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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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61회] 12부 떠도는 부초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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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사가 일본기사들을 얕잡아 보며 큰 소리를 치자 평사를 노려보던 나카지마의 얼굴이 갑자기 표독스럽게 변한다. 「큰 내기를 하면 어떻겠느냐?」 「상관 없소.」 「그럼 무얼 걸겠느냐?」 「뭐든 좋소이다.」 「뭐든 좋다！」 「…….」 「내가 말해 보랴.」 「말하시오.」 평사는 고개를 꼿꼿이 치켜세우고 화정에게 술잔을 내민다. 화정이 평사의 잔에 술을 쳤다. 분위기는 일시에 흐트러지고 남작의 심정은 착잡해진다. 「그대는 재주가 손에서 나오는 것 같더구나. 손이 방정이야. 돌을 놓는 손가락이면 어떻겠느냐?」 평사의 입언저리가 묘하게 찢어진다. 자조도 아니고 조소도 아닌 이상한 웃음이다. 「당신은 무엇을 거시겠소.」 당신이라……. 백 남작은 평사의 언행이 못내 염려스럽다. 나카지마 참사관은 연령으로 보더라도 평사보단 한참 위가 아닌가. 「네놈이 일평생 만지기 힘든 돈을 걸마. 2천 원이면 되겠느냐? 네놈 손가락보다 훨씬 큰 금액일 것이다.」 「싫소이다.」 「싫다니. 엄청난 금액이 아니더냐?」 「술맛을 알고 나니 돈이란 부질없더이다.」 「그러면 무엇을 원하느냐?」 평사가 화정을 바라본다. 화정은 평사의 눈길을 애써 피한다. 평사가 화정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여자를 주시오.」 「화정이를！」 화정과 나카지마가 동시에 놀란다. 「조선 국수의 손가락이 계집의 정조만 못하겠소.」 평사가 나카지마를 쏘아 본다. 나카지마의 이마에 땀이 흘러내린다. 화정이 고개를 떨군다. 나카지마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부르르 쥔다. 「좋다.」 나카지마가 평사의 요구를 승낙하자 화정이 거실 밖으로 나가 버린다. 화정이 나가자마자 게이오가 대국을 기정 사실화시킨다. 「대국은 정확히 보름 후에 하도록 합시다. 대국 이틀 전에 날짜와 시간을 연락하겠소. 일본과 조선의 명예를 걸고 서로가 약속은 꼭 지켜야 할 것이오.」 평사와 남작은 곧바로 나카지마 참사관의 집을 나왔다. 돌아가는 길에 남작이 평사에게 말했다. 「일본과 조선의 차이가 뭔 줄 아나? 일본은 대다수가 저런 사람들인 데 반해 조선엔 자네 같은 사람이 흔하지 않다는 것일세.」 「…….」 「쓸데없는 용기는 만용일세. 자네의 실력을 못 믿는 바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조심하게. 내 비록 일본의 앞잡이가 되었지만 조선 국수의 손가락이 떨어지는 건 원치 않네.」 평사는 남작의 말을 귓전으로 흘린다. 그 어떤 이야기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평사의 유일한 관심은 승부였다. 나카지마 참사관은 거액의 돈을 들여 일본에서 전문기사를 초빙해 왔다. 당시의 일본은 내기바둑 천국이었다. 내기바둑이 전국적으로 성행했고 전문기사들도 암암리에 내기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일본에서 건너온 아오야마(靑山) 6단은 그런 부류의 기사는 아니었다. 청탁에 의해 건너오기는 했지만 아오야마는 일본기원 소속의 정식 기사였고 일본기원 내에서도 기량이 출중한 정상급 기사였다. 보름 후 대국날, 약속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남작은 초조하게 평사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평사가 대국을 피하지는 않으리라 생각됐지만 상대가 워낙 거물 전문기사이다 보니 혹시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남작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는 아오야마를 힐끗 바라보았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오야마는 기모노 차림으로 바둑판 앞에 꿇어앉은 채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었다. 이길 수 있을까? 솔직히 남작도 이번엔 자신이 없었다. 상대도 상대 나름. 바둑에서 지고 손가락을 짤린 평사의 손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가 보이는 것 같았다. 나카지마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시계를 보며 평사를 기다렸다. 거실에 걸린 커다란 괘종시계가 육중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정확히 뎅 뎅 괘종이 여덟 번 울렸을 때 열린 대문으로 평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보름 동안 무얼 하고 지냈는지 덥수룩한 수염에 술에 절은 초췌한 몰골이었다. 화정은 복잡한 심정으로 평사를 바라보았다. 처음 자신을 거론했을 때 화정은 모욕 같은 것을 느꼈다. 그러나 지난 보름 동안 화정은 그 남자 생각을 많이 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조선인들이 참사관 집을 드나들었지만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허리를 굽히고 아부하는 사람들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달랐다. 조선인에게는 절대 권력을 가진 참사관을 대하면서 그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고 대쪽 같은 기개로 서슴없는 행동을 보여 주었다. 딱히 그래서만은 아니겠지만 그날 이후 화정은 평사의 뒤틀린 모습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돌을 가리면서부터 바둑은 조짐이 심상치 않았다. 아오야마의 흑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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