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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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63회] 12부 떠도는 부초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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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의 향후 승패는 그 철옹성 같은 흑의 세력을 최대한 삭감하지 않으면 백의 비세가 확실했고 따라서 평사의 손가락은 미구에 잘려질 위험에 처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흑의 두터운 위력이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아오야마의 노련한 반면 운영은 이제 그 정점을 넘어서고 있었다. 최소한 게이오의 눈에는 흑의 승리가 굳혀지는 것으로 보였다. 나카지마는 게이오의 밝은 얼굴에서 아오야마의 승리가 가까워져 옴을 확신했다. 아무리 바둑이 의외성이 많고 막판에 뒤집어지는 수가 비일비재하다지만 최소한 아오야마의 기력과 기풍으로 보아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키 어려웠다. 나카지마는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거실 벽 한쪽에 걸려 있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명검 옥청(玉靑)을 바라보았다. 막부시대로부터 수백 년을 쇼군(將軍)의 가신으로 내려온 가문의 상징이었다. 새벽 이슬을 베어도 물기가 묻어나지 않는다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명검 옥청, 궁신(弓身)처럼 완만하게 휘어진 칼집을 박차고 옥청의 푸르른 날이 금세라도 튀어나와 오만하기 짝이 없는 평사의 손가락을 싹뚝 베어 낼 것만 같은 환상에 사로잡혔다. 눈앞에 짤린 손가락을 거머쥐고 짐승처럼 울부짖는 평사의 처참한 얼굴이 금방이라도 그려질 것 같았다. 그 순간의 쾌감을 상상하며 나카지마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남작의 얼굴에는 점점 수심이 짙어진다. 남작의 기력으론 정확하게 승패를 판단할 순 없었지만 대국장의 분위기로 보아 왠지 모르게 승부는 평사에게 불리하게 느껴졌다. 일본을 등에 업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남작이었으나 바둑만은 평사가 이겨 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것은 남작의 동족에 대한 애정이라기보다 평사 개인에게 느끼는 감정이었다. 바둑은 이제 종반을 향해 치달아 간다. 유망한 흑의 형세를 지키기 위해 아오야마는 안전 일변도로 마무리를 서둘렀다. 바둑은 누가 보아도 이대로 가면 아오야마의 승리였다. 평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에 전혀 변화가 없다. 아오야마는 평사가 승부를 포기했으리라 짐작한다. 아직 몇 군데 끝내기가 남아 있었으나 종반에 와서 서너 집 차이는 승부가 불변임을 말해 준다. 아오야마는 느긋하게 서양인들이 즐겨 피우는 시가를 입에 문다. 그때 평사가 평범한 선수 한 집 끝내기를 두어 온다. 아오야마가 잠시 생각하다가 평사가 두어 온 자리를 늦추어 받는다. 원래 그 자리는 평사가 들어가고 아오야마가 늦추고 평사가 계속 밀고 들어올 때 다시 막아서 마무리할 자리였다. 당연히 그런 결과를 예측하고 아오야마가 무심히 시거 연기를 뿜어내고 있을 때 별안간 평사가 다음 수를 미는 대신 한 칸을 뛰어 버린다. 아오야마가 깜짝 놀란다. 무모한 수다. 그 수는 평사가 무리하여 오히려 보태 주는 꼴이 아닌가. 아오야마의 눈에는 평사가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오야마는 한 칸 들어온 평사의 돌을 잡으러 간다. 그러나 막 그 수를 잘라먹으려던 아오야마의 손이 마지막 순간에 가서 멈칫한다. 아오야마는 반상을 다시 유심히 살펴본다. 반상에 놓인 평사의 돌이 묘한 형태다. 시거를 끄고 아오야마가 자세를 고쳐 잡는다. 한참을 내려다보던 아오야마의 얼굴이 불시에 파랗게 질린다. 아오야마의 얼굴이 점점 경악스럽게 변한다. 비로소 아오야마는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음을 깨닫는다. 평사가 놓은 수는 끝내기에서 좀체 보기 힘든 수였다. 한 칸 뛰어온 그 수를 잡으면 그 옆자리가 선수가 되어 안형이 풍부했던 흑의 변이 그 선수로 인해 사활이 걸린다. 물론 대마의 사활에는 문제가 없으나 먹여 치는 수순에 의해 꼬리의 석 점이 떨어진다. 그렇게 되면 보태 준 한 점을 잡는다 해도 바둑은 미세한 계가가 된다. 그렇다고 한 칸을 뛴 그 돌을 연결시켜 주고 뒤에서 막으면 집의 결과는 비슷하다. 어떤 길로 가더라도 극히 미세한 계가였다. 너덧 집 실하게 우세했던 흑의 바둑이 평사의 그 절묘한 묘수에 순식간에 승부가 보이지 않는다. 아오야마가 평사를 바라본다. 술에 절은 평사의 찌든 얼굴은 그대로다. 섬짓했다. 평사가 둔 수는 끝내기를 하다가 우연히 나온 게 아니고 바둑이 중반을 넘어설 때부터 평사가 노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갑자기 판 전체가 의심스러워진다. ‘이상한 바둑이다. 이상한 사람이다.’ 뒤늦게 눈치를 챈 게이오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한다. 나카지마와 남작은 어리둥절했다. 기력이 못 미치는 나카지마와 남작은 아오야마와 게이오의 표정이 왜 그렇게 변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오야마는 더 이상 돌을 놓지 못하고 반면을 응시한 채 석고처럼 굳어 있다. 한참 후 아오야마는 정신을 가다듬고 전체 집 계산을 다시 한다. 두 번, 세 번 역시 극미한 계가 바둑이다. 아오야마는 아직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분주히 계가를 다시 해 본다. 그러나 평사는 자신의 한 집 승을 알고 있었다. 평사가 보기에 승부는 이미 이승의 명부를 접어 버렸다. 도장을 떠난 이래 평사는 술과 여자에 파묻혀 살았다. 평사의 삶이 비극적이고 황폐해질수록 평사의 바둑은 더욱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음산한 바람이 불고 건드리면 베일 것만 같은 날이 곤두섰다. 도장에 있을 때 그의 기풍은 뛰어난 기재를 바탕으로 신출귀몰하고 감각적이었다. 행마는 명쾌했고 운석은 밝았으며 감각은 화려했다. 그러나 도장을 나온 후 평사의 기풍은 변했다. 평사의 기풍은 재질보다 기질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찌 보면 술과 기질이 접목되어 또 다른 바둑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화정과 평사의 눈길이 마주친다. 평사는 눈길을 반상으로 돌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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