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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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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성묘
2014-08-28 오후 1:31 조회 4548추천 5   프린트스크랩




  올해 추석은 9월 초순으로 예년보다 훨씬 빠르다.

  사람들은 8월 한더위에 벌초를 해야 하느니, 태풍이 잦아 휴가를 제대로 보내지 못했다느니, 추석이 빨라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느니 불평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내게도 조상 묘소가 있으나 돌보는 데에는 부족함이 많다. 한번 찾아 가자면 사백킬로미터도 넘는 먼 오지 골짜기에 있는 것도 그랬지만 아버지를 어릴때 여의고 홀어머니 손에서 외롭게 커서 조상에 대한 관심이랄지 제례에 대한 인식은 희박할 수 밖에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과의 유대 관계가 내게는 더 중요하였다. 죽어서 백번 잘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살아서, 살아 있을때 얼굴 한번 더 보고 말이라도 정답게 한마디 더 건네 보는 것이 나을 것이었다. 유행가 노래도 있지 않은가. 있을때 잘 하라고.


  그런데 조상의 묘는 못가볼지언정 내가 꼭 가봐야 할 곳이 있었다. 그것은 작년 가을에 죽은 K의 묘였다. K는 바둑 고수였었고 언젠가 그의 내력을 전에 한번 쓴 적이 있었다. 어릴때 공부 수재였으며 집안의 반대로 대학을 포기하고 프로 입문을 꿈꾸었으나 실패를 하고 기원 주변을 떠돌며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다가 간암으로 사망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기재를 아까워 하였고 죽어서도 그의 뒷담화는 심심찮게 오르내렸다.


  K는 살아 생전 술을 너무 좋아해서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술에 의지하지 않으면 하루도 견뎌내지 못했다. 바둑과 술, 이 둘은 그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바둑 삼매경에 빠져 있을때는 바둑에 취했고 바둑을 두지 않을땐 술에 취했다. 자신의 생을 위로해 줄 유일한 도구였다. 바둑과 술, 굳이 우선 순위를 따지자면 바둑이 앞선다고 할까. 바둑을 통해 인생을 알았고 술을 마시면서 삶의 허무를 느꼈다. 그러나 바둑판 위에서는 그 모든 것을 쓸어 담을 수 있었다.


   K가 살았을때 바둑을 몇판 배운 적이 있었다. 강1급이라고 자처하는 내가 두점을 접고도 헤맬 정도였으니 그의 실력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석점을 접으면 겨우 승부를 다툴 수 있다고 보면 될 것이었다. 그와는 딱 한번 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있었는데 언변 또한 달변이었다. 자신의 내력과 인생관 등을 일목요연하게 얘기하였는데 바둑 실력과 그의 능란한 화술이 어울려 그가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런 그가 홀연히 사라졌으니 어찌 아깝다 하지 않을 수 있으랴.


   K의 묘는 북서쪽 외진 산골짝에 위치한 시립공원에 있었다.

  K의 묘에는 잡풀이 적지 않게 듬성듬성 자라 있었다. 묘 주위를 돌며 손으로 대충 뽑았다. 묘비명에 K의 생몰년대와 이름만이 적혀 있었다. 〈1948∼2013 김영수〉. 그가 살아 생전 자신의 이름을 잘 밝히지 않았으며 거론되는 것 조차 싫어했다는 것을 알기에 계속 K로 쓰기로 하겠다.

  나는 소주 한병과 마른 안주 등 간단하게 준비한 제례 음식을 K의 묘앞 바둑판 위에 올려 놓았다. 바둑판은 돌로 만든 것으로 제례상 겸용으로 쓸 수 있는 것이었다. 양옆엔 미닫이 형식의 바둑통이 있어 흑백의 바둑돌이 들어 있다. 나는 소주 한잔을 따라 놓고 절을 하고 난 뒤 바둑판 앞에 앉았다. 8월 중순이 넘었지만 그날따라 구름이 낀 데다가 바람까지 불어와 한 여름의 더위를 조금은 식혀 주고 있었다. 소나기라도 올 모양이었다.

  묘를 바라보노라니 K가 금방이라도 튀어 나을 것 같았다. K는 얼마전에 죽어서도 바둑을 둔다는 그 화제의 주인공이어서 더욱 그랬다. 나는 아직도 반신반의하고 있지만 그것을 직접 목격했다는 공원 직원이 아직 그대로 근무하고 있는 터여서 혹시나 하는 바람을 씻을 수가 없었다.

  나는 따라 놓은 소주잔을 묘 주위에 뿌릴까 하다가 그냥 입 속에 털어 넣었다. 냄새를 맡은 멧돼지가 묘를 훼손하는 경우가 있어 술을 묘 주변에 뿌리는 일은 삼가해 달라는 공원 관리자의 말을 들은 때문이었다. 술 좋아했던 K에게는 서운할지 몰라도 묘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서는 그게 좋을 것이었다.


  나는 가져간 월간바둑을 보며 프로기사의 기보를 놓아 보았다. 맞은편에 소주 한잔도 따라 놓았다. K가 앞에 앉은 것으로 생각하고 바둑을 두는 모양새를 취한 거였다.
  딱, 따악! 나는 힘차게 바둑판 위를 두들겼다. 부딪히는 흑백의 돌 음향이 공원 묘지를 울렸고 산골의 메아리로 번져갔다.


  기보를 놓아 보면 내가 프로기사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해설자의 내용을 읽으며 착점을 하면 두 기사의 마음을 넘나들며 내가 대국 당시의 현장을 보는 듯 하다. 내가 흑을, K는 백을 쥐고 두는 것 같다. 정말 바로 앞에 K가 앉아 있는 환상을 보는 듯 하다. K의 영혼이 이미 내 앞에 앉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투명 인간처럼 앞에서 나의 모든 행동거지를 보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마음이 숙연해졌다. 
 

  예전에 기원에서 그의 앞에서 주죽이 든 채 한 수 배울때의 심정이 되살아났다. 바둑판 위에 재빠르게 놓아 가는 그의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압도되어 갔었다. 백마가 휘달리듯이 발빠르게 움직이는 행마에 정신을 빼앗겨 버린다. 거대한 산 앞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숨막히듯 후딱 지나고 보면 나의 대마는 어느새 포로가 되어 죽어 있고 바둑을 더 둘 의지마저 꺾여 버리고 만다. 그때 그 두려웠던 마음이 지금 다시 되살아 나는 듯 했다.


  기보를 다 놓을 즈음 짙은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저쪽 산등성이에 내려 앉아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햇살을 피하기 위해 바둑돌을 쓸어 담았다. 돌통에 떨어지는 소리가 산의 정적을 깨뜨렸다. 한판의 바둑이 마냥 아쉬운 듯 앙탈을 부리는 것처럼 들렸다. K의 섭섭한 표정이 눈에 어리는 것 같았다. 아니, 이렇게 뜻하지 않게 찾아와 줘서 고맙다는 기운이 전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한때 그렇게 친밀하지도 않았던 한 사내가, 바둑을 한수 배웠었다는 인연으로 자신의 묘까지 왕래를 해 준 것을 감읍하지는 않았을지. 나의 성의가 조금이라도 전해졌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것이 없으렷다.


  나는 K의 묘에 절을 하고 산을 내려왔다.
  관리사무소에 들러 K의 환영을 봤다는 직원과 차 한잔을 했다. 직원은 나의 방문이 K에게 많은 위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의 마음이 분명 K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며 K도 기뻐할 것이라고. 그는 다른 수많은 영혼들을 생각하며 묘를 돌보고 있지만 유독 K는 잊지 못할 특이한 경우라고 했다. 언젠가는 다시 보는 순간이 있으리라고 힘주어 말했다.

  나도 그의 말처럼 K의 환영과 바둑 한수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관리사무소를 막 나서려는데 예상치 않은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더위를 좀 식히고 가라는 것인지. 좀 더 머물다 가라는 건지.

  저쪽 서편 하늘에는 햇볕이 짱짱한데 참으로 이상한 변덕스런 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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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  2014-08-29 오전 12:04:56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명작 단편을 읽는 느낌입니다. 건필하십시오  
팔공선달 |  2014-08-29 오전 4:52:23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즐거운 한가위 되세요.^^  
곰소가는길 |  2014-08-29 오후 3:45:16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잘 읽었습니다
 
우주공0 |  2014-08-30 오전 9:12:12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정말 멋진 수필이네요. 너무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두 분은 이미 바둑에 관한 한 이미 신선의 경지에 이르신 것 같습니다.
바둑 사랑이 너무나 돋보입니다. 멋진 추석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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