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퉁이 오래 된 무허가 포장마차에 여럿의 그림자가 비친다.

가로등 하나가 안성맞춤으로 입구를 비추고 있어 운치마저 있고

지금은 신작로가 들어서면서 재의 높이가 많이 낮아졌지만

예전엔 몇 굽이돌아 나그네 숨길을 조이고 갈증이 목 끝에 걸릴 때쯤

코를 먼저 잡아당기던 주막이 있었음직한 파군재 옆 공터에 자리 잡았다.

그곳은 왕건과 견훤의 격전지로 계곡을 화살과 시체로 메웠다는 곳이며

왕건이 신숭겸을 잃은 곳이기도 하다.

서로의 만남은 오래 됐지만 외관상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다

오히려 간간히 주인장 내외가 떠드는 수다가 적막을 깰 뿐이다

그렇다고 화제가 심각한 것 같지도 않고 표정들도 평온하다

주방에서 주인 내외가 뭔가 시비하며 작은 소리로 토닥이고 있을 때

모두에게 일 순배를 권한 A가 각자의 술잔을 번갈아 채우며 말을 꺼낸다.

“오랜 백수생활에서 터득한 노하우는 벙어리에 귀머거리가 되는 게 상책이더라고.

그러면 자다가도 떡 먹으라고 깨워주는데 말이야

골라서 한다고 했는데도 하고 싶은 말을 하면 손에 든 떡 까지 뺏어 가더라고.

이치에 맞고 안 맞고 떠나서. “

마주한 일행들은 묵묵부답이지만 미소를 띠는 이 고개를 꺼덕이는 이

그저 덤덤한 이까지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술 한 잔을 훌쩍 들이키고 탁자에 잔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빈 잔을 치켜들었다

안주 집을 젓가락도 채 잡기 전에 옆에서 술병을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랜 가난의 탓인지 술좌석뿐만 아니라 먹는 음식에 대한 오해가 깊다

혹자는 그것이 정이고 민족적 온기라고도 하는데…….

A는 그럴 때마다 드는 의문이 음식 빼고는 왜 그리 권하기에 인색 한가 하는 것이다

그는 잔을 받아 든 채로 말을 이어갔다.

“근데 우리 백수그룹에도 선천적 백수와 후천적 백수의 차이는 엄연히 달라.

선천적 백수는 태생이 무책임하고 게으른 사람이라 별로 논할 가치가 없을 것 같고

후천적 백수들 중에도 3가지 분류로 나눠 봤는데.

우선 선비파로.

깨우친 게 있어서 이치와 순리에 밝으나 뭔가 2% 모자라는 분류로

기량을 사회와 접목시키지 못하는데 아마도 융통성의 오해 탓이 아닐까 생각해.

여기도 의미를 버린 초월자가 있는 반면 한편으론 무기력 증에 빠진 방관자가 있고

무조건 세상에 반항하는 분류가 있어.

어쨌든 갠 적으로 나는 이들이 오리가 지랄하고 날아간 자리에 핀 꽃.

진정한 백수라 생각해.

갈수록 싸가지 없고 혼탁해지는 세상에 깨끗하고 순수하잖아.

비유가 좀 거시기 하지만 그렇다고 미운새끼는 몰라도 오리 똥이라 생각하지는 마.“

사람들이 환하게 웃지만 소란스럽지 않았는데

오히려 주방 구석에서 키득키득 웃음을 참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안주인이 음식준비하면서 다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모두 그쪽으로 시선이 몰리자 허둥지둥 소리 내며 설거지하는 척 모면한다.

그들은 별 다른 조크 없이 다시 시선을 서로에게로 모은다.

다음으로 선무당파로.

뭔가 아는 듯 하면서도 어리석고 거기다 말까지 많은 한 때 잘나갔다는 친구들로

중증 왕자 병에 걸린 자들이지

이들은 이슬이 아니라 추억만 되새김질 하는 자들로 가끔 연민도 자아내지만

대체적으로 밥맛이지.

한 때는 다 있어.

그러나 백수가 되면 그냥 첫 사랑처럼 가슴에 묻고 살아야 하는 거야.

막말로 늘어진 대가리가 흔들어 댄다고 독사대가리가 될껴. “

그래봤자 아니겠어.

백수는 글자 그대로 잡티가 없어야 하는데 말이야.

먹고 논다고 다 백수가 아니라는 게야. “

조용히 환경에 적응하면서 주는 밥 흘리지 말고 인내하며 꿋꿋하게 챙겨 먹어야 돼.
그리고 항상 죵하게  살아야 하는겨.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렌지파.

이들은 외형은 같은 백수지만 능력 있는 백수로 어쩌면 진정 백수일지도 몰라

하지만 이들은 편입생으로 백수 생태계를 알려면 상당기간 적응 시간이 필요해

군 신참 하사관이 일병보다 낮다는 게 뭐겠어. 짠밥 이잖아.

자. 나는 이쯤에서 빠지고 오늘의 물주며 오렌지파의 지존인 자네가 한마디 하지. “

육군 중령 예편한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술잔을 내민다.

A가 그득하게 따라주니 단숨에 들이키고는 술잔 닦고 옆 좌석으로 돌린다.

얼떨결에 받아 든 사내가 궁시렁거리며 받아 든 술을 냉큼 들이키고는 다시 돌려주며

잔을 채우면서 말을 시작한다.

“그래.

우리야 뭐 동안 별 탈 없이 집과 직장을 30여 년 다니면서 궁색하진 않았어.

어쩌면 다소 군림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

미안한 소리지만 자네들 보다야 경제적으로 궁핍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안락한 생활이라고는 할 수 없어.

아직은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은근히 애들의 압박이 예사롭지가 않아

투자에 대해 예전보다 심도 깊이 의논해 오고 사업계획을 자주 털어 놓곤 해

물론 지금이야 단초에 묵살해 버리지만 좀 나오는 연금과 줄어드는 퇴직금이

없는 이들의 부러움만큼 든든하다고는 못해.

무엇보다도 세상 경험이 모자라는 우리로서는 누구를 믿어야 할지 난감해

그건 이 친구도 마찬가질 걸. “

말을 미룬 옆 좌석 사내가 다시 자기 잔을 훌쩍 들이키고는 쪼르르 민다.

적당히 미끄러지다가 멈추는 게 많이 해본 솜씨다

잔을 받아 든 사내에게 말없이 술을 따르니 손으로 받아 들며 말을 이어갔다.

“주변 동료들이 벌린 이런저런 사업들도 그리 잘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30여 년 교편생활에 변해가는 제자들도 따라가기 힘들어 하던 내가

뭘 능동적으로 대처하겠어.

지금 하는 알바도 체면만 던지면 되니까 소일 삼아 하는 거지.

뭔 경험 쌓으려고 하겠어. 당장 돈이 아쉬워서 하겠어.

그래서 이 친구는 다람쥐 나는 앵무생거야. “

옆 친구는 얼마 전 동창이라며 데려와 소개한 육군중령 예편자다

두 사람 다 깨끗한 영혼을 가진 따뜻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는데 뭔가 막혔다

하지만 당사자들이 모른다고 하지만 세상의 가장 정곡은 꿰뚫고 있다

요즘은 명퇴자들의 경계 대상 1호가 갑자기 연락되는 지인이나 과잉친절하거나

사업이야기로 접근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밖에서야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 그런대로 버틴다 해도 문제는 집이야.

마누라까지 분산한 것 같고 원래부터 그랬나 싶을 정도로 뭔 비즈니스들이 많은지

그리고 은근히 피하다가도 어떤 땐 나 들으라는 식으로 큰소리로 말하곤 해

요즘 몇 억 가지고 뭐 할게 있어.

마음은 힘 돌아갈 때 소일 삼아 알바나 하고 마누라랑 여행도 좀 다니고

친구들과도 좀 어울리고 그렇게 아껴 뒀다가 다 지들 주고 갈 건데 말이야

나 말고도 울 마누라 쑤셔대는 인간들도 좀 있나벼. 여자들 헛바람 들면 큰일이여. “

맞는 말이지만 백수도 격이 있어

눈물 젖은 식은 밥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의 소통이 여간 힘들지 않다

그래도 차분한 분위기는 이어졌고 서로의 심경을 털어 놓고 가족사 의논하고

그리고 서로의 건강을 걱정해주고 격려하다가 A가 마무리를 제창한다.

“자자. 술은 적당한 게 건강에 좋아 우리 술도 깰 겸 동네나 한 바퀴 돌고 들어가지

마침 달도 밝으니 오늘은 둑으로 가세나. “

일행들은 두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오늘은 다람쥐중령이 계산대로 나섰다

안주인의 교태스런 애교를 부리며 맞이했지만 일행들의 눈치는 덤덤했다

(이년아 우리 이야기 마누라들에게 죄다 일러바치려면 전화비 꽤나 들거야.)

따라 나와서 연신 인사하는 여자를 뒤로하고 모두들 느긋하게 뒷짐 지고 걸었다

달이 참 밝다

그럭저럭 모퉁이를 돌아서자 포장마차가 보이지 않는다.

“택시. 택시. 아 뭐해. 어여들 와.”

“어 으응. 알았다. 알았어. 선달이 저놈은 역시 재빠르단 말야.”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와.~~~오빠~~~”

“앵~콜”

“아~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

“살리고. 살리고.........”

노래방은 중늙은이들의 광란으로 난리도 아니다

포차 여자가 마누라들에게 고자질 하는 걸 알아차렸을 때부터 그들은 조용한 남자들이 되었다

그리고 여주인은 마누라들에게 받은 신임으로 그들을 의무적으로 그곳에서 만나게 만들었고

궁리 끝에 최소한의 양과 시간으로 때우고 옆 동네로 2차를 가되 산보시간 안으로 마친다.

그리고 다시 동네로 와서 컨디션에 따라 오픈 된 24시 편의점에서 3차로 마무리 하는 것이다. 사랑의 종이 울리기 전에 자진 귀가 하거나 며느리 손자 손녀들이 데리러 올 때까지.

달빛 아래 백수들의 백수 천수하기가 못내 처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