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린씨!”

자리에 앉아있던 기영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혜린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외쳤다.

“와, 여기 분위기 좋네요.”

혜린이 자연스럽게 기영의 앞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렇죠? 사실 저도 처음 왔어요. 예전에 친구가 좋다고 추천해줬었는데 기회가 없었거든요.”

사실 그 곳은 혜린과 같이 오기 위해 인터넷에서 몇 시간을 검색한 끝에 찾아낸 곳이었지만 그는 혜린이 부담을 느낄까 봐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네, 우리 주문해야죠?”

혜린이 테이블 위에 있는 메뉴를 보며 말했다.

“네, 뭐가 좋을까요?”

“음……저는 토마토소스 스파게티를 좋아해요.”

“그나저나 그 동안 잘 지냈어요?”

기영이 스파게티를 먹다 말고 혜린을 보며 물었다.

그날 저녁 이후 4일만에 돌아온 토요일이었다.

기영은 우울해 보였던 혜린이 계속 신경 쓰여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자 멋진 레스토랑을 찾아 예약했던 것이었다.

“그럼요, 원래 하루만 지나면 멀쩡해져요.”

혜린이 씩씩하게 말했다.

“네!”

혜린의 씩씩한 목소리에 힘을 얻었는지 기영도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오늘도 바둑 수업 해야 하는데, 바둑판 챙겨오셨어요?”

“그럼요, 하지만 오늘은 수업 안하고 그냥 놀면 안돼요?”

기영이 어리광을 부리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으로 물었다.

“네? 벌써부터 그렇게 꾀 부리시면 어떡해요.”

혜린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다음부터 열심히 할게요!”

“알았어요, 그럼 그렇게 해요.”

혜린이 못 이기는 척 대답했다.

“잘 먹었어요, 너무 맛있고 정말 멋진 곳이었어요!”

혜린이 식당 문을 나서며 기영에게 말했다.

“저도 혜린씨와 같이 먹어서 좋았어요.”

“그나저나 우리 뭐하고 놀아요?”

혜린이 기영을 보며 물었다.

“글쎄요, 보통 프로기사는 뭐하고 놀아요?”

“음, 그냥 똑같은 것 같은데요? 영화 보거나, 자전거 타거나…… 아니면 보드게임도 많이 하구요.”

“우리 서점 갈까요?”

“서점이요?”

“네, 가서 요즘 새로 나온 책도 보고 제가 공부할 바둑책도 고르고 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정말 그렇네요. 그럼 우리 슬슬 걸어갈까요?”

“네, 소화도 시킬 겸 그게 좋겠네요.”

혜린과 기영은 도로를 따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시간에 쫓기듯 바삐 움직였지만 그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그들의 속도로, 오후의 햇살과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제가 재미있는 거 하나 가르쳐 드릴까요?”

혜린이 기영을 보며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네, 뭔데요?”

“서양 바둑인들은 바둑이 약한 사람이나 강한 사람이나 초반엔 아주 잘 두는 경향이 있어요.”

“초반에만 잘 둔다는 뜻인가요?”

“네, 왜 그럴 것 같아요?”

“글쎄요, 초반만 공부하나요?”

“음, 그것도 맞다고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그보다도 서양인들은 바둑을 책에 의존해서 두려고 하는 특징이 있더라구요.”

“책에 의존해서 두면 안 좋나요?”

“물론이죠, 초반이야 예측이 가능하고, 또 정석을 외우면 잘 둘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책에서 찾을 수 없는 모양이 등장하기 마련이거든요.”

“왜 중반은 책으로 공부할 수 없죠?”

“주변 돌들과의 연결성이 강하기 때문이에요. 책으로 정답을 찾는 요령을 공부할 수는 있어도 정답을 외울 수는 없는 거죠. 전에도 얘기했듯이 바둑은 둘 때마다 변하니까요.”

“네……그럼 어떻게 해야 초반 이후에도 잘 둘 수 있어요?”

“스스로 헤쳐나가는 법을 익혀야죠. 바둑판 전체를 살피면서 그 상황에 맞는 수를 찾는 능력을 키워야 해요. 그건 바둑책을 무조건 외운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거든요.”

“네……”

“어렵죠?”

혜린이 웃으며 물었다.

“네……솔직히 좀 어렵네요.”

기영이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럼, 왜 책에 의존하면 안 좋은지 더 쉽게 설명해볼게요.”

“네.”

“이를 테면, 바둑에서는 좋은 수라고 알려진 수들이 있어요. 책을 통해서 쉽게 공부할 수 있죠. 그런데 문제는요, 좋은 수라고 해서 항상 좋은 건 아니라는 거에요.”

“그건 어째서죠?”

“주변 배석, 쉽게 말하자면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해요. 예를 들면 맥도날드를 하나 차린다고 해봐요, 맥도날드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성공했지만, 만약 그 시기가 신문과 언론에서 패스트푸드가 안 좋다고 계속 언급하는 때라면 어떨까요? 아니면 주민이라고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대부분인 지역에 차리면? 그래도 성공할까요?”

“물론 아니겠죠. 정말 그렇네요.”

“그럼 이번엔 반대로 설명해 볼게요, 바둑을 배우면 빈삼각을 두지 말라고 해요, 그건 안 좋은 모양이거든요. 하지만 빈삼각이 좋은 수가 될 때도 있어요. 우리는 도적질이 나쁘다는 걸 알고 있지만 홍길동을 보고 나쁘다고 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가 그렇게 만든 거에요.”

“음, 책에 나온 좋은 수가 항상 좋은 것도 아니고, 두지 말라는 안 좋은 수가 꼭 필요할 때도 있다는 뜻이군요.”

“맞아요, 바둑에 절대라는 것은 없어요, 항상 바둑판 전체를 살피고 상황에 맞는 수를 찾아야 하죠. 그렇기 때문에 책을 보고, 외우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한계에 부딪치는 거에요.”

“그런데 특히 서양 바둑인들이 그렇다는 건가요?”

“네, 우리나라 분들은 대체적으로 실전경험이 많아요. 그리고 책보다는 비록 실수하더라도 직접 수읽기를 해서 두는 경향이 있어요.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바둑이 더 대중화 되어있기 때문에 그럴 지도 모르죠.”

“대중화가 되어있으면 어떤 점이 달라지는데요?”

“우선, 같이 바둑을 둘 상대가 많아요. 바둑을 둘 수 있는 환경도 더 좋구요. 또 알게 모르게 바둑을 접할 기회가 많이 있기 때문에 더 익숙한 것도 있어요. 서양 사람들은 바둑이라는 건 생전 모르다가 배우게 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네……그런데 혜린씨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아, 그냥 제 경험에서요. 유럽, 미국에서 열리는 바둑행사에 몇 번 참가했었거든요. 그리고 국내에서는 1년에 대여섯 번 정도는 참가하는 것 같구요. 하지만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니까 오해는 마세요.”

“네, 걱정 마세요. 그냥 참고만 하고 있을게요.”

“어! 저기 서점 보이네요. 얘기하면서 오니까 정말 금방인데요?”

혜린이 멀리 보이는 커다란 간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정말 그렇네요.”

사실 그들은 이곳까지 걸어오면서 벌써 큰 서점 몇 개를 그냥 지나쳐왔다.

기영은 서점에 다 왔다는 것을 알았지만 혜린과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어 모른 척 했던 것이고 혜린은 이야기하느라 미처 지나치는 것을 몰랐던 탓이었다.

기영은 이젠 어쩔 수 없이 서점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참, 그렇다고 책보고 공부하지 말라는 뜻은 절대로 아닌 거 아시죠?”

“어, 그런 거 아니었어요? 전 그런 뜻인 줄 알았는데요.”

“정말이에요?”

“아니요.”

혜린과 기영이 서로를 쳐다보며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