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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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48회] 10부 여목도장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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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사는 일도정진 바둑에만 몰두했다. 타고난 기재와 잡초 같은 끈질긴 투혼, 그리고 뛰어난 실전감각으로 평사는 어느덧 도장의 실질적인 실력자로 뿌리를 내렸다. 이미 도장 내에서 암암리에 다음 벽송의 주인은 평사라는 말들이 오고 갔다. 설숙은 바둑판을 앞에 두고 명상에 들어갔다. 그러나 마음의 자리가 잡히기도 전 평사의 거친 얼굴이 먼저 들어온다. 사흘 전. 동문들간에 두었던 바둑을 검토하던 중 중반에 놓인 한 수의 가치에 의론이 분분했다. 지켜보고 있던 설숙이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전체 국면으로 볼 때 역시 이 수가 최선일 것이야. 비록 바둑이 기와 기의 대립이라곤 하나 물러설 자리에선 물러서야지.」 둘러선 사람들이 모두 설숙의 그 말에 동조했다. 스승 밑에서 가장 오랫동안 수업을 닦았고, 그에 걸맞는 설숙의 기력은 동문들에게 신뢰를 주기에 충분했다. 그때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평사가 판 앞으로 다가갔다. 「우형(愚形)이긴 하나 저라면 이렇게 두겠습니다.」 평사가 한 수를 놓자 좌중이 조용해졌다. 수의 성립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설숙과 평사와의 사이에선 거의 볼 수 없던 광경이었다. 어색해진 분위기 탓인지 평사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 버렸다. 설숙은 대청을 끼고 돌아가는 평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사는 도장에 온 지 오랜 시간이 흘렀건만 한 번도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었다. 평사는 자신의 집안에 대대로 내려온 노비의 자식이었다. 상전으로 모셔 온 자신과 같이 수학하는 동문이 되자 평사가 자신을 대하는 거북함 못잖게 자신도 평사를 대하기가 어색했다. 상대를 바꾸어 가며 대국을 하는 탓에 평사와 부딪치는 경우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알게 모르게 무거운 기운이 흘렀다. 평사와의 대국엔 어쩐지 부담감이 있었고 그때마다 승부를 서두르다가 불리함을 자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우선하여 평사의 기재는 실로 걸출했다. 근 3년을 자신이 더 수련했음에도 결코 우위를 점한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근래 들어 도장 내에선 암암리에 다음 벽송의 주인으로 평사를 거론했고 은연중에 그 말이 자신의 귀에까지 흘러 들어와 심기가 불편했다. 스승 여목은 두 사람간의 그런 흐름에 단 한 번도 가타부타 내색이 없었다. 설숙은 서서히 눈을 떴다. 눈을 뜨고 앞을 보던 설숙은 뜻밖에 스승 여목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설숙은 자세를 고쳐 잡고 스승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고 있었더냐?」 설숙이 대답을 못하고 머리만 더욱 깊숙이 숙인다. 여목은 설숙이 공부하던 바둑판을 바라본다. 판 위에는 바둑돌이 두서없이 놓여 있었다. 설숙이 정신을 차리고 바둑돌을 쓸어 담았다. 「장자를 읽어 보았더냐?」 「예.」 「그럼 평생 동안 한 번도 칼날을 갈지 않은 백정의 이야기를 알고 있겠구나.」 「…….」 물론 설숙은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 『장자(莊子)』 내편(內篇) 양생주(養生主)에 보면 포정(捕丁)이라는 백정이 나온다. 포정이 소를 잡을 때는 그 동작이 마치 운율을 타듯 부드러웠다. 그의 탁월한 칼 쓰는 솜씨에 감탄한 문혜군(文惠君)이 포정에게 물었다. 「참으로 훌륭하다. 소 잡는 기술이 대체 어떻게 이런 경지에까지 미칠 수 있는 것인가?」 포정이 칼을 놓으며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도(道)로서, 그것은 기술에 앞섭니다. 옛날 내가 처음으로 소를 잡기 시작할 땐 눈에 보이는 것이 소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3년이 지난 뒤에는 소를 본 적이 통 없었고, 지금에는 오직 마음으로 일할 뿐 눈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곧 손발이나 눈 따위의 기관은 멈춰 버리고 마음만이 작용합니다. 소 몸뚱이 속의 자연스런 본래의 이치를 따릅니다. 뼈와 살이 붙어 있는 큰 틈바귀를 젖힐 때나 뼈마디가 이어져 있는 큰 구멍에 칼을 넣는 일들은 모두 소가 생긴 그대로를 쫓아 하기 때문에 내 기술은 아직 한 번도 뼈와 살이 맺힌 곳에서도 칼이 다치도록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큰 뼈다귀이겠습니까? 솜씨 있는 백정은 1년에 한 번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살을 베기 때문이요, 보통 백정은 한 달에 한 번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뼈다귀에 부딪혀 칼을 부러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칼은 이제 십수 년이나 지났고 잡은 소가 수천 마리에 이르는데도 그 칼날이 막 숫돌에 간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칼날은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이 있는 곳에 집어 넣기 때문에 그 공간은 무주공산만큼이나 넓고 넓어 칼날을 놀리는 데에 충분한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십수 년이나 지난 칼인데도 숫돌에서 막 나온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뼈와 힘줄이 한데 얽혀 있는 곳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것이 다루기 어려움을 알고 늘 두려워하며 조심합니다. 눈길을 그곳에 멈추고, 몸놀림은 느려지고, 칼놀림은 아주 더디어집니다. 그러다가 뼈와 살이 갈라지는데,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나는 칼을 들고 일어서서 사방을 둘러보고 만족해하며 흐뭇한 마음으로 칼을 닦아 간직합니다.」 문혜군이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좋구나！ 나는 포정의 말을 듣고 생명을 기르는 도를 깨달아 얻었다.」 설숙은 스승이 말씀하시는 뜻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너와 바둑을 두어 본 지도 오래 되었구나.」 여목이 그렇게 말하며 바둑판을 가운데 두고 설숙과 마주 앉는다. 설숙은 잠시 스승을 응시하다가 깊숙이 머리를 조아리고 호흡을 가다듬은 후 첫 수를 착수했다. 늦은 밤에 시작한 바둑은 새벽이 가까워서야 끝이 났다. 계가를 맞춰 보지 않았으나 설숙의 반면 석 집 승이었다. 「송구합니다, 스승님.」 입문한 지 10년. 처음으로 스승에게 이긴 설숙의 말끝이 떨린다. 「쉽지 않을 것이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그 백정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다.」 「…….」 「고기에만 결이 있는 게 아니다. 모든 현상에는 흐름이 있고 그 흐름을 짚는 맥이란 게 있게 마련이다.」 「…….」 「정신을 온전히 하여 심안을 맑게 하여라.」 여목은 방문을 열고 나갔다. 여목의 훤칠한 뒷모습이 어둠 속에 묻혀 갔다. 설숙은 고개를 들어 미명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옅은 어둠 속에서도 무수한 별들이 머리 위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이것이 그 흐름을 짚는 맥이라는 것인가. 생각해 보면 스승은 내가 고뇌에 젖어 흔들리고 있거나, 혹은 중대한 기로에 서 있을 때마다 마치 나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내 앞에 나타나 고통에 대한 답을 내려 주고 내 흔들림에 중심을 잡아 주고 기로에 선 나를 인도해 주었다. 스승의 그 신비로움의 끝은 어디인가? 망연히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서 있던 설숙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방 한가운데는 아득한 옛날의 일처럼 스승과 자신이 두었던 바둑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담장 너머 어디선가 닭 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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