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1967년 8월 발간한 창간호(왼쪽)와 50주년 기념호인 2017년 8월호(오른쪽) 표지. |
한국기원이 발행하는 [월간바둑]이 2017년 8월호로 창간 50년을 맞았다. 1967년 8월 '기계(棋界)'란 제호로 첫 호를 낸 뒤(2년 뒤인 69년 8월호부터 순우리말 '바둑'으로 제호 변경) 2017년 7월호로 통권 600호 발행을 거쳐 8월호에는 창간 50주년 기념호를 발간했다. 수많은 바둑잡지가 명멸했지만 지금까지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는 정통 바둑 전문지로서 한국바둑계는 물론이거니와 우리나라 잡지사(史)를 통틀어도 단 한번 결호(缺號)나 합병호 없이 반세기를 이어온 것은-그것도 유가(有價) 전문지로서-첫손가락에 꼽을 만한 행보다.
필자는 부족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한국바둑이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때를 잘 만난 덕에 [월간바둑] 최장수(10년) 편집장을 지낸 바 있기에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다. 매달 잡지를 만들면서 힘들고 재미난 일도 많았지만 아찔했던 순간도 있었다. [월간바둑] 창간 50년을 맞아 기억에 남은 필화사건 몇 개를 소개한다.
“모름지기 사내란 자나깨나 ‘세 끝’을 조심해야 하느니라. 첫째는 혀끝, 둘째는 손끝, 그리고 배꼽 아래 거시기 끝. 자고로 이 세가지 끝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는 법이니라.”
선친(先親)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말씀이다.
혀끝은 설화(舌禍)를 경고한 것이고, 손끝은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뜻이고, 거시기 끝은 씨를 아무데나 함부로 뿌려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이렷다.
이 가운데 손끝은 꼭 절도만을 얘기하는 게 아님을 글장이들은 잘 안다. 손끝을 놀려 글밥을 먹는 글장이들은 예기치 않게 불쑥 찾아드는 필화(筆禍)의 재난을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팔자인 고로…. ^^;; 이번엔 필자가 [월간바둑] 밥을 먹으며 보고 듣고 겪었던 바둑계 필화사건에 얽힌 얘기보따리를 풀어볼까 한다.
김명애라는 여가수가 흐드러지게 부르는 ‘도로남’이라는 트로트 유행가에 이런 가사가 있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도로 남이 되는 장난 같은 인생사…. 점 하나에 울고 웃는다…, 돈이라는 글자에 받침 하나 바꾸면 돌이 되어버리는 인생사….’
점 하나에 울고 웃는다는 글귀를 보니 문득 기자 초년병 때 선배가 교정(校正)의 중요성에 대해 일장 훈시를 늘어놓으며 들려줬던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이야기가 하나 떠오른다.
이승만 대통령시절 이야기인데, 한 신문사가 ‘대통령(大統領)’의 대(大) 자에 그만 실수로 점 하나를 더 찍어 견(犬) 자로 인쇄해버렸다. 일이 안되려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이걸 끝끝내 교정 보지 못하고 발행되어 버렸으니 어찌되었겠는가. 당시만 해도 대통령은 국부(國父)로 숭배되던 시절. 나라의 아버지를 일개 동네 똥개로 표현해 대문짝만하게 대자보를 붙인 꼴이 되었으니…. 결국 그 신문사는 하루아침에 문을 닫아야 했다고 한다.
▲ 장재식 한국기원 이사장(왼쪽)은 [월간바둑] 기자들에게 존함만으로도 경계근무를 서게 만든 존재였다. ^^ 사진은 1989년 1회 응씨배를 제패하고 귀국하는 조훈현 9단을 공항에서 마중할 때의 모습.
그 이름 잊지 못할 ‘장재식’ 이사장
바둑도 그렇듯 둘 때는 눈씻고 찾아보려 해도 안 보이던 수가 희한하게도 판이 끝나고 복기(復棋)할 때는 잘도 보이는 것처럼 잡지밥을 먹다보면 이와 비슷한 경우를 많이 겪는다. 보통 원고교정만 해도 두세 차례에 편집교정도 서너 차례, 그리고 다시 인쇄교정까지 거쳐 인쇄물이 나오는데 이 이잡듯 뒤지는 과정을 거치는 데도 불구하고 오자(誤字) 탈자(脫字)는 신기하게도 버젓이 통과하곤 한다. 장수에게 승패는 병가(兵家)의 상사(常事)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잡지를 제작하는 사람들도 “오탈자가 없는 잡지는 잡지가 아니다”란 말로 위안을 삼고 있다.
필자가 편집장에 갓 임명되었을 때, 당시 한국기원 이사장은 민주당 국회의원이자 DJ정권에서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냈던 장재식 씨였다. 바둑이 아주 센 고수(아마7단)였고 정치인이기에 앞서 바둑계에 직접 뛰어들어 바둑발전에 애쓴 바둑인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조훈현 9단을 비롯한 여러 프로기사들의 주례를 섰으며 국회로 진출한 뒤에도 국회기우회를 만드는 등 바둑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그런데 미안하고 죄송한 표현이지만 이 분의 함자가 편집부 기자들에겐 늘 요주의 대상이었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원고는 원고지에 쓰는 시대였다. 이걸 오퍼레이터가 일일이 손으로 사진식자, 일명 사식(寫植)으로 쳐 편집했다. 지금이야 컴퓨터로 다 처리하지만.
장재식 의원이 그때 한국기원 이사장이다 보니 자연 바둑지 기사에 오르내릴 일이 적지 않았다. 문제는 이 분의 가운데 이름 ‘재’자를 오퍼레이터들이 가끔 ‘래’자로 오식해 친다는 것이었다. ‘재’자를 휘갈겨 쓴 원고가 아니더라도 사람에 따라 ‘ㅈ’이 흡사 ‘ㄹ’처럼 보이는 필체도 적지 않다.
장래식-.
이렇게 오타한 이름 석자를 발음해 보시라.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지. ㅡㅡ;;
그렇게 눈에 쌍심지를 켜고 교정을 보는데도 오탈자는 미꾸라지 같기만 하다. 한번은 인쇄기계가 돌아가는 중간에 이를 발견하고는 가슴을 쓸어내린 일도 있다. 007 위기일발이었다. 비록 그때까지 찍었던 인쇄물을 폐기하는 아픔을 겪긴 했지만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자기가 근무하는 바둑협회 수장(首長) 이름을 북망산천(?)이 연상되는 이름으로 버젓이 내놓고도 무사하길 바라는 간 큰 편집장은 없을 터이다. 물론 문리가 터진 세상이라 이승만시절 같기야 할까마는 목이 반쯤은 날아갔다 도로 붙은 순간이었다.
▲ 일본 기성 타이틀을 딴 뒤 고국을 방문한 조치훈 9단을 환대하고 있는 서정각 한국기원 이사장. 조치훈 기성이 1985년 한국기원에서 기자회견을 하기 직전 함께 포즈를 취했다.
편집장의 수난시대
지금이야 바둑TV다 인터넷바둑사이트다 다양한 바둑매체가 등장해 각광을 받고 있지만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활자매체인 [월간바둑]지는 바둑계에 유일하다시피한 언로이자 정보통로였다. 유가지이면서도 한국바둑협회인 한국기원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성격을 띤 잡지이다 보니 아무래도 편집장 자리는 알게 모르게 정치적인(?) 바람을 많이 타는 자리였다. 역대 편집장 평균 수명이 3년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전혀 무관한 얘기만은 아닐 것이다.
이 가운데 78년 9대 편집장을 역임한 양동환 씨는 대놓고 대담한 시도를 했다가 단명에 그친 편집장이었다. 기관지인 월간｢바둑｣지에 한국기원의 1년치 예산 대차대조표를 낱낱이 실어버린 것. ‘프로는 기록으로 말한다’고 하는 요즘 세상에도 한국기원 연감에는 전 기사의 1년 성적표가 총 전적(승패)만 덩그라니 싣는 모양새로 살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있는 실정인데 25년 전에, 그것도 한번도 외부에 공개된 적이 없는 한국기원의 살림살이를 까발려버렸으니 어찌 발칵 뒤집히지 않았으랴.
그가 왜 그런 결단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살림살이를 공개했을 때 만만치 않은 파장이 일어나리란 것은 삼척동자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단순한 치기로 내린 결정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하다. 뭔가 개혁적인 노림과 메시지를 담은 ‘옥쇄를 각오한 후절수’가 아니었겠느냐고 미루어 짐작해 볼 따름이다. 지금 고인이 된 양동환 씨는 이후 바둑평론가로 활동하며 많은 바둑책을 썼으며 명지대학교 바둑학과에 출강, 후학들에게 바둑문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양동환 씨처럼 목이 잘리지는 않았지만 ‘뼈아픈’ 징계를 먹은 또 한 분의 선배 편집장이 생각난다. 조선일보에 명 관전기로 심금을 울리던 바둑평론가 이광구 씨(2015년 작고). 이씨는 83년 12대 편집장에 오른 뒤 89년 초 그만 둘 때까지 만 7년이나 장수(?)했던 분이었다.
그가 편집장 완장을 찬 그해 83년 12월말, 재단법인 한국기원 9대 이사장으로 서정각 씨가 취임했다. 새 이사장이 오면 인터뷰 기사는 편집장의 몫. 이광구 편집장은 84년 1월호에 ‘신임 이사장에게 듣는다’란 멋진 인터뷰 기사를 썼다. 바둑계에 소문난 명필이라 역시 인상적인 기사였다. 그런데 다 좋았는데 마지막 한 문장이 그만 신임 이사장의 심기를 건드렸다.
‘1시간 반 만에 우리(사진촬영을 위해 이영욱 기자와 함께 갔다)는 쌀쌀한 거리로 쫓겨났다. 점심 때였는데도.’
인터뷰를 하던 시간이 점심 무렵이었는데도 빈말이나마 밥 먹고 가라는 말이 없어 섭섭했던가? 아니면 개인적으로 서정각 이사장의 취임이 못 마땅해 그런 식으로 우회해 표현한 것인지, 그도저도 아니면 글을 인상적으로 끝맺으려고 기교를 좀 부린다는 게 탈이 나버리고 말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언젠가 슬며시 한번 물어봤으나 싱긋 웃기만 했다. 하여간 뭔가 심중에 담은 한마디는 어떤 식으로든 하고야 마는 글장이들의 오기 같은 게 두드러기처럼 느껴지는 대목이다.
고의였든 실수였든 이 한 문장으로 인해 그는 직급이 일계급 강등 당하는 징계를 받았고 ‘찍쇠(사진기자)’ 역할로 동행 취재했던 이영욱 씨도 덩달아 괘씸죄에 걸려 똑같은 징계를 먹었다. 이영욱 씨는 후일 이광구 씨의 뒤를 이어 13대 편집장에 오르지만 당시 그로선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것처럼 억울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gif){kind=log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