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혜린을 보낸 기영에게 뮤지컬이 들어올 리 만무했다.

혜린과 팀장이 나란히 걸어오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고 혜린의 차가운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수현과 나란히 앉아 뮤지컬을 보는 동안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 채 우울한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공연이 끝나자마자 수현을 집에 보냈다.

무거워진 발걸음을 한발 두발 옮겨 어느새 집 근처까지 온 그는 잠깐의 망설임 끝

에 방향을 바꿔 가까운 포장마차에 들어갔다.

본래 술을 즐겨 하는 그였지만 술보다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좋아했기에 혼자서 마시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술이 없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천막을 걷고 들어가니 손님은 없고 주인 아저씨가 멍하니 앉아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골뱅이랑 소주 한 병 주세요.”

그는 심심한 주인아저씨가 이것 저것 물어오는 것이 두려웠는지 일부러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으며 말했다.

“휴……”

파란 플라스틱 테이블 앞에 앉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꼬여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처음 결혼식장에서 혜린을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곧 이어 처음 바둑을 배우던 날, 그녀와 걷던 청계천거리 그리고 같이 봤던 영화들도 생각났다.

소주 한 잔을 들이키자 서늘하고 독한 기운이 그의 신경 하나 하나를 깨우며 그녀와의 추억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내 속이 가라앉으면서 혜린의 모습도 흐릿해지자 소주를 다시 들이켰다.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았다.

오늘 저녁 마주친 그녀는 아름다웠고, 누가 봐도 잘생긴 외모를 지닌 팀장과 잘 어울렸다.

마음 한 구석에서 고개를 내민 작은 질투는 소주를 타고 돌아다니며 그를 괴롭혔지만 이미 힘을 잃은 그의 이성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희미해져 가는 그녀와의 추억을 붙잡으려 빈 잔을 계속 채우는 수밖에.

“누나! 어쩐 일이야? 진짜 오랜만이다.”

연구실에 들어오는 혜린을 발견한 경훈이 반갑게 외쳤다.

“그러게, 잘 지냈어?”

혜린이 그가 공부 중인 바둑판 앞에 마주 앉으며 말했다.

“난 잘 지냈지, 누나는?”

“나도 뭐. 혼자 공부하고 있었던 거야?”

“응, 다른 애들도 금방 올 거야.”

이곳은 한국기원 근처에 위치한 프로기사들의 공동 연구실이었다.

대부분의 신예기사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모여 리그전과 연구회를 하며 공부 하였고, 온갖 보드게임과 오락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막 입단하면 다른 기사들과 친해지기 위해서라도 연구실에 나오는 것이 보통이었고, 나중에는 집에 있는 것만큼 편해져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사회생활에 바빠지고 가정이 생기면 떠나가고 또 새로 입단한 새내기들이 그 빈자리를 채워나갔다.

그래서인지 그곳은 거쳐간 모든기사들의 마음속 아지트로 남아 고향을 떠난 것처럼 가끔씩 향수를 불러일으키고는 하였다.

혜린 역시 연구실을 좋아하여 틈만 나면 들러 다른 기사들과 팀바둑도 두고 같이 연구하다가 한 명이 부추기면 영화 보러 우르르 나가는 생활을 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 걱정이 없이 시합을 진 날만 아니면 하루하루가 즐거웠던- 순수하게 바둑과 호흡하던 시절이었다.

“어? 혜린이 왔네.”

민우가 연구실에 들어서며 말했다.

“오빠 안녕?”

혜린이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연구실에 어쩐 일이야? 통 안 오더니.”

민우가 경훈과 혜린 옆에 앉으며 말했다.

“오빠는, 내가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오나, 그냥 놀러 왔어.”

“경훈아 오늘 좀 덥지 않아?”

“응, 오늘따라 조금 덥네.”

묵묵히 기보를 놓고 있던 경훈이 바둑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우리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까?”

민우가 말했다.

“둘이 가, 난 애들이 금방 온다고 연락해서 기다려야 할 것 같아.”

경훈이 핸드폰을 열어보며 말했다.

“그래 가자, 경훈아 다음에 봐.”

혜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응, 누나 다음에 또 와.”

경훈의 인사에 간단한 손짓으로 답한 혜린이 민우와 함께 연구실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야?”

밖으로 나오자 민우가 물었다.

“응? 무슨 일?”

혜린이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딱 보면 아니까 숨기려 해도 소용없어. 너 표정도 어두운데다 원래 기분 안 좋으면 연구실 나오고 그랬잖아.”

“역시 오빠는 눈치가 너무 빨라.”

“일단 가자, 너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먹으면 기분이 좀 풀릴지도 모르지.”

“응.”

혜린이 혼잣말을 하듯 조용히 대답했다.

“그 분이랑 싸운 거야?”

혜린과 마주 앉은 민우가 아이스크림을 크게 떠 입안에 넣으며 말했다.

“싸운건 아니고……”

“그럼?”

“나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 같아.”

혜린이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럴 사람 같지 않던데.”

“나도 기영오빠가 그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제 우연히 마주쳤거든.”

“다른 여자랑 같이 있었어?”

민우의 물음에 혜린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얘기해 봤어? 너 몰래 다른 여자 만난 거 맞대?”

“아직 아무 얘기도 안 했어.”

“그럼 무슨 오해가 있는 걸지도 모르잖아.”

“글쎄, 그 여자가 기영오빠 팔짱을 끼면서 나를 보더니 아는 사이냐고 묻는데 침착하게 생각할 정신이 없었어.”

“뭐? 안되겠네, 지금 바둑계 최고 퀸카를 여자친구로 뒀으면서 그러고 다니는 거야?”

민우가 말하자 혜린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나 지금 심각해.”

웃음을 간신히 가라앉힌 혜린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알았어, 알았어.”

“오빠, 나 미국으로 유학 갈까 생각 중이야.”

“응? 설마 그일 때문에 떠나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