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사는 우울한 눈으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월의 마지막을 알리는 굵은 장대비가 부대 의무실 창문을 두드리며 산산이 흩어져 내리고 있었다. 빗물에 젖은 창 밖 전경이 온통 일그러져 기괴한 모습으로 투영되었다.

손씨…….

평사는 소지품 속에 숨겨 둔 빼갈을 꺼내 마개를 땄다.

얼마 전 이다세를 잡고 엔도가 특별히 마련해 준 회식 자리에서 손씨 생각이 나 몰래 뒤로 빼돌린 중국산 빼갈이었다. 평사의 약점을 철저히 이용한 엔도와 소장은 뼈를 깎는 승부에서 벌어들인 돈 중에 단 한푼의 보수도 평사에게 지급하지 않았다.

회식을 마련한 자리도 사실은 워낙 큰 승부였기 때문에 승부에 이긴 엔도와 소장이 저희들끼리 자축하는 자리였다. 오전에 시작한 바둑이 이다세의 장고로 인해 새벽 두 시에야 끝이 났고 시간이 늦어 도저히 구마모토에서 수용소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회식의 자리에 끼워 준 것에 불과했다.

그날 소장은 술자리가 끝나고 평사가 여관방으로 들어가자 밖에서 자물쇠를 채웠다. 그것도 못 미더워 데리고 간 이마마쓰 중사에게 방 밖에서 밤새도록 감시할 것을 명령했다. 평사의 손에 들려 있는 빼갈은 그날 몰래 숨겨 둔 것이었다.

연병장 밖으로 장대비가 더욱 세차게 퍼붓는다. 갑바를 뒤집어 쓴 보초의 모습이 비에 가려 보일 듯 말 듯한다. 평사는 빼갈 한 모금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목구멍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결국…….

평사는 손씨의 사고 소식을 우연히 소장실에서 접했다. 소장과 전날의 바둑을 복기할 때 부관이 들이닥쳤다.

「사고가 있었습니다.」

부관의 말에 소장이 인상을 찡그렸다.

「어떻게?」

「굴착 작업 도중 천장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얼마 전부터 징용인들은 산허리를 뚫는 터널 작업에 내몰리고 있었다.

「사상자는?」

「현장에서 다섯 명이 사망했고 부상자는 중상자 일곱 명 포함 총 아홉 명입니다.」

「…….」

「명단, 여기 있습니다.」

소장이 명단을 쭉 훑어보았다. 소장은 수용소 일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근래엔 엔도와 더불어 평사의 내기바둑에 온 정신이 팔려 있었다.

「명단 위쪽이 사망잔가?」

「예. 그렇습니다.」

무심코 명단을 바라보던 평사의 눈에 손씨의 이름이 들어왔다. 상단에서 두 번째 줄, 손씨의 이름은 사망자 명단에 들어 있었다.

기어이…….

소장이 부관에게 다시 물었다.

「경상자는?」

「하루 이틀 숙사에서 쉬면 곧 현장에 투입될 수 있습니다.」

「중상자들은?」

부관이 고개를 흔들었다. 소장이 서류를 부관에게 건네 주며 명령했다.

「사망자와 중상자들은 관례대로 처리해.」

소장은 부관이 채 방을 빠져 나가기도 전에 다시 바둑판에 머리를 박았다. 그에게 있어 징용인들의 목숨은 한 판의 바둑보다 시덥잖은 존재였다.

평사는 손에 들린 빼갈을 본다. 언젠가 기회를 봐서 손씨와 같이 한잔 마시려던 빼갈이었다.

밖에 있을 때의 손씨는 애주가였다.

「술이란 게 말이지. 아무리 삭막한 세상이라도 술 한잔 들어가면 그때부턴 모든 게 따뜻해진단 말일세. 뜨끈뜨끈한 국물에 독한 빼갈 한잔 마시면 온 세상이 따뜻해. 차가운 바람도 따뜻하고, 눈보라 몰아치는 추운 겨울도 따뜻하고, 갈 곳 없어 거리를 헤매고 다녀도 외롭지 않아. 눅눅히 습기에 찬 내 여인숙 골방…… 꿈속에 나타나는 내 아내…… 내 아들의 얼굴도 그땐 환하게 웃고 있다 그 말일세. 어쩌다가 운좋게 삐루(맥주) 한잔이라도 마시는 날엔 온통 세상이 다 내 것 같아. 난 꿈속에 나타난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지. 다 잘될 거야…… 잘되겠지…….」

손씨는 그렇게 말하며 옛날의 술맛을 떠올리는 듯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평사가 술로 세상의 비애를 마셨다면 손씨는 술로 자신의 희망에 취했다.

비는 계속 내렸다. 새벽이 올 때까지 비는 줄기차게 내렸다. 내리는 비 사이로 연병장이 희끄무레 밝아 온다.

‘잘 가시오, 손씨.’

평사는 병 속의 술을 천천히 바닥에 부었다. 바닥에 쏟아진 빼갈은 조금씩조금씩 낮은 데로 흘러 내려갔다. 독한 빼갈 냄새가 허공으로 서서히 번졌다.

흥건히 고인 술 속에서 손씨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