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안에 염주를 굴리는 법고의 손이 염주를 희롱하듯 한다.

「오래 전에 여목 선생께서 열반하시고 얼마 안 있어 추 선생이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소식은 풍문에 들었소이다.」

8년 전 이야기다.

「그때 왜 일본으로 가셨소이까?」

법고의 안중에 죽은 여목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여목이 타계하자 그를 깊이 사모하던 법고는 여목을 그리며 이곳 봉선사에서 백일 지성을 올렸다. 법고는 그 당시 평사의 무분별한 행각이 여목 스승의 뜻이 아닐 것이라 여겼다.

「왜 떠나셨는가 그 말이오.」

법고가 추궁하듯 평사를 다그친다.

「이유는 없소.」

평사는 법고의 의도를 이쯤에서 잘라 버린다. 법고는 호탕하게 웃었다. 법고는 평사의 마음을 이미 헤아리고 있었다.

「하긴 가고 오는 데 무슨 이유가 있겠소. 생사 윤회의 이치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오가는 사람의 일이야 말해 무엇하겠소. 그래 긴 세월 동안 어떻게 지내셨소. 외로운 객지에서 고군분투하셨다는 말은 정 역관을 통해 간혹 듣긴 했소만.」

「……어딜 가나 무어 다를 게 있겠소.」

예나 지금이나 평사의 말투는 여전히 투박하다.

「옳으신 말씀. 부처님께서도 시방세계가 한결같다고 하셨소. 마음 먹기에 따라 세상 천지가 불국토(佛國土)요 정토(淨土)라 하지 않았소이까. 내가 보기에 추선생께선 세간을 떠돌다 선각을 이룬 선승이 되어 돌아오신 것 같소이다. 하하하.」

법고가 다시 호탕하게 큰 소리로 웃었다. 남을 비꼬는 것 같은 그의 말투가 이상하게 친근감이 있다.

「스님.」

「듣고 있소이다.」

평사가 말을 하려다 말고 멈칫한다.

「아이 말씀이오?」

법고가 대신 대답한다.

「그렇소.」

「천하의 기객께서도 육친의 정은 어쩌지 못하나 보구려…… 지난날 소승이 아이를 데려왔소. 정 역관으로부터 아이의 모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가서 아이를 데려왔지요. 아비를 닮았으면 기재가 뛰어날 터, 이 참에 당대의 명인이나 만들어 볼 요량으로 말이오. 그런데 실망했소이다.」

법고는 거기서 일단 말을 멈추고 물 한 사발을 벌컥벌컥 소리 내어 마신다. 옷소매로 입을 닦은 법고가 다시 사발에 물이 넘치도록 부어 평사 앞으로 내민다.

「과묵한 아이이긴 하나 영명한 구석이 있어 기재가 뛰어날 것이라 짐작했는데 막상 바둑을 가르쳐 보니 기재는 간 곳이 없고 승부에 대한 집착만 영락없이 아비를 닮아 소승을 어리둥절하게 했소이다. 이제 겨우 가는 길만 터득한 아이가 승부에 빠져 바둑 한 판으로 소승과 밤을 새운 적도 있답니다.」

「…….」

「아이를 어떡하실 작정이오?」

「데려가겠소.」

「부모가 데려간다는데 소승인들 어쩌겠소. 내 그놈의 머리를 깎아 승복을 입힐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중이 되는 것도 인연이 있어야 하는 법.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가 보기엔 아이의 상이 기(碁)에 머물러 있소. 아이를 설숙도장으로 보내시오.」

「…….」

「재주는 다소 모자라나 다행히 바둑을 대하는 품세가 어린아이답지 않게 신중하고 정성이 깃들어 있소. 자고로 재주는 하늘이 내리나 승부는 세간의 일, 험준한 산을 넘어 일도정진하는 것도 장부의 길이라 할 수 있지 않겠소.」

겉보기엔 덩치만 크고 험하게 생긴 법고였으나 외형과는 달리 의외로 세밀하고 혜안이 물 흐르듯 한다.

「동삼아!」

법고가 밖을 내다보며 아이를 부른다. 온 산이 봄 기운으로 무르익었다. 능선을 타고 흐르는 산등성이의 곡선이 절의 처마와 교묘하게 맞물려 있다. 한껏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 있는 소나무 사이로 내비치는 해묵은 돌탑 위엔 어느새 푸르스름한 이끼가 피어 있었다. 어디선가 청량한 소슬바람이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동삼이 나타났다.

「여기 앉아 계신 분이 내가 누누이 이야기했던 조선의 국수이자 너의 생부이신 추평사 선생이시다. 어서 큰절을 올려라.」

동삼이 평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상상으로만 막연히 그려 왔던 아버지의 얼굴이다.

오래 전, 어린 시절. 어머니는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는 날이 잦았다. 어머니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긴 밤이 새도록 어머니는 검은 틀에 붉은 색의 수를 놓았다. 자신이 오랫동안 앓아 누웠을 때 머리맡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던 어머니의 그 슬픈 눈.

어느 날,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낯선 집으로 갔다. 그 집에서 만난 남자를 어머니는 이제부터 아버지라고 부르라 했다.

어머니는 점점 배가 불러 왔다. 뱃속의 아이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네 동생이라며 어머니는 쓸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봄, 어머니는 내 동생이라고 하던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세월은 그렇게 자꾸자꾸 흘러갔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갔다. 겨울이 오고 다시 겨울이 갔다.

「무얼 하느냐. 어서 절을 올리지 않고!」

법고 스님의 호통에 동삼은 무릎을 꿇고 절을 한다.

냉수사발을 쥐고 있는 평사의 손이 사발에서 멀어진다.

화정이 죽고 여러 해가 지난 봄이었다.

마지막 늦더위가 뙤약볕을 쏟아 붓고 있었다. 간간이 무더운 바람이 먼지를 피워 올리며 황톳길 위를 부옇게 덮었다. 평사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몇 걸음 뒤처져 동삼이 평사의 뒤를 부지런히 따라가고 있었다.

장터에 들어서자 그들은 주막집으로 들어갔다. 장날이라 그러한지 주막집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동삼이 국밥으로 허기를 채우는 동안 평사는 술을 마셨다.

아버지는 언제나 술을 마셨다. 아버지를 따라 이곳 저곳 떠돌아다닌 지 몇 개월이 지나도록 동삼은 아버지가 밥을 먹는 모습을 별로 보지 못했다. 밥 대신 아버지는 늘상 술을 마셨고 그 술기운으로 하루하루를 지탱하는 것 같았다.

술을 마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침울했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자신의 어린 나이로는 감지할 수 없는 비애가 흘렀다. 그때마다 동삼은 죽은 어머니 화정을 생각했고 왠지 까닭 모를 슬픔이 밀려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을 에워쌌다.

주전자에 남은 술을 다 비운 아버지가 성큼 일어나 주막집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으로 들어간 아버지는 한 시간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동삼은 아버지가 들어간 방 앞으로 다가갔다. 동삼은 살그머니 방문을 열었다.

사람들 틈 사이로 아버지의 낯익은 등이 보였다. 아버지는 20대의 나이로 보이는 젊은 사람과 마주하고 있었고 그 주위로 여러 사람이 빙 둘러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