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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트 여객기의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밤하늘은 지상에서 보던 모습과는 달랐다. 시야각 안에 포착되는 별들을 가로막는 것은 없었다. 마치 벌거벗고 있는 듯한 별들은 하나 같이 부끄러움도 없이 지상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한동안 창밖을 응시하던 찬돌은 창문을 열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허공으로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쩐 일인지 소더버그 회장의 제트 여객기는 저공비행을 하고 있었다. 수면이 검푸르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높이였다. 밤의 그림자에 순종하듯 바다는 파도의 비늘을 접고 있었고 물결은 잔바람에 뒤척이는 실크와도 같았다. 태평양은 일렁거리는 거울이 되어 밤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틱’ 하는 질 낮은 스피커 음이 들렸다. 찬돌이 돌아보니 앞에 놓인 노트북 컴퓨터 화면에 보이는 바둑판에 흑돌이 새로 착수되어 있었다. 미라클이라는 닉네임이의 상대는 바둑돌을 놓는 템포가 빠른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한 판의 바둑이 제대로 짜여가고 있는 중이라서 신선한 긴장은 지속되고 있었다.

 찬돌은 태평양 상공을 날아가는 도중에 인터넷 바둑을 둘 수 있게끔 하여 준 소더버그 회장의 배려가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처음엔 비행기 안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다는 자체가 신기했으나 지금은 일본에 사는 미지의 인물과 대국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흥미로웠다. 노트북 컴퓨터는 카나에라는 이름의 소더버그 회장의 여비서의 것이었다. 운 좋게도 그녀는 ‘고(바둑을 칭하는 일본식 발음.)’를 하고 싶다는 찬돌의 말을 알아들었고, 판다곰을 로고로 사용하는 일본의 어떤 넷바둑 서비스를 찾아낸 뒤 접속 시켜 주었다.

 15인승 제트 여객기의 객실 후미는 회의실로 쓸 수 있게끔 넓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찬돌의 아버지 박준과 소더버그 회장을 비롯한 어른들은 그곳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영어로 떠들어 대고 있었다. 계속되는 대화에 주도적이던 소더버그 회장이 자기 부인을 소재로 농담을 던지자 모두들 왁자하니 웃어대었다. 두 명의 백인 동료 사이에 앉아 있던 박준은 술을 마시는 도중에 웃는 바람에 사래가 들려서 어깨를 들썩이며 기침을 하였고, 줄곧 소더버그 회장 옆 좌석의 등받이에 기대어 서 있던 부회장 콜린이 다시 농담을 던졌다.

“이봐. 필. 그러다가 몰리가 언젠가는 알아채지 못할 것 같아? 어쩌면 자네가 감춘 담배를 찾아내서 집에서 피우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뭐? 하하하하. 그럼 앞으론 둘이 같이 금연 치료 받으러 다니게 생겼군.”

소더버그 회장은 4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대기업을 일군 사람답게 카리스마가 강한 위인이었다. 사람들이 다시 함께 웃었고 소더버그가 먼저 웃음을 거두었다. 그런 뒤 그는 자신이 만들어 낸 분위기를 만족해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버릇처럼 기내 곳곳을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소더버그의 시선에 찬돌이 객실 중간 정도에 위치한 좌현 창가에 앉아서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쪽에서는 불규칙적으로 ‘탁’ ‘탁’ 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소더버그는 찬돌의 모습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박준을 불렀다.

“준.” 

“예. 회장님.”

“자네 아들이 두 시간 째 몰두하고 있는 게 뭔가?”

“예... 바둑이라고 하는... 보드 게임입니다.”

“보드게임? 바둑?”

“예. 동아시아에선 꽤 대중적인 마인드 스포츠입니다. 체스와 같다고 할 수 있죠.”

“아... 체스류였군.”

그 때 앞쪽에서 찬돌의 불만스런 목소리가 한국어로 들려왔다.

“아빠. 바둑은 체스하고 다르다니까. 제발 비교할 걸 비교하라고요.”

소더버그가 듣고는 박준에게 다시 물었다.

“뭐라고 하는 건가?”

“별 뜻 아닙니다. 그저... 바둑은 체스하고 많이 다르다는군요.”

“다르다니? 어떻게 말인가?”

“그게... 비교가 안 된다고...”

소더버그 회장은 농담이나 잡답을 나눌 때와 뭔가 진지하게 접근할 때의 표정이 달라지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그의 주도권 밑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가 뭔가를 캐내고자 하고 있으며 시원한 답을 들을 때까지 질문을 퍼 붇게 될 것을 박준은 잘 알고 있었다. 소더버그 회장의 표정은 더 이상 농담을 나눌 때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비교가 안 된다니... 어떻게 비교가 안 된다는 거지?”

박준은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하여 주기 위해 하는 거짓말 따위가 통할 상황은 이미 지났음을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찬돌이 체스에 대해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는 뉘앙스까지 자신의 보스에게 일러바칠 수밖에 없었다.

 잠시 뒤 술병과 안주가 어질러져 있던 회의 테이블 위가 말끔히 치워졌고, 그 위에 체스판이 놓였다. 찬돌은 체스판을 사이에 두고 소더버그 회장과 마주앉게 된 상황이 느닷없다는 표정이었다. 무엇보다 자신과 수담을 나두던 미지의 일본인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 한 채 접속을 끊어야 했기에 짜증이 밀려오는 것을 억누르고 있었다.

소더버그는 앞에 앉은 소년의 심기가 어떤 것인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 마디를 던졌다.

“이봐. 꼬마. 네가 감히 서양의 유고한 전통 놀이인 체스를 우습게 여기고 있다고 들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용서할 수 없구나.”

멍하니 올려다보는 찬돌 앞에서 소더버그는 한 마디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덤벼라!”

주위의 어른들은 모두 미소를 짓고 있었고,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 소더버그의 진지함에는 장난기가 배어 있는 게 분명하였다. 찬돌은 긴장할 이유가 없는 걸 알고 있었지만 조심스럽게 박준을 쳐다보았다.

“괜찮아. 한 번 둬봐.”

자세를 고쳐 앉으며 “예.” 하고 말하는 찬돌을 향해 소더버그가 다시 떠벌여대기 시작했다.

“참고로 난 무슨 일이든 대충 대충 임하는 걸 질색하는 사람이다. 목숨을 건다는 자세로 대결에 임해주길 바란다!”

그러자 찬돌은 소더버그의 얼굴을 흘끔 올려다보았다. 이 때 찬돌의 얼굴은 목숨을 건다는 자세로 대결에 임한다는 게 무언지 정말 알고나 있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소더버그는 계속 떠벌이느라 순간 스쳐 지나간 찬돌의 표정을 발견하지 못했다.

“후후. 참고로 난 세계 체스 챔피언을 꺾은 적이 있단다. 각오를 단단히 해두는 게 좋을 거다.”

소더버그의 말에 동갑내기 친구이자 부회장인 콜린을 제외한 주위의 직원들이 놀라는 반응이었고, 그 중 하나는 머리를 움켜쥐는 모션을 취하며 과도한 리액션을 보이기까지 하였다.

“와아! 정말입니까?”

“회장님 다시 봤습니다.”

“뭘. 그 정도를 가지고. MIT를 나온 직후에 한참 머리가 잘 돌아갈 때 잠깐 놀았던 정도라고.”

이때 콜린이 급습을 하듯 소더버그의 말을 맞받아쳤다.

“이봐 필. 체스 챔피언을 꺾은 건 자네가 아니라 슈퍼컴퓨터였잖아.”

소더버그는 질세라 엉덩이를 들썩이면서까지 돌아앉으며 말꼬리를 재빨리 붙잡았다.

“어허. 이 친구 뭘 모르는군. 그 슈퍼컴퓨터를 프로그래밍한 게 나라고. 그리고 내가 개입하기 전엔 슈퍼컴퓨터도 인간은 이길 수 없다는 게 정설이었잖아.”

그러자 콜린이 재빨리 쐐기를 박았다.

“하지만 2톤에 달하는 그 고물 기계덩어리를 이 비행기에 싣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주위의 직원들이 킥킥대자 소더버그가 눈이 퀭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어 그는 입을 삐쭉 내밀고는 어깨를 들썩여 보이면서 이번 농담에선 자신이 졌다는 표시를 하였다. 콜린이 찬돌과 눈이 마주치자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충고의 한 마디를 던졌다.

“하지만 방심하진 말거라. 저 친구의 체스 실력은 그 때 세계 챔피언도 인정했을 만큼 고수니까.

소더버그가 테이블의 정 중앙에 놓여 있던 체스판의 귀퉁이를 붙잡고 한 번 더 제 자리를 찾아 놓으며 말했다.

“자. 시작해 볼까?”

“저...” 

찬돌의 입에서 나온 일종의 감탄사가 영어권의 사람들이 쓰는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묘한 뉘앙스를 담고 있어서 사람들은 일제히 찬돌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찬돌이 찬찬히 영어로 자신의 생각을 알리기 시작했다. 

“말들을... 움직이는 법 좀 가르쳐주실래요?”

서툰 영어이기는 했지만 모두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 같이 못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찬돌이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체스를 처음 둬 보거든요.”

선언하듯 말하는 찬돌 앞에서 “어이쿠! 맙소사!” 하며 소더버그가 이마를 짚으며 뒤로 넘어가는 시늉을 하였다. 그리고 직원들이 실소를 하면서 그를 붙잡아주는 등 백인들 특유의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그리고는 소더버그가 미련 없이 테이블 앞에서 일어나며 노골적으로 투덜거리기 시작했고, 그의 부하들은 위로의 말을 잊지 않았다.

“이제 보니 어린애의 치기 어린 소리였던 걸 모르고 괜히 발끈했던 거였군.”

“하하. 잊어버리세요. 이리 와서 술이나 한 잔 드시죠.” 

소더버그의 마지막 말은 찬돌이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누군가를 빈정대고 있다는 태도는 알아챌 수 있었고, 그 순간 찬돌의 목은 붉게 물들고 말았다. 소더버그가 지나칠 때 비켜 주느라 통로에 어정쩡하니 서 있던 박준은 찬돌이 벌인 해프닝이 원망스러웠던지 입맛을 다시며 체스판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테이블 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박준은 자신의 아들에게서 모멸감을 느끼며 굳어버린 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가슴이 철렁해지는 기분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는 알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히기 시작했지만 곧 냉정을 되찾고 소더버그가 지나쳐간 쪽을 돌아보았다. 소더버그는 바 앞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다시 떠들고 있었다. 박준은 말없이 소더버그에게 다가갔다. 사람은 누구나 뒤에서 소리 없이 다가오는 타인에 대해 경계심을 느끼기 마련이다. 박준의 접근을 알아차린 소더버그가 차갑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저어... 회장님.”

소더버그는 자신이 과도하게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음을 깨닫고 다시 부드럽게 박준을 대하고 있었다.

“왜 그러나? 준.”

그러나 뒤이어 뜬금없이 뱉어진 박준의 말 한 마디를 접하자 소더버그는 다시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외람되지만... 제 아들은 그렇게 경솔한 아이가 아닙니다.”

“그래서?”

평소에 준은 한 번도 보스에게 논쟁적인 화법으로 접근한 적이 없었다. 그러한 그가 지금 자칫 실수가 이어질 수도 있는 험한 길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괜찮으시다면 한 번 체스를 두어 보시지요. 제 아들만큼의 실력은 안 되지만 저도 바둑을 배워서 그 세계를 알고 있습니다. 제 아들 정도 되는 고수들은 조금만 방법을 알면 금세...”

소더버그는 준이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상대방을 논쟁으로 이끌고 권위를 내세워서 뭉개버릴지 아니면 좀 더 귀엽게 보아줄 지 재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체스 정도는 금세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인가?”

준 역시 소더버그가 일단은 말을 가볍게 받아주었다는 사실에 용기를 내어 생각을 열심히 갈무리하였다.

“꼭 그렇다는 말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그렇다는 건가? 아니라는 건가? 난 자네가 그렇게 불확실한 사람인줄 미처 몰랐군.”

준은 자신을 바라보는 소더버그 회장과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바로 이 순간이 중요하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끼고는 최대한 정신을 집중하려 애썼다.

“그런 게 아닙니다. 사실은 저도 제 아들의 실력을 정확히 모르고 있는 상태라...”

준은 소더버그의 다음 말이 이어지지 못하도록 얼른 몸을 돌려서 찬돌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찬돌아... 프로와 대국을 해 본 적이 있니?”

“응.”

“몇 점 깔았니?”

“두 점.”

“이겼니?”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졌어요.”

준은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자칫하다간 해프닝이 재연될 수도 있고, 그렇게 된다면 그는 두 번 다시 소더버그 회장의 전용기에 탈 수 없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세계적인 IT 기업인 NS사의 관리직 임원은 수백 명에 이르지만 회장의 전용기에 초대되는 임원은 불과 몇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회장의 전용기에 초대된다는 의미는 어느 날 소더버그가 ‘헤이. 두드.’ 라고 불러주거나 ‘필이라고 부르게.’ 하며 말하는 순간을 맞이할 수도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행운이자 기회였던 것이다. 더구나 이번 비행에서 소더버그 회장은 보스턴에서 찬돌을 그의 엄마에게 인계하고 뉴욕으로 다시 이동하게끔 경로까지 변경하도록 배려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자칫 회장의 심기를 상하게라도 한다면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상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박준은 자신의 심장이 쪼그라들면서 용기가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선 소더버그의 얼굴에 지루하다는 표정이 스며드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대로 침묵의 시간이 몇 초만 더 계속된다면 소더버그가 먼저 입을 뗄 것이 분명하고 주도권이 그에게로 넘어가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게 분명하였다.

그런데 그 순간 찬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0.1초의 사이에도 사람은 많은 생각을 할 수가 있다. 그 순간 박준에겐 시간을 벌었다는 생각과, 일단 다행이라는 생각과, 찬돌이 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나하는 불안함까지 뒤섞여서 떠오르고 있었다.

“처음엔 한 집 패였고, 나중엔 한 집 승이었죠.”

아까 찬돌이 한 번은 이겼고 한 번은 졌다고 한 말에 대해 짝을 이루는 설명이었다. 그랬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바둑에서는 승과 패의 자체가 궁극적인 결과는 아니었다. 찬돌은 그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박준의 기력은 4급 정도였다. 바둑판 위에서 발생 가능한 기본적인 형태들을 외우고 있기는커녕 아직 다 구경도 못해 본 실력이었지만 그래도 생과 사를 넘나드는 치열함 속에서 한 집 승부를 이끌어 낸다는 게 어떠한 의미인지는 알고 있었다. 박준은 소더버그를 돌아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제안을 했다.

“한 번 체스를 두어 보시지요.”

소더버그는 일단 기가 대립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면 여간해서는 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체스 대결에도 품위라는 게 있네. 말도 안 되는 해프닝을 벌이고 싶지는 않군.”

박준은 마치 자신의 생각을 들켜버린 것만 같아서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실망시켜 드리진 않을 겁니다.”

“좋아. 한판 두어 보자고. 하지만 내기를 거는 게 좋겠군.”

내기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게임에 무슨 내기까지 건단 말인가? 뒤이은 소더버그의 말에 박준은 저절로 눈이 크게 떠지고 있었다.

“만일 20수 이전에 자네 아들이 패한다면 앞으로 개설될 예정인 NS 사의 한국 지사를 자네가 맡기로 한 얘기는 없었던 일로 하기로 말야.”

그걸로 끝이었다. 더 이상의 다른 설명이나 변명은 필요치 않은 상황이었다. 소더버그와 박준 외의 다른 사람들도 긴장된 표정이었다. 박준은 주변의 공기가 한순간에 무거워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소더버그는 그러한 박준을 아랑곳 않고 지나쳐서 다시 찬돌의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 동안 계속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서서 지켜보고 있던 콜린 부회장이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찬돌에게 다가가서 체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흐음. 일이 어째 이상하게 흘러가는구나. 어쨌든 체스 두는 법은 내가 가르쳐주마. 킹의 주위에는 퀸과 캐슬, 비숍, 나이트...”

“이름은 알아요. 움직이는 방법만 가르쳐 주세요.”

박준은 찬돌의 말을 듣고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11살 된 아들이 체스 말들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니 말이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이미 더 이상 심해지지 못할 만큼 굳어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