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재단법인 한국기원 입니다. 지금은 근무 시간이 종료되었으니…… ”

수화기 너머 자동 응답기의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컴퓨터부터 켜고 한국기원 사이트를 찾아서 들어갔으나 바둑용품 판매에 관한 내용은 찾을 수 없었다.

그곳엔 프로 기전 대국 결과에 관한 기사들과 사진들, 그리고 바둑에 관한 정보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우선 급한 대로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역시 소용없었다.

저녁이나 먹고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기사정보’ 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들어가보니 국내외 프로 기사의 간단한 프로필이 있었다.

천천히 훑어보던 그의 눈에 이혜린이라는 이름이 들어왔다.

그녀는 프로 5단이었다.

대국을 하고 있는 듯한 사진과 함께 그녀의 이력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여느 프로필과는 달리 ‘키’ 라던가 하는 내용은 없고 오직 출생 년도와 바둑 대회의 성적만 나와 있었다.

기영은 바둑이나 프로기전에 관한 내용을 전혀 몰랐던 지라 갑자기 흥미가 사라지면서 배고픔이 밀려왔다.

결국 그는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집은 혼자 살기에 딱 좋은 작은 아파트였다.

부엌 겸 거실에 침실과 화장실이 있었고 냉장고나 세탁기, 전자레인지 등은 집에 붙박이로 들어와 있었다.

그는 양복을 아무렇게나 벗어 침대에 던져놓고 추리닝을 입은 다음 밖으로 나왔다.

아무 생각 없이 냉장고를 열어보니 먹을 만한 반찬이 김치와 멸치볶음밖에 없었고 마실 것이라고는 물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동생인- 지영이 다녀 간지도 벌써 2주일이 다 되어가는 것 같았다.

자주 올 때는 그렇게 귀찮더니 꼭 먹을 것이 다 떨어지면 이렇게 생각 나고는 했다.

지영은 대학을 졸업하고 여기저기 직장을 알아보고 다니는 중이었다.

처음엔 금방 취직할 수 있을 거라고 큰소리 치더니 요즘엔 물어봐도 대답도 잘 안 해주는 것이 마음에드는 직장을 찾지 못하고 고전 중인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선 발 벗고 나서서 알아봐 주고 싶었지만 동생이 워낙 자존심이 센지라 어설프게 도와주다간 서로 기분만 상할 것 같아 그냥 지켜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라면을 끓여먹을까 하다가 냉장고에 붙어있는 스티커를 보고 볶음밥을 배달 시켜먹기로 했다.

핸드폰을 꺼내 주문 하려고 보니 부재중 번호가 찍혀있었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그는 전화를 걸어볼까 잠시 고민하다가, 급하면 다시 전화 하겠지 라는 생각으로 그냥 배달만 시키고는 TV 앞에 앉았다.

한창 밥을 먹으면서 TV를 보다가 무심코 옆을 보았더니 핸드폰에서 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근무시간에 진동으로 해놓았다가 벨 소리로 바꾸지 않은 탓이었다.

그는 잽싸게 숟가락을 내려 놓고 전화를 받았지만 이미 끊어진 뒤였다.

번호를 보니 아까 그 번호였다. 핸드폰 액정 화면을 보며 잠깐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안녕 내 사랑 그대여—‘

수화기 너머 익숙한 가요가 흘러나왔다.

“네.”

여자 목소리였다. 어디선가 많이 듣던 목소리인 것 같긴 한데 기억이 가물가물 했다.

“안녕하세요, 전화 하셨죠?”

“네, 저 혜린이에요, 바쁘세요?”

“아, 괜찮아요.”

“전화 하기 힘드네요.”

“전화 오는 걸 몰랐어요. 진동으로 해놓았었거든요.”

“그랬구나, 바둑판이랑 알은 사셨어요?”

“아직…… 어디서 사야 할지 모르겠네요.”

“네, 잘 찾아보시면 방법이 있을 거에요. 그 정도는 제가 안 가르쳐 드려도 되죠?”

혜린이 예상 했다는 듯 웃으며 이야기 했다.

“그럼요.”

“이번 주 토요일에 11시쯤 만났으면 하는 데 어떠세요?”

“좋아요.”

“네, 그럼 그때쯤 돼서 또 연락할게요. 준비물 챙기는 거 잊지 마시구요.”

“네. 그때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