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바둑의 고수를 만난 지남규는 야통도 마다치 않고 바둑을 두다 하루를 쉰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윤과 마주앉아 바둑을 둔다. 승패의 결과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으나 지남규가 윤에게서 바둑을 잘 두려면 '사활'에 강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의 기력의 차이는 이미 판명이 난 듯하다. 지남규는 사활을 힐능(詰能)이라 쓰고 있다.

지남규의 생업인 상점 영업이 극도로 부진하다. 수익이 거의 없는 날의 연속이다. 담배를 한꺼번에 다량 구입한 이유도 그런 영향일까.



10월20일. 비.
종일 쉬었다. 근래 상정 장사가 부진하다. 수익이 거의 없다. 담배를 열냥쯤 구입했다.
(雨 終日休 近來店利不盡 收益不特別也 南草十兩買)

10월21일. 맑음.
윤이 말하기를  바둑의 왕도는 사활이다. 사활이 강하면 일급수가 된다. 사활이 자신있는 사람은 바둑을 둘 때 수순이 불안하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다. 평상심을 유지하고 대국을 하면 승리는 뒤를 따라온다. 사활은 여러 종류의 기보가 있다.
(晴 尹曰 善碁之法 詰能也 詰能手能難 是一手也 死活通之 對局 先後手莫不安定 平心觀應圍碁而勝得自然也 詰能多數碁譜也)


일본 발행판 사활집을 보면 '힐기(詰碁)'라는 용어를 쓴다. 생소한 한자와 발음도 어려운 단어로 '묻다 따지다 꾸짖다'는 의미로 사활을 지칭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리 쉬운 말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묘수풀이를 한자로 바꾸면 묘수해의(妙手解義)  묘수석의(妙手釋義) 정도라 하겠는데 '현현기경'에 바둑의 용어를 해설하는 '삼십이석의(三十二釋義)'라는 말도 보이지만, '힐기'를 운운한 것은 조금 의문이 든다.  지남규 앞에 나타난 고수 윤은 바둑을 잘 두려면 사활에 능해야 한다 말한다. 사활이 강하면 상대가 누구든 자신있게 싸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바둑의 기력과 문화 양쪽이 모두 약하지만 특히 보잘것 없는 기력 탓으로 반상의 일, 다시 말해 바둑 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할 처지가 아니었다. 요즘 가까운 곳에 '일급'들의 모임인 '원석회'가 있어 반상의 일을 자문하곤 한다. 그들 모두가 사활이 강하지 않고는 절대 일급이 될 수 없다 말했다. 윤의 말을 인정하는 것이겠다.

고대의 바둑은 사활 위주로 발전을 해 왔다. 포석과 끝내기 등은 현대의 바둑에 턱없이 뒤떨어지지만 적어도 사활만큼은 전혀 뒤지지 않는다. 현현기경, 관자보, 기경중묘 등을 능가할만한 현대의 사활집이 손에 꼽을 정도이고 보면 고대바둑의 기력도 간단치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원석회 멤버 중의 한분인 박성균사범은 한지로 사활집을 만들고 싶어 했다. 이미 두 종의 한지 바둑책을 기획출판한 경력도 있기에 기대가 된다. 필자에 제목을 주문하기에 '위기응골도(圍碁應鶻圖)'는 어떠냐 답하자 두말 없이 찬동을 한다. '위기응골도'는 이미 5백년전 세조임금께서 출판하셨던 바둑사활집이다.

역사는 이렇게 반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