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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대회를 보고 싶었다. 일년내내 전국 각지에서 전국적인 규모로 여는 대회가 적지는 않다. 그런 대회에 걸음하면서 매양 느끼는 아쉬움은, 마치 ‘회전문 인사’처럼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거. 만날 보는 얼굴, 도대체 과거 언제부터 봐온 선수인데 여전히 그런 ‘세미 프로급 강자들’을 위한, 이들을 중심으로 무대를 꾸미는 잔치여야만 할까. 상금액수도 적지 않게 책정하다 보니 대회예산이 빠듯할 것이고 자연 더 다채롭고 폭넓은 바둑잔치를 기획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될 터이다.

물론 센 사람들을 위한 대회가 필요하다. 이것은 이것대로 가야할 것이다. 그렇지만 입단대회도 아닌데 대부분의 대회가 오로지 최강 실력자를 골라내겠다는 방식에 쏠려 있다면, 생각해볼 문제다. 상금액수가 커야 전국의 강호들이 대거 걸음할 것이고 그래야만 대회가 빛나고 값어치를 뽑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도 인정한다. 그렇지만 아마추어대회는 신진서, 최정 같이 명성 자자한 선수가 와서 그 이름값에 기대어 홍보효과를 누리려는 대회가 아니다. 예전 마산의 학초배나 부산의 롯데배처럼 지방의 유수기업체가 바둑대회를 열어주던 시절은, 먼 옛날얘기다. 2000년대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지자체들이 지역홍보와 지역민의 생활체육 차원에서 개최하는 대회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 점도 헤아려야 한다.

수십년 전부터 바둑애호가 층을 다변화하고 젊은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도 아마추어대회를 ‘오직 우승자를 가리는 경기’가 아닌 축제 같은 분위기로 바꿀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이어져 왔다. 순위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기량을 즐기며 바둑을 통해 친구를 사귀는 유럽의 바둑콩그레스와 같은 풍토도 그 대안 중 하나였다. 어린이대회를 포함해 우후죽순마냥 많은 대회가 생겼고 이 흐름을 타고 약간 다변화하긴 했다. 그렇지만 순수 애호가, 동호인, 특히 초심자가 엄두를 내볼만한 대회는 여전히,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보급을 하려면, 저변을 넓히려면 길거리 농구, 조기축구처럼 대학생, 여성 직장인과도 같은 각층이 부담 없이 참가하고 즐길 수 있는 맞춤형 대회들을 선보여야 한다. 품을 열어보여야 안기는 법이다.

기자가 바둑계에 발을 들여놓은 삼사십 년 전에도 ‘젊은 바둑인구 유입 타령’을 했다. 그런데 얼마나 나아졌는가. 이른바 그때 이삼십대였던 ‘이무기-세미프로’들은 고스란히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때는 있지도 않았던 ‘시니어부’와 같은 부문을 신설하고, 심지어 내셔널리그 선수구성에조차 티오를 할당하며 그들끼리의 리그를 애면글면 보존해온 반면 일반 애호가들을 배려한 시도는 얼마나 있었나, 그간 대회 모습을 되돌아봐야한다. 젊은 바둑인구가 없어 걱정이 태산이라면 말이다.

▲ 새내기 A, B조는 13줄 바둑판으로 두었다.

그렇기에 이런 대회를 더 많이 보고 싶다. 12월 17일 한국기원 2층 대회장에서 오전10시부터 연 2023 새내기 여성바둑열전은 신선했다. 전국규모의 대회도 아니었다. 그저 길거리 농구대회처럼 갓 바둑을 배운 입문, 초보 단계의 여성들을 위해 마련한 ‘반상(盤上)’, ‘소반(小盤)’ 같은 대회였다. 그런데도 결코 작은 대회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흔히 보는 대회가 아니어서 오히려 낯설 지경이었다.

(사)한국여성바둑연맹이 연말에 선보인(주최/주관) 대회다. 정부예산을 이런 대회에 과감히 협력한 (사)대한바둑협회(회장 정봉수)도 멋지다. 바둑보급에 대한 열정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었고 이에 사이버오로(세계사이버기원)도 주저하지 않고 후원사로 나서 한몫 거들었다. 무엇보다 한국여성바둑연맹 이광순 회장이 취임 후 새로운 여성바둑인구 창출을 위해 작정하고 매년 열고 있는 ‘무료 바둑강좌’가 큰 호응과 더불어 서서히 결실을 맺고 있다. (재)한국기원 후원으로 부산을 비롯해 전국 22군데 지부에서 여성 대상 바둑강의를 지속하고 있고 서울은 성동구, 노원구를 위시해 구별로 확대 중이다. 때마침 송혜교가 주연한 드라마 ‘더 글로리’의 열풍 덕까지 보면서 전국 회원이 어느새 1,000명에 이르렀다.

▲ 개회사를 하는 한국여성바둑연맹 이광순 회장. 내년부터는 여성 직장인을 위한 야간반 강좌를 계획하고 있다.

올해 한국여성바둑연맹 강좌를 통해 입문한 여성들만 300여 명이 되다 보니 새내기들을 위한 바둑대회가 간절했다. 동기부여에 대회만한 이벤트는 없다. 대회를 앞두었을 때만큼 열정이 뜨거울 때가 없다. 입상은 보너스로 따라오는 것일 뿐 등수를 매기는 대회가 아닌 고만고만한 급수끼리 삼삼오오 동지의 정, 도반의 공감을 느끼고 나누며 내 실력을 가늠해 보는 자리였다. 바둑을 배운 지 반년 안팎인 새내기들이라 13줄 바둑판에서 겨뤘다. 부산에서 4명, 멀리 강원도 양구에서는 7명이나 무리지어 오는 등, 전국에서 이렇게 모인 새내기 선수가 모두 48명이나 되어 A/B조로 갈라 각조 스위스리그로 기량을 펼쳤다.

새내기들에게 “다음엔 나도 저 그룹에서 두어야지…” 하는 동기를 심어주고자 한쪽에는 초급부(11급-18급)와 중급부(6급-10급) 고수선배들의 대회도 병행했다. 각 32명씩 64명이 참가해 역시 스위스리그로 두었다. 줄곧 따뜻하던 겨울날씨가 이날 급작스레 영하 13도를 넘어서는 한파로 돌변했으나 스텝까지 130여 명이 넘는 인원으로 꽉 찬 한국기원 대회장은 추위가 파고들 틈이 없었다.

▲ 초/중급 고수(?) 선배는 19줄 바둑판에서 기량을 겨뤘다.

경기도 평택에서 참가한 주부 박정희 씨는 이번이 두 번째 경험하는 대회라는데 앞전 대회에서는 1승밖에 거두지 못해 이번엔 이를 갈고 새벽까지 공부하고 왔다고 한다. 효험을 본 것일까. 4전 전승으로 새내기 A조 우승을 차지하고선 “이 좋은 바둑을 늦게 배운 것이 후회될 정도로 즐겁다”고 말했다. “아직 새내기 실력이긴 하나 함께 둘(스파링 파트너) 생각에 중학생 아들에게 손수 가르쳤더니 자기보다 더 잘 둔다”는 자랑까지 덧붙인다. 박정희 씨를 보면서 엄마가 될 여성 한명에게 바둑을 가르치는 것은 여러 명에게 가르치는 것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역시 주부인 새내기 B조 장민영(34) 씨 또한 그렇다. 먼저 바둑을 배운 초등학교 1학년 딸과 같이 두어주려고 지난 6월 입문하게 되었는데 엄마가 이긴다고 한다. 바둑의 어떤 점이 좋으냐고 물으니 “바둑을 둘 때는 근심걱정,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게 하는 몰입의 즐거움”을 으뜸으로 꼽았다. 그러면서 “아직 애 아빠가 바둑을 둘 줄 모르는데 조만간 같이 할 생각”이라며 바둑가족을 꿈꿨다. 바둑에 진심인 장민영 씨는 새내기 B조에서 공동3위를 차지했다.

새내기 A조에 출전한 36세 진예림 씨는 영어강사다(위 사진 왼쪽). 고양시에서 왔다는 그는 4개월 전에 제발로 찾아 바둑을 배운 케이스다. 초등학생 때부터 바둑을 배우고 싶었으나 마땅한 계기를 잡지 못해 미루어오다가(이런 이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근래 고양파주 여성바둑연맹에서 강의가 있다는 정보를 검색하고 입문했다고 한다. 마침내 버킷리스트 하나를 이루게 됐다면서 “평소 재테크, 경제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한 수 앞을 내다보게 하는 바둑의 수읽기”를 장점으로 들었다.

경기도 의정부에서 참가한 김햇님은 “한국여성바둑연맹을 통해 바둑을 접한 것은 큰 행운”이라면서 “바둑의 진입장벽을 조금이라도 낮추고 흥미롭게 배울 수 있도록 신경 써 주셨으면 좋겠다”고 건의했다. 덧붙여 “바둑대회가 주로 일요일에 있어서 종교활동과 병행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며 “될 수 있으면 토요일에 더 많이 개최해 주길” 바라는 말도 건넸다. 다 귀담아 들을 말이다.

다음은 성적 결과. 우승, 준우승, 공동3위 순이며 기력에 따라 차등을 주지 않고 각부 공히 우승상금 20만원, 준우승 상금 15만원, 공동3위 10만원과 상장을 수여했다.

▶새내기 A조 (우승~공동3위 순)
박정희/최계영/김인숙/김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