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에 신경성 위궤양이 장기간 속을 썩이는 바람에 서울까지 가서 내시경 검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검사 하는 날은 빈속으로 아침 8시까지 오라고 해서 당일 새벽같이 일어나 서둘러, 그것도 반시간이나 앞당겨 갔더니 검사실 앞 복도가 이미 초만원이었다. 잠도 않자고 나온 사람들 같았다.

 사실 나도 빨리 하려고 서둘러 간 것이고 보면, 모두가 똑같은 심사인 모양이다. 창구에 예약증을 접수시키면서 물어보니 과연 모두가 오늘 검사하는 환자들이란다. 언제나 차례가 올까 싶어 기가 막힌다. 더구나 모두가 위장병 환자들이라 기다리는 고통이 얼마나 심할까 생각하니, 남보다 빨리 하려고 한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때 간호사와 환자사이에 기어코 언쟁이 벌어졌다.

 검사준비를 시키는 간호사가 순서를 어기고 뒤에 온 환자를 먼저 불렀기 때문이다. 간호사가 아는 환자이거나 특별한 청탁을 받은 환자인 모양이다. 순서대로 기다리는 것도 기가 찬데, 새치기까지 하다니...  처음엔 언쟁이라기보다는 푸념하듯 작은 소리로 가볍게 시작하더니 곧 간호사 쪽은 조용해지고 환자 쪽이 흥분해서 점점 톤을 높인다.

 처음소리하고는 영 딴판이다. 오히려 그 환자에게 뭔가 속은 기분이다. 처음엔 정의를 바로 세워 잘못한 간호사를 호되게 심판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옳은 얘기도 지나치니 듣기가 싫다. 간호사가 침묵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데도 환자 쪽 푸념이 그칠 줄 모르니 오히려 잘못한 간호사 보다 환자 쪽이 더 미웠다. 수다가 지나쳐 호응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때 옆에서 잠자코 듣고만 있던 50대 남자가 조용히 환자를 달랜다.

 『아주머니, 괘씸하지만 참으세요. 세상에 괘씸한 일이 어디 한두 겝니까? 이런 정도의 것이라면 얼마든지 참을 수가 있지요. 그런데 아주머닌 왜 이곳에 왔나요? 누가 가라고 했습니까? 간호사가 순서를 안 지킨 것도 잘못된 일이지만, 타고난 건강을 지키지 않은 아주머닌 더 큰 잘못을 했네요 뭐.』

 『....?』

 말한 이의 진의는 알 수 없으나 내가 이해하기는, 잘못의 질은 다르겠지만 잘못을 저지르고 살아가는 게 인간인데, 자신은 절대 아닌 것처럼 너무 말이 많았다는 것과 또 대수로운 일이 아니면 남의 약점은 덮어주는 게 미덕인데, 별것도 아닌 일로 오히려 남의 약점을 즐기는 듯한 태도가 얄밉다는 얘기인 것 같은데, 당신은 왜 왔느냐는 말에서 나는 나대로 “알만한 놈이 멀쩡한 건강 잃고 여기 와 이렇게 수모를 당하는 꼴이 창피하지도 않느냐” 하고 마치 나를 보고 질책하는 것만 같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오늘아침 느닷없이 이 생각이 난 것은 지난 연휴에 지리산에 가자는 친구의 권유를 받고 무릎 때문에 선뜻 따라 나서지 못한 속상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 또한 몸소 겪어 봤는데도 고치지 못하고 연실 같은 실수를 계속하고 있는 꼴이니 어쩜 이런 천연덕스러움 때문에 내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이 아닌가 싶다.

 술을 절제하지 못해 병이 났으면 무릎은 다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것마저 지난겨울 치악산 정상에서 한번도 쉬지 않고 단숨에 뛰어 내려온 방자함 때문에 기어코 관절에 무리가 와 지금은 가벼운 산책 밖에는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무지와 교만이 빚어낸 내 모습이요, 내 운명인 모양이다.

 왜 괜찮을 때 좀 조심하지 않았을까? 왜 넉넉할 때 아끼지 않았을까? 생각 할수록 안타깝고 속상하다. 술을 마실 수 있을 때 절제하며 마셨어야 했고, 컨디션이 좋을수록 몸에 무리를 주지 말았어야 했다는 아쉬움 때문이다. 재산가가 돈에 겸손하지 못했다가 후일 돈 때문에 크게 핍박 받았다는 옛 얘기가 생각난다. 권력 있는 사람도 예외일수가 없다. 자신의 권력에 겸손하지 못했던 제왕이나 빌붙어 누렸던 세도가들의 말로를 역사가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사회가 이렇게 어지러운 것도, 사회도 개인의 경우처럼 모두가 형편이 좋고 넉넉할 때 그것들에 겸손하지 못했던 사회적 현상들이 부메랑이 되어 우리사회를 이렇게 만든 게 아닌가 싶어 더 안타깝다. 요즘 세상이 되어 가는 꼴을 보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지도자인체 하고 나서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불량품을 보는 것 같고, 그래서 그런지 그들이 앉아 있는 지위와 인격도 하나같이 어울리지가 않는 것 같다. 도대체 앉아있는 의자에 어울리는 소양도, 품위도, 실력도 갖추고 있지 않은 것 같아서이다. 형편이 좋을수록 겸손이 필요하다는 함수관계를 그들이 알고는 있을까?

 영명한 사람은 남의 실수를 보지 않고도 알아차리는 사람이고, 남의 실수를 보고 깨닫는 사람은 그래도 똑똑한 축에 든다고 한다. 그런데 자기가 몸소 격어 보았는데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사람은 나처럼 많이 모자라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남고 모자라는 것은 세상이치이니 그리 탓할 것은 못되나, 그러나 사적인 일이라면 바보로 치부하면 그만이지만, 공적인 일이라면 죄 없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과 운명을 같이해야 하기에 속이 더 상한다. 자신에 국한된 일은 자기 혼자이지만, 국가 대사는 국민과 국가의 운명을 절단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