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더니 훅-하고는 책의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 ‘어떤 내용이 펼쳐질까?’ 설레는 마음으로 살그머니 뒷장을 넘긴 게 방금 전인데, 어느새 새로운 목차가 등장하고 또 다른 인물들이 등장한다. 어찌나 등장인물이 많은지, 방금 스쳐지나갔던 사람들조차도 순식간에 기억 저 멀리 날아가 버린다. 이 책을 쓴 저자가 누군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신이 썼으니 대단할 수밖에).

오늘은 어떤 배경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설렘 반, 두려움 반.
새로운 해를 맞이할 때나, 또는 나이를 한 살 더 먹을 때만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감정이 드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매일 아침마다 그리고 매 저녁마다 그러한 감정의 파도타기를 하곤 한다.

삼성화재배 취재 가는 길.
아침 8시 반, 현관을 나서니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비가 온다.
‘오늘 배경은 비오는 날씨군.’
어떤 직업을 가진 주인공이던, 어떤 연령대의 주인공이건 아침의 풍경은 누구나 별다를 바 없이 비슷비슷하다. 아침을 맞이하는 것만큼 감격스러운 순간도 없을 터인데 소설책에서 그러한 순간을 매번 묘사하지 않고 건너뛰는 이유도 여기 있으리.

어김없이 흔들리는 열차에 몸을 싣는다. 주말 아침이라 그런지 군데군데 반가운 빈자리가 눈에 띈다. 70살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2008년 8월 2일 페이지의 첫 번째 등장인물이다.

“아가씨, 어디로 가유?”
“네? 저는 옥수역으로 가서 중앙선 갈아타요.”
“그렇구만···.”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휘감는다. 치매노인? 길 잃은 할머니? 심심하신가?
나도 참. 말 거는 게 뭐 어때서. 이 때,

“아가씨, 어디로 가유?”
“아···. 옥수역에서 한 번 더 갈아타야 돼요. 왕십리역에 가거든요.”

아무래도 치매노인이 맞는 것 같다. 신고해야하나? 연세도 많아 보이는데, 어딜 혼자 가시는 걸까.

“나는 복지관 가는데···. 아가씨 혹시 복지관 다녀왔어유?”
“네...?? 저는 지금 좀 전에 집에서 나왔어요. 오늘 일해야 하거든요.”
“그렇구만···. 난 또 나처럼 복지관 가는 줄 알았지.”

옆에 있던 사람들이 슬슬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기 시작한다. 어떤 분은 슬그머니 피하라는 눈빛을 보낸다. 그런데 이상하다. 끌림이 있다. 자석처럼, 그렇게 말을 걸면 도망가고 싶은 상극이 있지만, 아니 보통 대부분 이런 상황이라면 상극이어야 맞겠지만 이 할머니는 이상하게 끌린다.

“혼자 복지관 가시는 거세요?”
“야, 내가 나가야지유. 우리 며느리가 어찌나 눈을 흘기는지···. 그래서 내가 아침부터 나왔잖아유. 하루도 안빼먹고 복지관 가유.”
“아······. 네에.”
“그러고 보면 우리 아가도 참 불쌍하긴 헌데. 지 엄마가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지도 얼마나 속상하겠어. 이 시어미한테 무슨 애정이 있겠어···.”
“······.”
“아가씨, 안 그래유? 피도 안 섞인 이 늙은 노인한테 무슨 애정이 있겠어. 나도 알제, 나도 알아. 그래도 지가 그러면 안 되제···.”
“무슨 일 있으셨어요······?”
“내가 집에 들어앉아 있으면 자꾸 눈을 요러고 흘기는겨. 우리 아들 녀석도 아가가 화나서 나가니께 쫓아 나가드만. 아가씨, 내가 말하는 거 잘 들야. 사랑하는 남편 부모도 부모 아니든가. 잘해야제. 힘든거 나도 겪어봤으니 다 알지만 그래도 그러면 안되는기야. 한 번 더 참고, 그저 네, 네 하면서 공경하는 게 효도제. 아가씨는 꼭 그렇게 하라고 내가 말해주는 기야. 부모한테 잘해야햐. 부모 알길 하늘같이 해야하는갸.”

나도 모르게 그 분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그 할머니의 눈동자는 에메랄드빛이었다. 마치 하늘이 반사된 듯한, 푸른 바다의 색깔. 그리고, 그 눈동자의 깊은 곳에서 회오리치는 소용돌이가 보였다.

‘말동무가 필요하셨던 거야.’

그렇게 30분 간, 내 삶에서 스치듯 모습을 드러낸 한 노인의 이야기를 내 안에 담았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분의 목소리는 한동안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오늘도 이렇게 삶의 한 페이지를 열었고,
이렇게 삶의 한 페이지를 넘기려 한다.
오늘도 이렇게 난 스쳐 지나가는 한 인연을 통해 또 하나의 배움을 얻었고,
이렇게 삶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성숙됨을 느낀다.

P.S - 난 내 삶이 단편소설일지 장편소설일지, 
        비극적인 결말일지 아름다운 해피엔딩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한 페이지, 또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그 공간 속에서 
        배움이 있다는 걸 기억할 뿐. 
        난 내가 완벽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기에 숱한 비난의 화살과 그것이 관통할 때 고통이 뒤따른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