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역관의 집은 적막했다. 항상 사람들로 붐비던 사랑채에는 아무도 찾아 드는 이가 없었고 넓다란 사랑방이 한층 더 황량했다. 옛날의 청지기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대신에 댕기머리를 늘어뜨린 계집아이가 쪼르르 쫓아 나왔다.

「누구시라고 전해 올릴까요?」

계집아이는 말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추평사라는 사람이 왔다고 전하여라.」

계집아이가 사라지자 평사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 쓰인 옛날의 족자는 벽 중앙에 그대로 걸려 있건만 이미 빛이 바래 많이 퇴색해 있었고, 방 한켠으로는 차곡차곡 포개 놓은 몇 개의 바둑판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정 역관의 집이 망했다는 이야기는 떠돌아다니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수차례 들은 바 있었다.

「이 사람 평사! 이게 얼마만인가!」

정 역관이 방 안으로 들어서며 고함을 질렀다.

「야속한 사람. 어떻게 그리 소식이 없었는가.」

세월 탓인가. 정 역관은 많이 늙어 있었다. 정 역관이 다가가 평사의 손을 맞잡고 끌어안다시피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래 조선에는 언제 들어왔나?」

「지난 봄에…….」

「그런데 왜 이제야 나타났는가. 조선에 왔으면 응당 나부터 찾아야지.」

정 역관이 섭섭해한다. 그도 그럴 것이 평사와 정 역관은 아저씨와 조카 같은 사이가 아니던가. 정 역관이 평사를 생각하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방 한구석에 서 있던 동삼이 슬그머니 밖으로 나간다. 정 역관이 나가는 동삼을 쳐다본다.

「저 아이가 동삼인가?」

「예.」

「죽은 아이 엄마를 생각하면 내 자네에게 미안하이. 자네를 봐서라도 어떡하든 내가 화정이를 도와 줬어야 했는데…….」

정 역관은 지난날을 생각하며 만감이 교차한다.

정 역관의 집이 몰락한 것은 정 역관이 북해도로 평사를 찾아갔던 그 다음해부터 시작되었다.

20년 동안 자신의 밑에서 성실히 일해 온 김 집사가 종로에 있는 만물상을 일인에게 팔아 넘기고 어디론가 잠적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의 일이었다.

평소 바둑, 마작 등에 심취해 사업을 다소 소홀히 하긴 했으나 20년 가까이 피붙이처럼 대해 온 김 집사가 그런 식으로 자신을 배신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향 이천에 있는 전답마저 김 집사와 동척(東拓)의 농간으로 왜놈들에게 넘어가자 정 역관은 하루 아침에 빈털터리가 됐다.

그때부터 정 역관은 김 집사를 찾아 전국 각지를 헤매고 다녔다.

1년, 2년…… 정 역관은 미친 듯이 김 집사의 행방을 추적했다. 그 사이 정 역관의 처는 홧병으로 죽었고 집안은 완전히 거덜이 났다.

정 역관이 화정이를 찾아간 것은 그 즈음이었다.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김 집사가 만주 봉천(奉天)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정 역관은 부랴부랴 그곳으로 올라갔다. 두 달 가까이 만주 바닥을 이 잡듯이 뒤졌으나 결국 김 집사를 찾지 못했다. 아무 소득 없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정 역관은 화정이 나가는 기방에 들렀다.

그곳에서 화정이 돈 많은 어떤 홀애비에게 재가를 했다는 말을 듣고 정 역관은 통탄을 했다.

평사가 일본으로 떠난 뒤 정 역관과 화정은 가깝게 지냈다. 화정은 정 역관을 집안 어른처럼 대했고 정 역관은 평사가 돌아올 때까지 화정을 지켜 주리라 마음 먹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자신의 몰락으로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고 화정은 화정대로 정 역관은 정 역관대로 서로 각기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그 후 정 역관은 평사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무거웠다.

「자네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뒤숭숭했네. 내게 그런 일만 없었더라도…….」

정 역관이 곰방대의 담배를 뻑뻑 빨아 댄다.

「화정이 죽고 동삼이를 찾아갔을 땐 벌써 법고 스님이 그애를 절로 데려간 후였지…….」

정 역관이 한숨을 푹 내쉰다.

「모든 게 팔잘세. 죽고 사는 인간사 모든 일이 다 팔자 소관이지.」

「…….」

「이제 어쩔 셈인가?」

「일본에 다녀올 일이 있습니다.」

「일본에? 무슨 일로?」

「그럴 일이 있습니다.」

「그럼 그 동안 동삼이를 내가 데리고 있으면 어떻겠나?」

평사가 고개를 저었다.

「필동으로 데리고 가겠습니다.」

「설숙도장에?」

「예.」

다음날 평사는 수원 박 노인 사랑에서 바둑을 두어 생긴 돈의 일부를 계집아이에게 맡기고 그 집을 나왔다.

20부. 역수(驛水)의 강가에서

필동의 완만한 구릉에 위치한 도장은 과거 자신의 여목도장 시절에 비해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낡고 오래된 기와, 풀이 무성한 뒤뜰, 본채 넓은 대청, 마당에서 멀리 보이는 산, 그 어떤 것 하나 변한 게 없이 모두가 그대로였다.

평사는 자신이 기거했던 도장 한켠에 붙어 있는 아래채를 무심히 바라본다.

자신도 이곳에서 피나는 수련을 쌓은 적이 있었다. 걸출한 바둑으로 후세에 길이 남을 명인이 되고자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갔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도장을 떠남으로써 자신의 삶은 유형(流刑)의 땅에서 온갖 오토(汚土)로 뒤범벅이 된 채 형언할 수조차 없는 파란의 일생을 걸어오지 않았던가.

… ….

평사는 눈을 감는다.

그 시절은 간 곳이 없고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을 타고 바람 속으로 바람이 되어 가 보리라 했다.

바람이 되어 이 세상 어느 곳이라도 훨훨 날아가고 싶었다.

문득 평사는 손으로 바람을 잡으려 한다.

그러나 바람은 잡히지 않는다.

아무리 애를 써도 바람은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손아귀를 빠져 나가 버린다.

그리고 자신은 잡히지 않는 세상을 떠돌다 지쳐 이곳에 돌아와 서 있는 것이다.

평사가 눈을 떴을 때 대청 위에서 바둑을 두는 원생들 중 나이가 들어 보이는 청년이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설숙 선생을 만나러 왔네.」

청년은 볼품없고 초라한 행색의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본다. 평사는 청년이 주춤거리는 사이 안채로 걸어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