝내기까지 가는 게 최선이리라.

시라이시는 담배를 비벼 끄며 어깨에 잔뜩 힘을 준다.

자, 할 테면 해 봐라!

그의 모습은 가문의 명예를 걸고 싸움터에 나선 사무라이를 연상케 한다. 바둑은 누가 보더라도 시라이시의 의도대로 승패가 굳어지고 있었다. 평사는 바둑판 앞에서 쓰러질 듯 쓰러질 듯 몸이 앞으로 쏠려 있다. 시라이시의 승리를 보기 위해 여러 곳에서 몰려온 관전객들은 평사의 종말이 가까워졌음을 알고 그의 장렬한 최후를 보고자 그가 무너지기를 학수고대 기다린다.

이제 남은 것은 평사의 기구한 종말이었다. 한때는 열도의 승부사들이 사시나무 떨 듯 벌벌 떨었던 조선의 기객 추평사. 그의 종말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착각이었다.
바둑사에 길이 남을 사건의 윤곽은 그때부터 희미하게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평사를 제외한 평사의 대국 상대인 시라이시를 비롯해, 대국장 안에 있는 난다긴다하는 고수들의 판단은 상상도 못한 곳으로부터 오차가 생기고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비밀스러운 승부의 열쇠였으며, 승부로 전 생애를 불살라 버린 한 인간의 처절한 비원(悲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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