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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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64회] 12부 떠도는 부초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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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을 바라보는 평사의 각진 턱이 꺼치꺼칠하다. 화정은 남자가 여느 사람과는 틀리다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 본다. 화정은 남자가 평범하지도, 사리에 맞지도 않을 거라 생각한다. 화정은 남자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남자를 보는 화정의 눈에 뒤틀린 또 다른 남자의 얼굴이 겹쳐진다. 화정은 고개를 흔들었다. 술에 취해 밤낮 없이 친모(親母)를 괴롭히던 사람. 노름에 미쳐 자신을 권번에 팔아 넘긴 사람. 2년 전, 그 사람이 죽었을 때 화정은 죽었다는 소식만 들었다. 화정은 눈을 감는다. 감긴 눈 사이로 바로 눈앞에 있는 메마른 남자의 얼굴이 가물가물한다. 남자의 돌 놓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는 귓전을 울리면서 긴 터널을 지나간다. 반상에 돌들이 가득 채워지고 대국은 끝이 났다. 평사의 예상대로 백의 한 집 승이었다. 아오야마의 고개가 밑으로 떨어진다. 나카지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다. 「쿠소(빌어먹을)！」 나카지마가 욕설을 퍼부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린다. 나카지마가 나간 후 거실에 남은 사람은 그 누구도 말이 없다. 창 밖엔 어느 틈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한적한 밤거리를 인력거가 달린다. 인력거가 도착한 곳은 종로에 있는 어느 고급 여관이었다. 방 안에는 미리 술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인력거에서도 여관에 도착하고서도 평사와 화정 두 사람은 전혀 말이 없었다. 평사는 계속 술만 마셨고, 화정은 술잔이 비워지기가 무섭게 평사의 잔에 술을 따랐다. 「바둑을 아시오?」 술이 여러 병째 비워지고 난 후 거칠고 메마른 사내의 음성이 들린다. 「바둑은 모르오나 서방님 이름 석 자는 들어 알고 있습니다.」 평사의 눈이 게슴츠레해진다. 「나를 안다. 어떻게 나를 아시오?」 「조선의 국수이시고 기방에서는 타고난 풍류객이 아니시온지.」 「잘 보았소. 국수는 못 되나 떠돌이 팔난봉꾼이란 그 말은 제대로 맞췄소.」 평사가 대번에 비튼다. 「서방님답잖은 말씀입니다. 바둑의 고수가 되려면 매사에 고수가 되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들리는 소문과 같이 양반 가문의 딸이라 역시 틀리시군.」 화정은 개의치 않고 평사에게 술을 따르며, 「저도 한잔 해도 되올는지요?」 하고 묻는다. 「술이란 마시라고 있는 게 아니겠소.」 평사가 화정의 잔에 술을 채운다. 「도도한 여자가 어쩌다 그렇게 되었소?」 「나라가 없는데 기생인들 온전할 리 있겠습니까.」 「나라 없는 양반집 딸이 천한 종놈의 신세를 지게 되었군.」 화정은 대꾸 없이 평사가 부어 준 술을 마신다. 기녀 출신이라 하나 함부로 대할 수 있는 품세가 아니다. 꼿꼿하고 매몰차다. 여염집 규수 이상으로 정갈해 보이기도 한다. 화정을 보는 평사의 마음속에 괜한 심술이 난다. 평사의 끼가 슬슬 발동한다. 「술상을 치우고 자리를 펴시오.」 화정은 반응이 없다. 「내가 싫소?」 계속 반응이 없다. 「왜놈의 손에서 구해 주니 마음이 변했소?」 「아닙니다.」 「아니라면?」 「서방님이 지금 저를 원하시면 왜놈들과 다를 것이 무어 있겠습니까.」 「왜놈들과 다를 게 없다.」 「그렇습니다. 왜놈들에게서 저를 구해 다시 건드린다면 결국 저들과 똑같지 않습니까.」 평사의 안색이 변한다. 「난 투사가 아니오.」 「저도 의기가 아닙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이윽고 화정이 술상을 치우고 자리를 편다. 「옷을 벗겠습니다.」 화정은 저고리의 고름을 풀었다. 화정의 눈이 젖는다. 가만히 앉아 있던 평사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방문을 열고 평사가 비실비실 걸어 나간다. 방문이 닫히고 화정의 귓가에 멀어져 가는 평사의 괴이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평사와 화정이 다시 만난 것은 몇 달 후 어느 기방에서였다. 마포에서 술도가를 여러 개 가지고 있는 그 지역 유지를 따라 평사는 그 기방에 들렀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유지는 바둑판을 청했고 바둑판을 들고 들어온 여자는 뜻밖에도 화정이었다. 평사와 화정 두 사람은 처음 대면하는 사람처럼 서로가 말이 없었다. 유지는 평사에게 일곱 점을 붙였다. 평사는 술이 취해 건성으로 돌을 놓았다. 바둑이 중반을 지날 즈음 평사는 딱 한 번 자신의 빈 술잔을 화정 앞으로 내밀었다. 화정은 남자의 얼굴이 전에보다 더 수척해졌다고 여긴다. 남자의 잔에 술을 채우며 화정은 거칠고 황폐한 남자에게서 처음 외로움을 느꼈다. 그날 평사는 술에 만취돼 끝내 바둑을 두다 말고 판 앞으로 꼬꾸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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