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닭장

그땐 눈이 참 많이도 왔었다.

내리기 시작하면 사흘이고 나흘이고 줄 창 퍼부어대곤 했다.

사회에서 내리는 눈은 아름다웠다.

겨울이 지나면 다음 겨울 첫눈 내리는 날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그 약속을 지킨 자리에서 첫눈을 맞으며 찡한 눈으로 사랑을 확인하는

포옹과 따듯한 입술이 함께 하는 낭만과 추억을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군대에서 내리는 눈은 무조건 천덕꾸러기 골치 덩이에 불과했다.

예비사단으로 보병 포병이며 지원부대까지 모여 있던 사단 연병장은

야구장만큼이나 커서 각 부대별로 연병장을 나누어 제설작업을 했는데

대대 취사장 순시 때 파리 잡는 시범을 보여 좁쌀영감 칭호를 받은

사단장은 퇴역을 앞둔 말년에 눈과의 전쟁이라도 벌린 것 마냥 지프차를

타고 사단 영내를 돌며 제설작업에 진두지휘를 미친놈처럼 즐겼다.

옆 부대와 비교돼 조금치라도 눈이 더 쌓여 있으면

수시로 영내를 도는 사단장 눈에 찍힐까봐 안달하는 대대장에 닦달로

내무반에서 발 한번 제대로 못 뻗고 젖은 양말로 쉴 틈 없이

죽어라 치워야 하는 눈은 3대를 이어 내려온 철천지원수와 같았다.

"눈 오는 날 만나자고 부르는 놈 있으면 목을 비틀어 버릴 겁니다"

첫 휴가를 하루 앞두었던 막내 정 일병의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게 들려온다.

그냥 내버려두면 막사를 묻어 버리기라도 할 듯이

그날도 눈은 지랄 맞게 죽어라 펑펑 쏟아 붇고 있었다.

해 지기만 기다리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사단 정문을 지나

포단 사령부 앞을 가로질러 오는 다소 우스꽝스런 모습이 보였다.

W백을 메고 오는 게 아니라 W백이 먼저 보이고 그 뒤로

사람이 질질 끌려오는 것 마냥 보이는 키가 작은 군인 하나가 보였다,

재수 없게도 이 똥통 같은 사단으로 전 입을 오는 모양이다.

반복 되는 제설작업에 지루함과 무료함은 연병장내에 모든 시선을

끌어 모아 조금은 기묘해 보이는 그의 행보를 쫒게 하고 있었다.

도박의 귀재 윤 상병이 그새 판을 벌렸다.

포단 사령부를 기점으로 3개 대대 막사가 좌측으로 일렬횡대로 도열 해있어

어느 대대로 배속 되는가 한눈에 들어오니 내기를 걸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삼공팔, 삼공구, 삼하나공 포병 식 숫자 호명으로 신속히 벌어진 판에

중앙에 있는 우리대대로 들어가는 패에 나도 담배 한 갑을 걸었다.

"아이구! 얘야 체할라 천천히 좀 먹어라"

"어머니도 어서 잡수세요!"

먹지 못하고 죽은 귀신처럼 아귀아귀 채 익기도 전에 자식 입으로

빨려가듯 사라지는 고기를 함께 탐내 먹을 어머니는

하늘 아래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식어버린 불판위에 남은 고기 몇 점을 주섬주섬 드는 것으로

늦은 점심을 대신한 배고픔도 모르고,

군대 보내고 한해가 넘어서야 겨우 면회를 올 수 있던

어머니의 눈에는 수척해져만 보이는 자식 얼굴 살피기에 여념이 없다.

자신도 젊어서는 삶은 돼지 수육 두 어 근쯤은 게 눈 감추듯 했던

육식을 몹시 탐하셨던 분이다.

드실 생각이 전혀 없지도 않으셨을 텐 대 그 때는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흡족해 하시는 것만 같아 보였다.

7인분이 넘는 고기를 겨우 몇 점만 남기도록 마구 입으로 쓸어 넣은

자식의 모습은 어떻게 보였을까.

한번 배불리 먹였단 생각으로 돌아가시는 길이 뿌듯하셨을까.

효자노릇이 뭐 별 거 있나 자위하지만 갑자기 눈가가 축축하니

콧등이 또 시큰해진다.

보일 리야 없지만 행여나 눈물 흘리는 모습이 어머니 눈에 들킬까봐

버스가 콩만큼 작아지기 전에 뒤 돌아 서고 만다.

부대에서 보내던 긴 하루에 비해 어머니와의 면회 날은 너무도 짧다.

사단 정문 입초를 서고 있는 헌병들이 보이자 모자를 고쳐 눌러쓰고

터미널에서 몇 번을 되돌아보던 어머니의 모습을 마음속의 단단히

갈무리 해둔다.

자식에서 군인으로 돌아오자 저만치 부대 막사가 보이며

묻어 두었던 걱정이 돌격 앞으로 전진 해온다.

어제 내기에 걸었던 담배 한 갑은 새끼 쳐서 3갑으로 돌아 왔지만

그리 재수 좋은 날은 아니었다.

눈이 그리 지랄스럽게 퍼 부어 댔으니 좋을 턱이 없다

어제 W백에 매달려 전입을 온 키가 작은 군인의 계급은 하사였다.

나의 계급도 하사다.

전시에 예비 병력이 충원 되는 예비사단은 평소 90명이

두 개에 내무만을 쓰는 보병 중대에 해당하는 포대로 구성돼있다

포대 중 유일한 하사 이고 제 1내무반을 맡고 있는 내무반장이 내 직책이다.

한데 문제는 땅딸이 하사가 내 선임이란 것 이였고,

게다가 더 머리를 아프게 한 것은 일반병과 같은 복무기일로

간당간당한 위엄으로 간신히 버티는 단기하사에겐 쥐약 같은

장기하사에다 석 달 후면 중사 진급에 특명까지 받고 왔다는 것이다.

그걸로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내무반 구석에 칸막이를 내어

혼자 쓰던 내 보금자리 내무반장실도 함께 써야한다.

병장이 내무반장을 보는 제2내무반도 있는데 굳이 제1내무반으로 보낸 건
새끼 중사가 단기하사 보필을 받으며 쑥쑥 자라 아저씨 군인으로

튼튼하게 자리매김 시키려는 인사계 박 상사에 음흉한 의도가 분명 하다.

한해도 안남은 군 생활에 상전을 모시는 때 아닌 시집살이를 해야 한다.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땅딸이 김 하사는 나이가 나보다 네 살이나 아래였다.

18살 먹은 어린애를 지원 입교 시킨 하사관 학교는 저주 받아야 한다.

1년이나 선임인 하사가 막내인 내 동생과 나이가 같다.

참 엿 같은 일이다.

저녁 점호가 끝나고 김 하사가 전입 인사 회식을 위해 희사한

거금이 내무반을 왕창 뒤집어 놨다.

가끔은 술 항아리에서 반합 한 통씩 막걸리를 훔쳐오던 사단 후문 앞,

천안 댁 아줌마의 구멍가게를 발로 차고 들어갔다는 천상병이

보무도 당당하게 한말짜리 술통을 현찰로 지불하고 어깨에 메고 돌아왔다.

조수로 따라간 윤 일병과 김 일병도 쏘세지며 고등어등 통조림 깡통이

화려하게 포함된 푸짐한 안주와 다량의 소주를 추진해왔다.

주번사관 인사계가 큰 맘 먹고 허용한 술자리는 이외로 길어지고

결국은 사단이 일어났다.

내가 취해버린 것이다.

군대 콩나물 길이도 나보다 길고 하사관 학교도 선배이긴 했지만

나이 어린 김 하사에게 “김 하사님“이라고 부르긴 죽기보다 싫었다.

나는 무려 나이가 네 살이나 더 많은 형님 같은 터주 대감이니까.

낯선 자리라 그랬는지 처음에는 김 하사도 말을 아꼈다.

그러나 껄끄러운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가지 않았다.

서로 호칭을 삼가 하던 묘한 냉기류가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로 변하게 한 건 역시 술, 술이 선물한 운명의 장난이다.

이외로 체구에 비해 입이 무겁고 소주, 막걸리 짬뽕을 거침없이

주는 대로 받아 마시고도 말짱해 보이던 김 하사가 선제공격을 가해왔다.

술김을 가장 하고 김 하사가 내무반장 이라는 존칭을 생략하고

“어이! 정 하사”하고 부르는 포문을 열면서 작은 전쟁에 도화선은

순식간에 점화가 되어 확 타오르고 말았다.

“어이? 어이?”

눈에 불아 확 붙어 왔다.

이 새끼가 인생을 종 치고 싶나?

좀마니 한 게 니가 나를 시방 어이 라고 불렀냐?

현장에 없는 보초병을 뺀 모든 포대 대원들에 눈동자가 두 하사에게

떼굴떼굴 굴러오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끝-



그때 달렸던 댓글도 함께 올려 봅니다.


月谷川 ｜ 2010-12-03 오후 3:28:01 [동감0]

하나 둘 삼 넷 오 여섯 칠 팔 아홉 공

一圓 아! 포병 인갑다 ㅎ 쓰고도 참 오랜만에 불러봅니다 그때는 지겹던 것들이 오늘은 정겹게 다가 옵니다 고맙읍니다

月谷川 12343652 평생잊지못할 73년2월 논산군번입니다.비포장도로의 강원도 화천 7사단 포병사령부

月谷川 가슴이 빵빵하여 쫄병들의 가슴을 설레게했던 부대앞 가게집 여고 3년생큰딸은 어디서 무얼할까?

aichi 월곡천님. 10년 선배님이시네요. 전 칠성부대 연대 지원중대 근무했는데.

一圓 12352235 월곡천님과 같은해 4월 군번 입니다 38사 원주 포사 구요 반갑읍니다

一圓 막걸리 훔쳐 먹던 후문 가게집 아줌마 가슴이 더 컷을것 같은데요 ㅎ

소라네 ｜ 2010-12-03 오후 9:22:27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저도 1975년 원주에서 눈만 오면 눈물이 나던 생각이 나네요^^ 눈 밭에 워카로 어머니 써 보았었는데 고속도로변이어 지나가다 보니 그리 작고 초라하던지요^^

一圓 거의 같은 시기의 원주에서 내리는 눈을 함께 맞은것 같읍니다 .

반갑읍니다

aichi ｜ 2010-12-03 오후 9:23:17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FDC 205기.

동기들 모이!

一圓 사격지휘 ,맞죠? FDC얘기가 포병부대에서 빠지면 앙꼬없는 찐빵! 고맙읍니다

aichi 계산병은 포병의 「꽃」이었습니다... 활짝 활짝..

一圓 ㅎㅎ

당근돼지 ｜ 2010-12-04 오전 6:14:5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저는 69년도 반공포제1여단사령부.....RCAT분견대

그 시절은 그렇게도 지겨웠는데 지금은 그 때가 그립네요.......감사 합니다.

팔공선달 모두가 그런거죠모.^^ 저도 포병출신 ^^&

一圓 충성! 73년 군번이니까 콩나물 길이로 지구 두바퀴쯤 앞서 계시네요 와! 포병 많아 신난다

꿈속의사랑 ｜ 2010-12-04 오후 1:22:10

양평에서의 졸병 그시절 기억이 생생한데 벌써 30년이 흘러갔으니 .....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一圓 쫄병 한번 더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고맙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