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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정 우리집은 어디인가? 10년간 바둑집시 같은 유랑생활을 마감하고 한국에 정착해 12년 동안 바둑을 둔 곳, 한국기원을 배경으로 상하이 고향으로 떠나기 전 기념사진을 남겼다. 바둑을 둘 수 있는 곳, 그곳이 우리집이다,라고 이 부부는 말한다. |
‘아무리 지옥 같은 곳이라도 바둑을 둘 수 있으면 내게는 천국이고, 아무리 천국 같은 곳이라도 바둑을 둘 수 없으면 내게는 지옥이다.’
루이-장 주주 부부의 자서전 ‘우리 집은 어디인가?’를 읽다 이 문장 앞에서 한동안 책을 덮어야만 했다. 지금껏, 그 어떤 바둑책을 보면서도 이보다 바둑을 사랑하는 절절한 대목을 마주한 적이 없다. 바닥까지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표현. 이 표현 앞에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부부가 한국에 정착하고 상하이로 떠날 때까지 10년간 어찌하여 보금자리를 줄곧 한국기원 근처를 고집해왔는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한국기원 기사실을 출근하다시피 공부했는지, 바둑이 있는 곳이면 장소불문, 어딘들 한달음에 달려갔는지 그 답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다. 바둑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이 말.
교황이 비행기 트랩을 내린 뒤 제일 먼저 방문국의 땅에 성스런 입맞춤을 하듯 이들 부부가 한국에 발을 딛으며 터뜨린 제일성이 “한국은 은혜의 나라”라고 감읍하며 하염없이 감사해 한 이 말 역시 1%의 수사(修辭)도 섞이지 않은 것임을 절절이 느끼게 한다.
"우리의 결혼은 3번기"
루이-장 주주 부부가 “우리의 결혼은 3번기”라 표현한 것처럼, 이들의 러브스토리는 그토록 바둑을 사랑하면서도 둘 수 없었던 지옥의 나날처럼 사랑하면서도 만날 수 없었던 지옥 같은 기간을 거쳤기에 그만큼 극적(劇的)이다.
중국에서 사랑의 잎을 틔운 1막은 1990년 각자 미국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막을 내렸다.
2막은 일본과 미국에서 서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전화와 편지로 애절하게 주고받은 사연. 둘 다 낯선 이국살이가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여자의 몸으로, 중국기원의 노골적인 방해로 공식 기사생활을 접어야 했던 루이 9단의 일본생활이 장 주주의 미국생활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힘들었다. 이때 연인 장 주주는 루이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일본생활에 낙망한 루이는 여러번 연인 장 주주가 있는 미국으로 가려고 비자를 신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볼 수만 있다면 원이 없었다. 장 주주 쪽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초청장을 보내도 봤으나 허사였다. 미국 대사관이 비자를 내주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미국에 불법체류할 가능성이 많은 사람”으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캐나다, 러시아 비자까지 시도해 봤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자유국가에서 살면서 자유롭게 만날 수 없는 처지…, 로미오와 줄리엣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3막은 더 애절하다. 만날 순 없었지만, 1991년 8월 루이는 일본 후나바시 구청에서 혼자 결혼수속을 밟았다. 일본 법률은 결혼수속을 밟을 때 두 사람이 다 있지 않아도 된다는 주위의 조언에 따라 먼저 법적 부부로 신고했다. 그러나 중국법률은 두 사람이 다 있어야 인정했으므로 루이는 일본법률에 따르면 기혼, 중국법률에 따르면 미혼인 상태로 1년을 지냈다. 그러다 1992년 7월4일 장 주주가 일본에서 열리는 2회 응씨(應氏)배에 참가차 나리타 공항에 내렸고, 이 반상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꼭 2년 만에 재회하게 된다.
그리고 나흘 뒤인 7월8일, 두 사람은 나란히 중국대사관에 가 결혼수속을 밟았다. 루이-장 주주 부부는 이 날을 정식 결혼기념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결혼식도 없는 결혼이었다. 장 주주가 일본에 체류를 허락받은 기간은 불과 2주뿐이었고, 그나마 루이도 큰 세계대회(응씨배 출전)를 앞둔 선수였기에 따로 결혼식을 올릴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긴 이별.
장 주주가 미국 영주권을 받은 1993년 끄트머리까지 두 사람은 견우와 직녀처럼 칠월칠석을 기다리며 또 그렇게 떨어져 살아야 했다. 영주권을 받은 장 주주는 한달음에 일본으로 달려왔고 그 해 마지막 날인 12월31일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신접살림을 차리고 1995년까지 일본에서 해로했다. 이 시기가 3막이다.
▲ 2007년 2월, 한국기원 근처 왕십리에 새로 집을 장만한 장 주주-루이 부부가 바둑관계자들을 저녁식사에 초청했을 때의 모습. 환한 웃음으로 반겨주는 루이 9단과 서툰 한국말로 술과 음식을 연신 권하는 장 주주 9단의 모습은 영락없는 이웃집 부부의 모습이었다. 행복이 넘쳐나는.
10년의 바둑집시생활...바둑을 둘 수 있는 곳, 그곳이 우리집
그러나 여전히 일본에서 공식 기사활동을 할 수 없었던 이들 부부는 1996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프로바둑협회를 축으로 한 프로생활을 한다. 그러나 말이 프로지 당시의 미국의 바둑은 동양3국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수준이어서 프로활동이라기보다는 보급활동에 치우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랬으니….
중국을 등진 지 10여년. 10년이면 강산도 변하고 장고도 10년을 치면 제 소리를 낸다고 하거늘 그 10년 세월을, 하물며 바둑의 승부사가 승부다운 승부를 하지 못한 채 집시처럼 방랑하며 허송했으니 어찌 승부바둑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 절절하지 않으리오.
“아무리 지옥 같은 곳이라도 바둑을 둘 수 있으면 내게는 천국이고, 아무리 천국 같은 곳이라도 바둑을 둘 수 없으면 내게는 지옥이다.”
이들은 말한다. “바둑은 우리의 놀이이자 신성한 노동이며, 삶이자 휴식처”라고.
또 말한다. “바둑을 둘 수 있는 곳, 그곳이 우리 집이다”라고.
1999년 4월, 차민수 4단의 도움으로 한국기원 객원기사 자격을 얻어 마침내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던 바둑집시생활을 청산하고 그토록 갈망하던 공식 기사생활을 10여년 만에 다시 시작했다. 그것도 세계최강 한국무대에서. 바둑을 둘 수 있는 그들의 집을 비로소 찾은 것이다.
이러할제, 이 부부에게 바둑은 안식처이자 종교일 수밖에 없다. 1999년 봄(4월), 한국기원 객원기사 자격으로 한국에 안착해(2년 뒤 65회 한국기원 상임이사회의 결정으로 정식 소속기사가 됨) 2011년 겨울(12월) 고향 상하이에서 교육사업을 펼치고자 떠날 때까지 12년 8개월. 이 기간 남편 장 주주는 2003년 4회 맥심배 결승에서 아내 루이와 세계 최초의 부부 결승대결을 펼쳐 대단한 화제를 모았고, 이때 부부싸움(?)에서 2-0으로 이기며 한국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컵을 들어올린 바 있다. 2011년 12월말 상하이로 떠났지만 장 주주는 틈틈이 한국 프로기전에 1년 가량 더 출전했고, 두 사람이 공식적으로 한국기원 소속 기사생활을 마감한 기록은 2012년 12월31일자이다. 이때까지 남편 장 주주가 올린 공식전적은 411전 220승 1무 190패.
평생 타이틀 한번 따보지 못한 채 스러지는 기사가 대다수인데 이방인으로서 우승까지 했으니 남편의 한국 기사생활을 대단한 성공이랄 순 없어도 실패랄 수 없다. 이에 비해 아내 루이의 한국활동은 필설로 전하기조차 버거울 정도다. ‘바둑여제(女帝)’란 칭송이 달리 붙었겠는가. 여자기전을 휩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남녀 통합기전인 국수전에서 이창호, 조훈현을 연파하며 세계바둑사상 최초로 여자기사가 타이틀을 차지하는 ‘전무후무’할 역사(歷史)를 역사(役事)했다.
▲ 한국에서 부부가 벌인 공식대국은 2002년 4회 맥심배 결승전 말고도 한번 더 있었다. 7년여 뒤인 2009년 6월30일, 3기 지지옥션배 여류 대 시니어 연승대항전 본선14국에서 마주쳐 이때는 아내가 163수 끝, 흑불계로 이겼다. (사진은 바둑TV 대기실에서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선전을 다짐하는 부부) 이때 사이버오로의 생중계 대화창에 재미있는 멘트들이 쏟아졌다.
다정사랑 [4단*]: 이 판 끝날 때 루이가 지믄 부부쌈이야 ...
여호수아96 [5급*]: 이 판을 져야 아침에 반찬이 잘나옵니다.
?솔리타 [9급*]: 감히 신랑말을 잡을라하네
언제부터 [1급*]: 부부쌈하는 건 아니겠지요?
한국여자바둑을 키운 ‘바둑여제’ 루이
1999년 한국에 정착한 이후 그 해 7월 여류국수전을 차지한 것을 시작으로 2011년까지 총 29회 우승과 6회의 준우승 성적을 올렸다. 이 가운데 여류국수전에서 통산 8회 우승, 여류명인전에서 7연속 우승하는 등 여자기전에서는 가히 발군이었다. (생애 통산 우승회수는 33회, 준우승 8회 기록. 2017년 7월 현재) 한국 거주기간 거둔 전적은 684전 432승 252패.
일본에서 괄목할만한 신예로 전도유망했던 조훈현이 군복무차 귀국한 뒤 한국에 눌러앉게 된 건 조훈현 개인에게는 큰 아쉬움일 수 있으나, 한국바둑계로 볼 땐 기폭제로 작용했다. 천재 조훈현이 이끈 한국바둑은 적어도 두 점 정도 실력이 늘었다는 게 정설이다. 마라톤 경기에서 선두주자의 역주에 따라 기록이 달라지는 것처럼 모름지기 바둑 승부세계도 일인자의 수준이 전반적인 레벨을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세계 최강의 여자기사’ 루이가 뛰어든 한국여자바둑이 그랬다. ‘어린애 팔목 비트는 싸움밖에 안될 것’이란 우려가 없지 않았으나 나중엔 평가가 달라졌다. 미꾸라지 양식장에 풀어놓은 한 마리 매기 효과랄까. 조훈현이 그랬던 것처럼 루이가 가세한 이후 한국여자바둑의 실력은 몰라보게 성장했다. 이전 중국>일본>한국 순이었던 등수가 일본을 확실히 제치고 중국과 대등한 경쟁을 펼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한국여자바둑은 1975년 1회 여류입단대회를 통해 조영숙과 윤희율을 배출했지만 어디까지나 특별입단 형식으로 뽑은 최초의 여자기사였다. 실력이 남자들에 못미치다 보니 이 뒤로 내처 여자기사를 뽑지 않다가 15년 뒤인 1990년에 와서야 여자들만 별도로 치르는 입단대회를 재개했다. 바둑이 글로벌화했고 한국바둑이 세계최강으로 올라선 시점에 한시바삐 여자바둑을 양성, 균형발전을 꾀할 필요성이 커졌다. 2017년 7월 현재 한국 여자기사 수는 57명으로 늘었다. 3년 전부터는 여자리그도 생겨 인기를 끌고 있다.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첫 세대-조혜연, 박지은 투톱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루이체제에서 단단하게 단련한 덕분이었다. 2003년, 2004년 조혜연은 여류국수전에서 처음으로 루이를 연파하며 ‘루이의 벽’을 넘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박지은도 2008년 원양부동산배에서 루이를 극복하며 한국 최초의 여자 9단에 올랐다. 이들 뒤를 최정이 잇고 있다. 중일에 밀려 변방에 머물렀던 한국여자바둑이 단숨에 일본을 제치고 중국과는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된 것은 루이 한 사람의 등장이 바꿔놓은 판도다. 일본체류 6년 내내 루이를 경원(敬遠)한 일본 여자바둑과 대비되는 결과다.
▲ 좋은 쇠는 담금질할수록 강해진다. 조혜연과 더불어 '타도 루이' 선봉에 선 박지은(오른쪽). 2001년 2회 흥창배 결승1국 장면이다.
▲ 루이의 장벽을 처음으로 넘은 조혜연(왼쪽). 사진은 2000년 7기 여류국수전 결승3국 장면. 이때는 제대로 힘을 못쓴 채 졌지만 3년 뒤 다시 도전했을 때는 2-0으로 이겨 마침내 루이에게서 타이틀을 빼앗은 첫 여자기사로 기록되었다.
장 주주-루이 부부는 한국을 떠나기 직전 월간바둑과의 인터뷰(2012년 1월호)에서 애틋한 작별인사를 남겼다.
“부족한 저희 부부를 따뜻하게 맞아준 한국바둑팬과 기사들 모두 너무 감사합니다. 만약 한국에서 저희를 받아주지 않았더라면 12년 동안의 행복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불어 귀향을 허락해준 중국기원에도 사의를 표합니다. 고향에 갈 수 있어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정든 집과 한국을 떠나야한다는 게 슬픔으로 다가옵니다. 중국으로 돌아가더라도 한중교류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한국에서의 행복했던 시간, 잊지 않겠습니다.” <끝>
▲ 12년 한국기원 기사생활을 접고 중국으로 돌아가는 루이 9단이 한국 여자기사들과 2011년 연말 송별연을 가졌다. "한국에 있는 동안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우리 귀여운 여자기사들을 위하여!" 눈시울을 붉히며 루이 9단이 석별의 건배사를 했다.
▲ 바둑판에서는 쫓고 쫓기는 관계였지만 뒤돌아보면 경쟁하는 가운데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선배와 후배 사이, 이런 게 승부세계다. 루이 9단이 후학 박지은 9단에게 가득한 마음 전하듯 잔을 채워주었다.
▲ 장 주주-루이 부부는 한국에서 살던 집을 팔지 않고 갔다. 가끔씩 돌아올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싶은 마음에 그랬다. 한국은 제2의 고향이 되었다. 조혜연 9단은 여전히 최고인 루이 9단을 떠나 보내는 게 무척 아쉽다. "루이 사범님을 보낼 수 없어요. 해야할 승부가 많은데. 루이 사범님께 졌을 때 사실 가르침보다는 아픔이 더 많았어요. 그때마다 기록했던 일기가 이제 책 분량이 됐어요. 중국에 가면 저도 거기 가서 꼭 설욕할래요. 기다려주세요." 강자를 경계는 하되 피하지는 않겠다. 이것이 한국여자기사의 바둑정신이었고, 그랬기에 루이 9단이 빠져나간 자리를 진정 아쉬워들 했다.
"승부의 세계로 돌아오자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기사생활의 꽃을 여기서 피웠으니 톡톡히 한국에 신세를 진 셈이죠. 한국은 제게 집이나 마찬가지예요." 떠나면서 루이 9단은 한국바둑에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며 거듭 고마워했지만 한국바둑도 '철녀'에게 큰빚을 진 셈이니 괜찮다. 고마워요 루이, 사랑해요 한국바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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