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미행(微行) 

지금의 광진교가 놓인 광장동 남쪽을 광나루(廣津址)라 부른다. 뱃길로는 멀리 춘천을 비롯해 충주와 연결되고 강을 건너면 경기도 광주에 닿는다 하여 이름이 광나루다. ‘광진(廣津)’이란 이름은 광나루의 한자 표기인데 나루터가 번성할 당시 한용운 선생은 이곳 풍경을 노래했다.

술 싣고 계집 싣고 돋 가득 바람 싣고

물 거슬러 노질하여 가고 갈 줄 알았더니

산 돌고 물 굽은 곳에 다시 들쳐 오더라

이러한 시를 보면 당시의 정경이 눈에 선히 들어온다. 근처에 광장동과 중곡동에 걸친 아차산성이 버티고 있을 때엔 이곳이 강북 제일의 요새지였음은 흘러간 역사가 증명함은 두 말할 나위 없다. 고구려 장수왕의 병력에 백제가 함락된 후 광진교 일대가 쓸쓸한 전설 한 토막을 보듬게 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여름의 한 자락이 넘어가고 아침저녁으로 소슬바람이 불어와 들판에 널린 가을 곡식을 간질이며 춤을 추던 입추의 오후. 석 삼 년이나 흉년이 든 예전과는 달리 요근래 각 지방마다 풍년가 소리 드높은 게 벌써 다섯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젠 도심에 사는 사람이나 광나루 같은 포구(浦口)에 사는 사람도 술 한 잔 사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풍물이었다. 그래서인지 오늘도 포구 가까이 이곳 선술집에 모인 사람들은 술과 계집 얘기 빼놓으면 화제가 별로 시들한 형편이었다. 염소수염의 사내가 먼저 운을 열었다.

“중국에 여황제가 있었다네. 그 여황제가 잘 마시는 술이 무후주(武后酒)인데 며칠 전 만난 어느 선비님은 거 뭐라더라 <동경몽화록>이란 책자를 들먹이며 아주 괜찮은 술이 있다는 거야. 그게 뭐냐 물었더니 바로 뻔데기술이라지 뭔가.”

“뻔데기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아니야, 지금 궁에서는 나랏님이 그런 술을 마신다는데, 그 선비 말에 의하면 뻔데기를 찐 후 볕에 말린 후 술로 걸러내는 걸 서너 번 되풀이 하는 모양이야. 쓴 맛을 지울 수 있기 때문이라네.”

사내의 얘긴 자못 허황스러웠다. 이렇게 하여 만든 술은 사내들 정력 강정에만 뛰어나는 게 아니고 여인네의 부족한 음기를 채우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힘을 주었다. 털북숭이 사내가 막걸리 한잔을 단숨에 들이켠 후 주사(酒邪)를 풀어놓았다.

“왕실에서야 고귀한 분이 계시니 좋은 술을 만들어 드시겠지만 우리같은 서민들은 박달주(檀木酒)를 별식으로 먹지. 말이야 바로 하자면 우리 처지에 술을 마실 수 있는 것도 황송할 노릇이니 그것이 좋고 나쁜 것을 가릴 수 있겠는가.”

사내는 자신 있게 박달주 만드는 법을 소개했다. 보통은 초겨울에 만드는 것을 최상품으로 치는데 만드는 방법이 어렵지 않았다. 초겨울이 오면 아름드리 박달나무 등을 파내 그곳에  두 되 가량의 물을 부어 두면 아무리 초겨울이라도 햇살만 있으면 파릇한 새순이 돋아난다.

사흘쯤 지나 술을 부으면 돋아난 싹은 말라죽고 그 대신 박달나무 진액과 술기가 엉켜 거무스름한 진액이 고인다. 퍼낸 술을 체질에 맞게 한약을 넣어 연한 불을 가하면 달착지근한 단목주를 얻을 수 있다.

이 술은 일명 십리주(十里酒)라는 애칭이 있다. 십 리 길을 가는 동안 한잔만 마셔도 취기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장담처럼 사내의 체력을 키우는 최상의 술이라고 침을 튀겼다. 술이 깰 쯤이면 미리 짜놓은 갈근즙(칡즙) 한 홉을 마시면 다시 취기가 살아난다는 도가에서 내려온 비방도 곁들어 주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누군가의 고함소리에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사람이 죽었다아! 은장이 최영감이 죽었다아! 나루터 옆 접시물 도는 곳에서 시체가 발견됐다아!”

첫째 날 - 궁원에서 죽은 이내관의 사체

은장이 노인이 물에 빠진 익사체로 발견된 것보다 하루 전, 경위원에 뜻밖의 보고가 접수되었다. 경복궁 안 자경전(慈慶殿)에서 일하는 이공수(李供守) 내관이 목을 매 자살한 사건이었다. 간밤에 대비전에 들러 궁 안의 이런 저런 일을 들려주던 이내관이 웃는 얼굴로 돌아간 지 몇 시각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아침나절 발견되었다.

동관(東館)의 내시부 소속이니 나인(內人)이나 내명부 소속의 여인들을 관리하는 부서였다. 어릴 때 궁에 들어와 쉰이 넘은 지금에 이르도록 궁에 머물며 친분관계가 원만하도록 주위를 잘 다스렸다. 특히 이공수를 ‘향랑공(響廊公)’이란 애칭으로 불렀던 것은 그에게 남다른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로부터 궁 안에는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오가므로 각자가 지닌 일기(一技;한 가지 재주)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닭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로 모시는 상전을 위기에서 탈출시킨 ‘계명구도(鷄鳴狗盜)’의 전설로 이름을 날린 식객들의 예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공수는 사내의 거시기가 없었지만 청력(聽力)은 대단했다.  궁에는 일반인들이 볼 수 없는 음양서가 있기 마련으로 여인을 취택할 때는 이에 근거함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러한 책 가운데 가장 앞자리에 설 수 있는 게 <삼봉단결(三峰丹訣)>인데 이것은 ‘여인’을 하나의 도구(鼎;솥)로 보고, 사내(제왕)의 몸에 이로움을 줄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를 헤아리게 했다.

잘 익은 복숭아를 접시에 담아 상납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이공수의 본색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가 만만치 않다는 것은 다음의 문제점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제왕은, 갓 잡아 올린 비린내 나는 생선을 좋아하여 모든 게 순전한 그 모습인 여인을 좋아하는가 하면, 그런 쪽은 흥미 없고 방사의 경험사를 읊조릴 줄 아는 쪽을 좋아하는가 하면, 어정쩡하지만 그 중간쯤을 좋아하는 제왕도 있었다.

그렇다보니 여인을 복숭아라는 과일로 볼 때, 햇볕이 잘 들어 오동통하게 여물어 베어물 때마다 들어찬 단내를 느낄 수 있거나, 아니면 때를 좀 지나 속이 흐물흐물해 나이든 노인네가 드시기 좋게 됐거나, 또는 그 중간쯤이거나 그 양태는 여러 가지 일수밖에 없다.

지금의 제왕이 어떤 종류의 음식을 먹어야 도원경(桃源境)에 이를 수 있는가를 헤아리는 힘이 동관 소속의 내관에겐 중요한 과제였다.

이공수가 나인을 뽑아 상감에게 천침(薦枕;잠자리 시중) 시킬 때마다 ‘도원경에 이르러야 할 텐데’하자 그 말을 들은 내관들은 실소를 깨물었다. 자신들이 아는 바 ‘도원경’은 도연명의 도화원시병기(桃花源詩並記)에 나오는 얘기였다.

한 어부가 작은 배를 타고 가다 우연히 발견한 복숭아꽃이 만발한 평화롭고 아름다운 이상향의 세계였다. 나이를 먹어도 죽지 않는 곳, 어부는 그곳을 표시해놓고 나중에 찾아가려 했지만 병으로 쓰러져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동관의 내관 이공수는 이 전설이 마뜩치 않다는 것이다. 수많은 과일 중에 하필이면 복숭아꽃이 만발한 동산이냐는 것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도원경은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桃)는 복숭아 도이고 원(源)은 물이 흐르는 둥근 구멍(原=丸)이라는 의미고 경(境)은 그런 지경이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뜻은 ‘도’가 여인네의 엉덩이를 상형화한 것이니, 남자와 여자와 이층을 쌓고 거시기한 짓거리를 하는 모습이 도원경에 이르는 길이라고 해설을 늘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