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바둑을 접했을 땐 고통의 시간이었다.

고딩 1학년땐가.?

친구에게(당시 기원 5급) 9점으로 배웠는데 기초 사활만 배우고 뒀다

짜장면 콜라 술 엄청 들어가면서 바둑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고

오기로 책을 들게 되었다.

3년 만에 다시 만난 그 친구에게 대뜸 호선을 제안하고 이겼을 때의 쾌감이란.

그것이 이런저런 이유와 함께 기원에서 5년간 생활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기원에서 죽돌이 치는 사람들 모두 능력은 있는데 사회가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

기력은 차이가 나도 설레바리는 모두 호각이었다.

동네 유지들도 많았지만. 나이가 젊고 기력이 셀수록 사회성은 떨어졌다.

당시 기원 약 3급 강 4급을 인정받았는데

삐삐도 없던 아나로그 시절에 기원에 여자 친구가 찾아오는 건 나뿐이었다

모두 따로 만나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내가 알기론 연애도 젬병들이었다.

오직 바둑과 노름과 술이 전부인 사람들.

먹고 즐기는데엔 신선들인 셈이다

물론 소수의 애기가들이 있었지만 샅바 쌈이 강하거나 철저히 관리하거나

혹 운이 좋은 사람이 그날의 영웅이었다.

얼굴들도 나름 괜찮았고 인터넷이 없어도 네비게이션이 없어도 만물박사들

모르는 게 없는 사람들로 당시 어린 나로서는 너무 재미있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나무꾼이었던 셈이다.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면서 기원에 대한 환상도 깨뜨리고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찾은 바둑.

오로에서의 20여 년을 돌아보며 바둑으로 보낸 젊은 시절을 후회하다가

요즘은 문득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저 그렇게 쌓은 세월의 담벼락 너머로 아스라이 펼쳐진 시간의 전원들.

애써 가꾸지 않았지만 나름의 운치와 향기가 있고 먼 정자나무 아래 사람들이 보인다

마주 앉은 두 사람과 서서 바라보는 사람들 몇몇. 눈에 익은 모습이 바둑을 두나보다.

젊은 시절의 안타까움이 감사함으로 느껴지는 지금은 나는 먹지 않을 것 같은

세월의 중력에 이리저리 찌들어진 몸과 마음 한정된 여건에서도

무한의 시간을 가져다준 바둑이 있었다.

내가 그때 바둑을 배우지 않았다면 지금 여기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과

격이 없이 수담을 나눌 수 있었을까.

지금 시간이 된다 한들 바둑을 배워 이 느낌을 얻을 수 있을까.

지나간 것은 이미 지나간 것이고 지금과 어쩌면 인내해준 여태의 내일이 온다면

애써 보여주려 하지 않아도 만날 수 있는 미지의 친구들이 즐비하다.

어쩌면 구태 할지도 모르지만 약간의 지적이 멋과

무엇보다도 치매 예방에 으뜸이라는 약간의 의학적 근거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일상의 고통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무아의 공간.

그 어떤 물리적 화학적 부작용이 없는 시간을 자의로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바둑의 매력이 아닐까.

다시 그 시절로 간다면 조치훈 조훈현 영웅들과 이창호 신동

그리고 서봉수의 투혼에 열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감사하냐고.?

이 나이에 이만한 비즈니스 여건과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

그 시간들을 좀 더 활용하고 바둑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으면 한다.

지금이나 조금 더 나은 기력으로. ^^

일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일을 하고 일을 할 수 없는 작은 시간도 바둑을 두고

허락한다면 술도 한 잔 곁드리면서 두다가 쓰러지지 말고 잠자리에서 복기하며 

여운을 즐기다 생을 마감했으면 좋겠다.

말없이 함께해준 바둑에게 늘 감사하며 너의 친구로서 너를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휴식 같은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