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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중사.(8) new
2015-08-14 오전 8:21 조회 4854추천 9   프린트스크랩

(8) 이별 준비

사단 여름휴가를 보내는 신림 휴양지에서 원주 관철동 부대

정문까지의 거리는 기가 막히게도 딱 12km가 떨어져 있다.

30kg의 배낭과 m16 소총을 휴대한 완전 군장에 구보측정을 받는

악마의 거리와 딱 맞아 떨어진다.

어떤 이는 물을 것이다.

왜 12km가 악마의 거리인가를.

물론 12km와 완전군장만으로 악마의 거리라 명명하기에는 의문점이 따른다.

허나 군 지휘부가 원하는 돌파시간이 첨부 된다면 그대는 경악 할 것이다.

45분이다.

맨몸으로 뛰어도 폐활량이 부족한사람이라면 목숨을 담보로 해야

간신히 들어갈까 말까한 짧은 시간이다.

하물며 아스팔트 표피가 끈적끈적 녹아있는 한 여름의 원주 제천 간,

6번 국도를 완전군장으로 45분에 주파해야하는 1군 사령부가 원하는

돌파시간은, 군 장병들을 호시탐탐 급행열차에 태우려는

저승사자와 함께 동행 시키는 미친 놀이라고 보면 별 오차가 없을 것이다.
1975년 육본에 수뇌부들은 모두 광기에 덮여 미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전 부대의 간부 화, 전 부대의 유격 화, 전 부대의 ( ? )화를

느닷없이 육본이 3대 군사훈련 강령으로 들고 나왔다..

강화된 적군의 전력과 상응한 아군의 전투전력 상승이 목표였다.

월남 패망 이후 고조된 위기감이 온 나라에 팽배했던 시절임을 감안해도

지나치게 혹독했던 훈련양의 전 군은 헐떡거리며 끌려 다녔다.

인간 한계 극복을 강요하며 전 장병을 죽음 앞까지라도

몰고 다닐 기세로 다그쳤던 육본에 앉아있던 수뇌부들,

그들은 무엇에 쫒기고 있었을까.

아직도 총 뿌리를 거두지 않고 남과 북은

80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휴전은 끝나지 않은 전쟁을 강력하게 의미한다.

40년이 넘어 희미해진 기억이 되었지만,

1974년 영부인 육 여사의 피격 사건 뒤에 전군에

그 광기 어린 시행 명령이 내려졌다 가정한다면...

각설하고 보병의 3보 이상 구보이동.

포병의 3보 이상 승차이동의 통념까지 박살낸 육본 수뇌부에

전 부대 유격 화는 포단 사령부 예하 각 부대의 포병들까지

정예화 된 보병이 되기를 강력히 원하고 있었다.

언제나 미운 놈은 따로 있었다.

아침 점호가 끝나기 20분 전.

서늘함이 남아있는 사단장 지휘소에서 사단 후문까지의

약 1.5km 정도의 간략한 거리를 하얀 반바지 차림의 테니스 복을 입고

3일에 한 번 씩 사단장이 조깅을 즐기고 간다.

약 20분 뒤.

사단에 배속된 전 장병이 30kg의 배낭과 m16 소총을 휴대한

완전 군장으로 10km 45분 주파의 사단 예비목표 달성을 위해

죽음의 레이스를 시작한다.

보이지 않는 총이 있다면 사단장은 3일에 한 번 씩 벌집이 되었을 것이다.

오늘이다.

사단 지원 부대와 각 보병 연대들은 끝났고 드디어 포단 측정의 날이다.

각 대대 장교 1명, 중. 상사 급 하사관 1명, 분대장 하사1명,

병 7명으로 이루어진 측정 선발요원들이 각 대대의 명예를 걸고

죽기 살기 한판 승부를 위해 신림 휴양지에 집결해 있다.

인간 한계극복을 원하며 지휘부가 책정한 출발 시간은
가장 뜨거운 오후 1시.

각 부대 출발시간 간격은 5분,

군 사령부 소령과 대위들로 편성된 감독관들이 부대별로

가람막이 올려 진 지프차를 타고 뒤를 따를 것이다.

응원조로 허용된 해당 부대 대대장도 함께 동승한다.
 

아직 출발도 안했는데 지프위에 군상들은 더위에 감독관으로 차출된

불만으로 모두 오만상을 찌그리고 있다.

재수 없는 새끼들이다.
재수는 나도 김 중사도 없었다.
3사에서 구보로 1등을 했었다는 정보 장교 윤 대위는 그렇다 쳐도,

김 중사는 가장 젊은 하사관이라는 이유로, 나는 가장 측정 경력이 많은

하사라는 이유로 우리는 지옥행 급행열차를 함께 타고 있었다.

그나마 든든한 것은 열차에 동승하기 위해 측정에 선발된
각 포대 병들의 면면이다.

각개 구보 측정에서 사단장 표창을 받아 보병 연대장을 한 숨 짓게 했던

수송부 김 병장과 8등을 했던 부라보 포대 윤상병도 합류해 있었다.

그런 짱짱한 선발 인원을 꾸리게 만든 것은, 1군 사령부로 봄에

전출을 간. 대대 교육 장교였던 박 대위가 감독관들에게 아양을 떨며

기생처럼 들고 다닌 닭다리 덕분일 것이다.

예측은 예측일 뿐이다.

반환점이 없는 직선 레이스에 중반을 넘어서부터 갑자기

선두에서 분대를 리드 하던 윤 대위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초봄에 신랑이 된 윤 대위는 밤마다 새 색씨와 치루는

자식 생산 전투에서 자신의 진액이 과도하게 쏟아져 나갔음을

까맣게 잊고 잊었던 것 같다.

행군의 속도가 눈에 띄게 쳐지자 감독관과 동승한

대대장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윤 대위! 야 이새끼야!

정신 차려.“

대대장은 포단 내 최고참 중령이다.

마지막 일지도 모르는 대령 진급 케이스가 올해 걸려있다.

까딱하면 별로 가는 사다리가 완전히 끊길지도 모른다.

나도 숨이 차 죽을 판이지만 지프 안에서 게거품을 물고 있는

대대장이 갑자기 처량하고 불쌍해 보인다.

“야! 김 중사.

저 새끼. 발로 차라.“

가산을 탕진하고 목숨을 건 마지막 판 돈을

집단 경마에 쓸어놓은 경마꾼보다 더 절박한

대대장에 몸부림이 터져 나왔다.

언덕 모퉁이만 돌아서면 사단 현병 대 고가초소가 보이는

관철동 입구로 들어설 때쯤, 윤 대위는 이미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m16은 수송부 김 병장이 받아든 지 오래고

군장은 김 중사와 부라보 포대 윤 상병이 번갈아 들고 왔다.

사단 유격대 조교반장도 구보로는 죽어도 못 쫒아 다녔다는 윤 대위다.

구보 귀신 윤 대위가 비무장으로 죽을 놈처럼 껄떡 대고 있다.

여자는 역시 요물이 분명하다.

용광로처럼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서 하사관이 장교를 발로 찼다.

그 것도 같은 계급의 대위와 영관장교가 빤히 보고 있는 자리에서

군화 발로 엉덩이를 걷어찼다.

하사관은 직속상관의 명령을 충실이 이행했고

장교는 대대장이 긴급 처방을 내린 강력한 충격요법덕분이었는지

분노의 추진력으로 사력을 다해 다시 선두로 나는 기적을 연출했다.

천지가 개벽할 대반전이었지만 전시면 김 중사는 총살감이다.

어떻게 부대 연병장에 도착 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3과 선임하사가 준비해둔 얼음물을 처음에는 아무도 넘기지 못했다.

가쁜 숨을 내쉬다 목을 넘겼던 물을 분수처럼 되 뿜어낸 뒤에야

겨우 한 모금씩 마셨다.

저승길에 올려놨던 발들을 모두 빼내고 있는데 대대장이 왔다.

“수고했다. 애썼다.

정말 고맙다!.“

어사 출도를 끝낸 이 몽룡이를 만난 춘향이 처럼,

땀에 흠뻑 젖어 쓰러져 있는 김 중사를 대대장은 게이처럼

오래도 끌어 앉고 있었다.

저녁 쌍 다리 갈비 집에서 있었던 대대장이 마련한 회식은,

치마와 속옷을 벗은 여자들이 동석해 니나노 소리가 폭죽처럼 연발로

터져 나왔던 거창한 자리였다.

당시 모든 부대의 측정은 보병 화에 맞추어져 있었고

완전 군장 구보는 화룡정점의 의식이었다.

44분 39초.

1군 사령부내 전 부대 보병 포함 9위안에 들었다는 대 기록이다.

군대의 전설로 남아있는 나체회식도 아깝지 않은 대대장이다.

보병보다 더 위대한 포병들을 이끌고 뛰었던 김 중사다.

누가 장교를 발로 찼다고 김 중사에게 돌을 던진단 말인가.

1군 사령관이 주는 지휘관 표창을 받은 대대장은

뒤풀이를 남기고 윤 대위를 데리고 사라질 때 까지,

쌍방울을 흔들며 찢어 진 입을 하고 있었다.

벙어리 냉가슴을 앓던 윤 대위는 한 번 도 웃지 않고

장교를 공식적으로 하사관이 폭행하게 명령한 대가리 큰.

또 하나의 장교. 대대장의 찢어 진 입만 바라보다 떠났다.

윤 대위가 사라지고 김 중사와 높이 잔을 들었다.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통해 있었다.

“으하하하!!!”

쌍 다리 집이 들썩 거렸다. 


                                                 -끝-





새로 써서 올린 글이라 댓글이 없습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3대 강령 중에 한 구호가 생각이 나지 않아서.

한 자리를 ? 부호로 남겼습니다.

인터넷 정보와 그 시절 신문 등 각 매체를 뒤져도 기록을 찾을 수가 없네요.

사람에게는 지나간 괴롭고 힘들었던 일들을 모두 지우려 하는,

치유능력을 습성으로 갖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시적으로 75년도에 몰아쳤던 광풍은 그렇게 모두 잊고 싶은

어리석은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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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조용히 |  2015-08-14 오후 9:10:19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김일성의 4대군사노선중 하나는 "전국토의 요새화" 같은데.. 워낙 오래되어서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  
youngpan |  2015-08-15 오후 2:56:25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서두의 12Km와 나중의 10Km는 어느 것을 고쳐야 할까요? 김중사 잘 봤습니다..사건 구보시 이별이 나올줄 알았는데~그래도 아니었군요! 잘 읽었습니다.  
동래한량 |  2015-08-28 오후 2:20:34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옛날을 회상케 하네요^^당시북한은 전군의 간부화?아닌가요?75년도1256****군번이지요^^학교다니느라 2년늦게 입대해서,그나마 용산삼각지에서 근무하다보니,님의 군생활이 새롭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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