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일사의 내용은 바둑담

바둑을 좋아하고 기력의 증진에 목 마른 한 사내가 있다. 이 사내는 공씨(孔氏)로 어느날 바둑의 고수를 만난다. 그것도 한명이 아니라 두명이다. 공씨는 두명의 바둑고수를 만나 바둑을 배우는 기회는 천금도 아깝지 않다며 흥분을 한다. 그리고 두 사람과 순차적으로 대국을 한다.

- 내가 평생을 바둑을 좋아 했다. 오늘 두명의 고수를 만났으니 그 수법을 배울 것이다.
(我一生最愛的是圍碁 今二仙碁對奕向不學他幾着) -선진일사

공씨의 마음가짐이 자못 심각하고 진중하다. 이렇게 시작된 바둑은 시간을 물쓰듯 하며 자정을 넘기고 새벽에 다다른다.

- 눈꺼풀이 일어날 정도로 두눈을 무릅뜨고 천번 생각하고 만번 계산을 한다. 왼손의 두 손가락 사이에  바둑돌을 끼어 놓고 흡사 한증이 든 사람처럼 떨며 머리를 흔들어 댄다.
(桑皮筋張目肴指 千思萬算 右手兩指粘着碁子 恰似發脾寒病一般 不佳的搖頭)
-선진일사

바둑을 두는 대국 장면의 묘사가 압권이다. 한판의 승부가 치열하다 못해 뜨겁다. 손가락 사이에 바둑돌을 끼고 천번만번 생각하는 대국태도가 오늘날의 프로바둑의 모습과 비슷하다. 대국의 현장을 실감나게 묘사한 자료가 한 점 더 있다.

- 덕원군 이서 이후 많은 국수들이 있었으나 책에 전하는 사람은 없었다. (1750년을 기준으로) 육칠십 년 전 최기상이 뛰어났다. 최기상을 이어 변흥평이 있었다. 최가 기력이 높아 대국을 할 때면 항상 한점을 변이 깔고 두었다. 최가 말년이 되면서 변이 이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변이 "한점을 깔지 않아도 승부가 될 듯한데 어떠시냐" 묻는다. 최가 노하면서 말한다. "다음에 다시 오거라 오늘은 내가 손이 떨린다. 나도 기운이 떨어지는구나. 그러나 아직은 너는 적수가 아니다. 아직은 너는 하수다." 최가 웃으며 꾸짖자 변이 "정말입니까?" 묻는다. 최는 "정말이다" 대답을 하며 "망동하지 마라. 내일 다시 오면 가르쳐 주마" 한다. 변이 그러마 하고 물러간다.

다음날 아침 변이 최를 찾아온다.

최가 말한다. "나는 늙었다 기운도 많이 떨어졌다. 매일 아침 정신이 혼몽하다. 그러나 너의 망동은 참을 수 없다. 내가 오늘 너와 세판을 두어주마. 세판 중 한판은 너를 만방으로 보내겠고 나머지 판도 모두 이길 것이다." 하자 변이 웃으며 말했다. "그럴까요? 그 말이 와닿지 않소이다."

드디어 바둑이 시작되었다. 최는 화롯불 앞에 자리를 잡았다. 화롯불 위에는 어린아이의 오줌이 담긴 그릇이 올려져 따뜻하게 데워지고 있었다. 첫수가 반상에 떨어졌다. 바둑은 느릿느릿 담소와 함께 두어졌다. 넓고 넓은 벌판에 말들이 모여들더니 수많은 군마대의 기세가 되면서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고 거친 바람과 비바람이 몰아쳤다. 어느 순간에는 십여 수가 숨쉴 사이 없이 진행되었다. 구경꾼들이 순서를 눈치 챌 틈도 없었다.

그러다 항우가 '해성'에 포위되어 목숨이 경각에 달했던 순간이 왔다. 한 호흡에 생사가 걸린 형세였다. 최가 옷소매 속에 손을 빼고 앉아 면수건으로 화롯불에 데워진 아이오줌을 묻혀 눈을 씻었다. 그리고 몇 시간이 흐른 다음 착점했다.

"......!"

변이 그 수를 보고 기겁을 하고 놀랐다. 응수가 없었다. 새벽이 다가왔다. 동쪽 창문에 해가 걸렸고 남산의 봉화는 불을 내렸다. 마침내 세판의 바둑이 끝났다. 첫판은 최가 만방으로 이겼고 둘쨋판은 5집, 마지막판은 1집으로 최가 이겼다. 최가 큰 소리로 변을 꾸짖었다.

"변아, 모든것이 너의 망동 탓이다."

변은 입을 다물었다. 구경꾼들은 그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 德原後當有許多國手 史闕不傳 六七十年前有崔器祥(다른 자료 起尙)獨步 崔之後又有卞興平 少劣於崔  對局必先下一字  崔之晩年 崔多見敗於卞 卞或去一字 而亦得嬴 卞輒曰 比年以來  吾之手長得一層 崔主簿乙衰矣.  直與我敵手 從今許我先下之子. 崔微笑曰 定然乎 卞曰 定然矣. 崔曰 邇妄耳 邇且明日早來  卞應許而去 翌日晴朝 卞造崔 崔乃曰 我衰矣 精力大減 每朝亂着去 故邇妄言乃邇 我今日終日但下之局  邇必局輸 三局之內一局必倍數而輸矣.  卞冷笑曰 豈其然乎 其則不遠 透開局 是日崔置爐於前 熱火於爐 取童便一大椀照火而爰之  其始下手也.  徐徐輓輓也 談笑以應之 及到平原曠野 萬馬爲馳之勢  則晴天之飛雷 標風之急雨也似 一連下數十字 局外之觀者  未及推步而見之 若遇該城十月月彙重重危急存亡 迫在呼吸之形  則乃袖手却坐  以雪綿子瀆童便洗眼 數食頃始下子 卞茫然莫知所而應之 日朝旭初 滿東窓時 至終南擧烽  終乃子三局 其第一局 崔嬴培數 第二局嬴五局 第三局嬴一宮 崔乃大喝 卞曰 邇今復敢妄搖舌乎 卞不能開口 觀者皆吐舌.  -李運永 碁場 ]

선진일사와 비슷한 시기의 이운영(李運永)의 기록은 당시대 바둑에 임하는 고수들의 자세를 잘 보여준다. 이날 대국에서 공씨는 패한다. 공씨는 더욱 기력을 연마한다. 그러던 어느날 바둑을 잘 두는 스님을 만나 내기바둑을 두게 된다. 공씨는 준비한 돈을 모두 잃고 조금 남은 돈을 모두 걸고 마지막 한판을 두면서 돈의 액수를 곁눈질하며 최선을 다하지 않는 스님에게 불만을 표시한다.

- 이미 두판의 내기에서 모두 져 돈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저 인간이 흥미를 잃은 모양이다. 돈이 더 있어야 땡중이 흥미를 느낄 것 같다.
(這兩局是我屈輸了 皆因錢少 故此不動 豪與須多出 形彩 頭才妙) -선진일사

공씨는 나름 바둑의 고수다. 주변에서 바둑이 약한 하수들이 대국을 청해 와도 혼쾌히 받아 주는 아량(?)도 있다.

- 공씨가 바둑판을 내오게 한 후 조카와 바둑을 둔다. 두 사람 사이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공씨가 여섯 점을 접어주고 시작한다.
(孔氏取過碁枰 今叔姪참試一局 看二人對奕杜應 元輸了 直饒至六子) -선진일사

이 대목에서 한가지 의문을 갖는다. 공씨와 조카는 과연 어떤 바둑을 둔 것일까? 순장식 바둑을 두었다면 16점 배치를 한 후에 조카가 6점을 더 깔아야 한다. 바둑판 위에 22점이 배석된 상태에서 두는 바둑이 과연 바둑이랄 수 있을까.
이 장면에서 이런 의문을 갖는 이유는 요지(饒至), 즉 상대에게 먼저 득점을 준다는 단어 때문이다. 우리는 순장바둑을 말하면서 배자청주착오간(排子靑朱錯誤看)에 등장하는 '배자(排子)'를 순장바둑의 배석(排石)으로 이해를 해 왔다. 깔고둔다와 깔아준다는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자청주착오간은 1964년 [월간기원]에 김용국이 소개한 조선중종때 문인인 최석신의 시다. 이 시 속의 배자는 바둑판에 놓인 돌의 모습을 말한 것이지 순장바둑의 배치를 말한 것이 아니다. 최석신은 어린아이와 바둑을 두었는데 수가 신기망측하고 몰아치는 힘이 강하여 내가 홍인지 청인지(조선시대 바둑돌은 홍, 청이기도 했다) 분간을 못한다는 내용이다. 이런 내용의 시를 놓고 순장바둑의 효시로 몰고 가는 것은 추론이 너무 심하다 하겠다.

◀소설가이자 바둑역사학자로 그간 우리가 몰랐던, 잃어버린 조선시대 바둑사를 발굴하는 작업을 외로이 벌이고 있는 이청 씨. 이씨의 고군분투로 바둑사의 공백기로 인식되었던 조선시대가 실은 최고의 바둑황금기였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공씨는 다시 절정고수와 만나 뜨거운 대국을 한다.

- 한번 생각하고 두번 생각하고 천번 만번 생각해도 죽은 말은 살릴 수 없다. 한번 죽은 말은 아승지겁을 생각해도 겐지즈 강의 모래알 수만큼 생각해도 죽은 돌은 죽은 것이다. 아, 죽은 돌은 살릴 수 없고 승패는 되돌릴 수 없다. 바둑에 모든 돈을 걸었던 투전군들도 되돌릴 수 없는 승패에 광분을 한다.
(一想二想 至干千萬想 一死碁卽不生也 阿僧祗想 恒河沙想 死則死也 死則不可生數 瀛輸不復不可道理 與人投錢 孤注者 不反是約巴而狂忿焉) -선진일사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 중의 하나다. 반상에서 두 눈을 내지 못하고 연결로(路)까지 차단당한 말은 아무리 큰 대마라 해도 죽는 것이 바둑이다. 많은 돈을 걸고 두는 바둑에서 함몰직전의 대마를 둘러싼 대국장의 모습이 드라마틱하다.
고주(孤注)라는 말은 올인을 말한다. 도박판에서 마지막 베팅으로 모든 것을 다 건다는 뜻이다. 흥망성세가 단 한번의 바둑에 걸려 있는 것이다. 도박판 용어 중에 제등(提燈)이란 말이 있다. 일본 고소설 '도물어(賭物語)'에 나오는 말로 도박판에서 살아나오는 방법이란 뜻이다.

선진일사의 연구자들 중 선진일사를 중국 고소설로 분류하는 학자가 있다. 선진일사와 비슷한 내용의 군담소설류와 비슷한 내용 때문인듯 하다.  선진일사이 여러 이본이 조금씩 내용이 다른점은 연구가 필요하기도 하다. 필자가 읽은 독후감은  조선인의 작품이 맞다고 본다.  바둑고수를 지칭하는 선기(仙碁)는 중국 일본의 자료에 없는 조선식 용어다. 바둑을 전혀 모르는 연구자들의 미스(?)라고 본다.

선진일사 외에도 여러 편의 고소설 속의 바둑담이 있다. 언젠가 그런 바둑담들이 간추려져 바둑문화 컨텐츠로 부활하기를 바라면서  '아득한 날들' 정도로 번역되는 바둑 고소설 선진일사를 연재해 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