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인근 돼지국밥집을 들락거리기 시작한 것은 주인이 과수댁이어서가 절대 아니었다.
물론 뒤늦게 알고 나서는 신경이 좀 쓰인 건 사실이지만 예쁘장한 아줌씨가 워낙 나에게 관심을 많이 보이고 국밥에 돼지고기를 많이 넣어주기에 어쩌다 단골이 됐을 뿐이다.
또 굳이 다른 이유를 달자면 혼자 살며 저녁밥 지어먹는데도 이골이 났고, 평소 담배를 많이 피우는 나에게 어머님께서 돼지비계를 많이 먹으라고 주문한 탓도 있었다.

게다가 단조로운 생활을 한 번 벗어나 보자는 내심의 결심도 한 몫을 했다.
자고 일어나 회사 가고 퇴근해 또 자고...이러다 보니 세월이 너무 빨리 가는 것 같았다.
보통사람(?)이라면 퇴근과 자고 사이에 무언가가 있게 마련인데, 혼자 살다 보니 머 있을 게 없었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뭔가 찌지고 볶는(?) 사건 같은 게 있으면 하루가 좀 길게 느껴질 터인데 아무 것도 없다보니 저녁 먹고 하품하다 자 버리면 하루가 그냥 땡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잖아도 나이살을 먹었는데 세월까지 빨리 흐르니 좋을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월간바둑지를 겨드랑이에 끼고 이 집에 들렀는데 예상외로 국밥이 맛이 있었고, 게다가 주인아줌씨가 과수댁이라하니 뭔가 사건을 기대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면서 하루 이틀 가다 보니 기냥 단골이 되고만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과수댁인걸 알고 간 것이 아니라, 가서 보니 과수댁이란 것이었고 게다가 국밥이 맛이 있어 단골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럼 여기서 돼지국밥 먹으러 가는 넘이 왜 바둑책은 들고가고 난리였느냐하는 의문이 당연히 생긴다.
원래 나는 엄청나게 밥을 빨리 먹는 경향이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나만큼 밥 빨리 먹는 사람은 아마 흔치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점심 때 직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 직원들이 밥뚜껑을 열면 그 때 이미 나는 식사를 끝내고 물을 마실 정도로 빨랐다.
그러니 돼지국밥은 어떻겠는가.
밥과 국이 이미 섞여 있지 않은가.
그러니 눈 깜빡할 사이에 돼지국밥을 다 먹을 수밖에.
그게 문제였다.
그러면 주문한 시간을 포함해도 채 5분도 되지 않아 바로 식당을 나와야하는데, 뭔가 사건을 만든다는 원래의 취지와는 전혀 맞지 않으니 그래서 월간바둑잡지 한권을 겨드랑이에 끼고 간 것이다.
기보감상을 하며 국밥을 먹다보면 자연히 밥먹는 속도도 느릴 것이고, 사건의 개연성도 그만큼 커진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바둑책속의 기보를 감상하며 돼지국밥을 먹는 내가 이 주인 아주머니에겐 무척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오고가는 그 많은 손님들 중에 신문보며 돼지국밥 먹는 사람은 봤지만, 나처럼 책보며 먹는 사람은 처음 봤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럼 그거로 끝나면 되는데 이 아주머니가 국밥 국물이 식었다며 뜨거운 국물을 다시 부어주질 않나, 가만히 보니 국물속에 수육 왕거이도 몇 조각 넣어주지 않나 그러니 슬슬 사나이 가슴에 불길이 당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아주머니는 책보는 남자를 엄청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탓이거나, 예전남편이 책하고는 담을 쌓은 사람이 분명할 거란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내가 찜찜한 마음에 이건 일반 책이 아니고 바둑책이라고 보여주면서까지 극구 설명을 했는데도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그리고 나를 보고 그 때부터 호칭도 작가선생이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면 " 작가선생님 오셨다. 고기 많이 넣고 국밥 진국으로 한 그릇 말아라" 이런 식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얼굴을 익혔다고 그러는지 아예 내 탁자앞에 앉아서 바둑책을 보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신경이 안 쓰이면 사나이가 아닌 법.
안 그래도 복잡한 참고도가 보일 리 만무하고,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 건지 코로 들어가는 건지 감각도 없어졌다.
앞에 앉지 말라고 타박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누가 앞에 앉아 있는데 책을 보면 그건 예의에 또 어긋나지 않은가.
그러다 보니 요런조런 이야기를 나누게되고 누가 봐도 특별한 사이로 보이는 그런 사이가 자연스레 되어 버린 것이다.
처음 나의 의도대로 뭔가 사건이 일어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던 엉뚱한 곳에서 당초 기대와는 달리 사건이 아닌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그녀와 다정히 앉아 바둑책은 옆으로 밀쳐두고 거 머 남녀간의 대화(?)란 걸 나누고 있는데, 한 취객이 문을 불쑥 열고 들어온 것이다.
" 아저씨가 그 작간지 작잔지 하는 사람이요? "
" 예?, 머 작가는 아닙니다만, 왜 그러시죠?"
" 오늘 나하고 둘중에 하나가 죽던지 합시다, 나, 이 여자 없음 못 사는 사람이라요...."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다.
다음날 신문 사회면에 " 진해 거주 굴모씨, 치정에 어쩌구 저쩌구" 나올 뻔했다.
에혀, 머 되는 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