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소년

겨울 앞섶을 끈질기게 잡아당기며

새벽부터 내린 비가 해질 무렵까지 머물다

마당 가득 빈곳 없이 은행잎을 깔아 놓고 떠났다.

어깃장을 부리고 싶어서일까?

저녁 어스름에 마당에 들어 서 차게 불기 시작한 바람은

비가 떠난 뒷자리를 지우기라도 하려는 양,

낙엽을 비질하듯 쓸어다 내 마음에 버리고 있다.

텅!

낙엽이 밀쳐와 가득 쌓이는데

웬 지 마음은 바람 부는 벌판에 선 것처럼

휑하니 쓸쓸하다.

일 년에 한두 번은 홍역처럼 치루는 고질병이 또 찾아든다.

소주 한 병을 비웠다.

늑대처럼 보고 싶다는 생각이 그리움에 언덕을 어른거린다.

두병 째 소주도 어느새 비어있다.

진저리를 치면서 외면했던 늪 속에 벌써 반이나 빠져있다.

세 병째 소주는 반을 넘기자 걸음이 더뎌진다.

따 루기는 했지만 그나마 반도 차지 않은 소주잔이 너무 무 겁 다.

오르락내리락 하던 술잔 대신 참으려고 했지만

손에는 이미 전화기가 꽉 쥐어져 있다.

어쩌다 찾으려면 더듬거리는 전화번호가 툭 튀어 나온 다.

이빨을 꽉 깨문다.

안 돼!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손가락은 제 멋대로

통화 버튼을 누른다.

신호음을 짧게 짜르고 그립던 목소리가 손목을 확 잡아챈다.

화살은 시위를 떠나 이미 허공을 갈랐다.

양치기 소년은 지난 일을 까맣게 잊고 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목청껏 소리친다.

늑대가 나타났어요!

늑대가 나타났어요!

“나다 니 헝아다!

이번 봄에는,

이번 가을에는, 나 꼭 한번 갈께“

내 그리움이 갈 곳에 닿지 못하고 무거워지면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짐처럼 이곳저곳 던져 놓고

또 계절만 훌쩍 앞서 보내고 말았다.

어쩌면 지키지 못할 약속을 무책임하게 던지는

고질병으로 양치기 소년이 되더라도

쓸쓸함이 가득 배어있는 이 계절을 건너려면

한 번은 더 끙끙 거리고 앓아야만 지날 것 같다.

“3년만 넘기지 않고 지키면 네 약속은 언제나 유효로 쳐 준다”

웃지도 않고 정색을 하며 내가 탄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돌처럼 서있던 사람.

뜬금없이 나타난 나를 꼭 껴안고 말없이 등만 두드려대던

친구 녀석의 두툼한 손등이 왈칵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