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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절반도 남지 않은 나뭇잎들이 허허롭게 걸려있고, 가뭇없는 양광이 아쉬운 듯 빛바랜 낙엽들이 가만가만 몸을 뉘이고 있는 서울대 관악 캠퍼스 교정. 간간이 오고가는 등산복 차림의 어른들과 막 수능을 마친 고3 수험생들의 발걸음만 자박거리는 한가로운 토요일 아침이다. 어지러운 시국에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양심의 목소리들이 상아탑 곳곳에 또렷하고, 마침 총학생회장 선거철인지 입후보자들의 이름을 알리는 현수막들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정문에서 멀지 않은 사회대 신양 건물에서 대학생 몇이 아침부터 부지런히 4층을 오르내리며 박스와 집기 등을 나르고 있다. 바둑판과 바둑알이다. 주로 세미나가 열리는 406호 강의실에 바둑판이 좌르르 깔리고 이어 트로피며 음료수 등이 준비되고 있다. 한눈에 봐도 대학생들이 벌이는 바둑대회 분위기. 바로 서울대학교 바둑부가 주최하는 ‘2016 관악 국수전’ 현장이었고 준비하는 학생들은 모두 이 대학 바둑부 회원들이었다.

▲ ‘2016 관악 국수전’이 열린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

모든 준비가 완료되자 일단의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밀려든다. 이번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전국의 대학에서 모여든 선수들이다. 각 대학의 바둑 동아리 회원들이 단체로 참가하거나 개인자격으로 출전할 학생들도 있었다. 스마트폰이 없고 지금처럼 컴퓨터 게임이 발달하기 전, 그러니까 대학생들이 대중적으로 누릴 수 있는 고급취미가 바둑 정도였던 시절에는 대학생 바둑대회가 큰 인기와 함께 번성을 누리기도 했다.

‘대학 국수전’과 ‘대학 패왕전’, ‘대학 명인전’ 등에는 각 대학의 명예를 걸고 내로라하는 바둑고수들이 모두 등장했고 주요 대국이 일간지 관전기 면에도 실리던 시절이었다. 비록 그 규모와 명성이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현재까지 그 대회들의 역사와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중간고사가 끝난 10월말 연세대에서 열렸던 ‘무악 명인전’과 그 뒤 동국대에서 열렸던 ‘대학 패왕전’에 이어 이번에는 서울대 바둑부 주최로 ‘관악 국수전’이 올해 마지막으로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서 열렸다. 대략 30명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이는 전에 있었던 ‘대학 패왕전’ 과 ‘무악 명인전’ 에 80명 이상 참가했던 것과 비교하면 적은 참가자 수인데 10월 달에 바둑대회가 많고 대학 기말고사가 얼마 남지 않아서인 것으로 추측된다.

▲ 대회가 열린 사회대 신양 건물.

이날 ‘관악 국수전’에는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 동국대, 명지대, 건국대, 청주대 등 전국 10여개 대학에서 30여명이 참가해 갑조와 을조, 병조 등 3개 조로 나뉘어 진행됐다. 18급 초보자부터 인터넷 9단까지 천차만별의 급수지만 대국에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기력에 맞춰 조를 편성하고 거기에서도 치수를 조정하면 되기 때문이다. 각 조 스위스리그로 총 4경기를 통해 성적이 매겨지는 시스템이다.

이미 교류전이나 다른 대회에서 만난 사이, 혹은 고수들 사이에선 익히 알고 있는 얼굴들이 많다. 본격적인 경기가 펼쳐지기 전부터 몸을 풀듯 자연스럽게 친선바둑이 이어지고, 주최 측은 참가선수 명단 확인과 함께 각 조별 대진표를 작성하며 1라운드 준비를 마친다.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은 고수들의 대국인 갑조 경기나 초급자가 많은 병조 경기나 마찬가지다. 각자 배우고 익힌 대로 최선의 한 수씩을 찾아가는 모습들에서 비롯된 인류 역사상 가장 공평하고 공정한 게임이 바둑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바둑의 규칙과 원칙들이 엄정하게 흐르고 있는 가운데 각 조별로 자리배정이 끝나고 마침내 경기가 시작된다. 계시기의 신호와 동시에 어수선한 분위기는 싹 가시고 정적만이 감돈다.

승부수, 꼼수와 묘수, 정석, 패착, 꽃놀이패 등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 않은 바둑용어들이 우리사회에 알게 모르게 녹아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둑을 인생에 접목시켜본다면 우리의 인생을 길게 놓고 보면 인생은 정수와 정석을 찾아가는 합리적인 선택과 노력의 연속적인 과정인 듯하다. 바둑이 줄 수 있는 교훈과 즐거움이 어디 그런 것뿐일까 마는….

▲ ‘2016 관악 국수전’에는 전국 10여개 대학 30여명이 참가했다.

각 대학 바둑동아리의 모습은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서울대학교 바둑부 정내혁 회장(수학교육과 2학년)에 따르면 현재 서울대학교 내에 등록된 회원은 100여명, 그중에 직접 바둑을 즐기면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회원 수는 약 30명 선에 이른다고 한다.

바둑부에 가입한 회원들은 어릴 적 바둑학원이나 방과 후 교실에서 바둑을 배웠던 학생들이 대부분. 중·고등학생 때는 입시지옥에 시달리느라 바둑 둘 엄두도 못 내다가 조금은 자유스러운 대학생 시절에 다시 바둑을 찾아온다는 얘기다. 한 달에 두 차례 정도 정기 모임을 갖고 바둑을 두거나, 프로기사를 초청, 강의와 함께 다면기를 펼치기도 한다. 참고로 서울대의 경우는 일본 동경대 바둑부와 해마다 정기 교류전을 펼치기도 한단다.

한국기원은 대학바둑 활성화를 위해 바둑 동아리에 바둑용품을 지원하고 프로기사를 파견하기도 한다. 대학바둑 보급 사업은 문화체육관광부의 사업승인과 국민체육진흥공단의 재정 지원을 받아 시행되고 있으며, ‘관악 국수전’은 물론, ‘무악 명인전’과 ‘대학 패왕전’, ‘한중일대만 대학생 바둑교류전’등도 지원하고 있다.

▲대진표를 작성하고 있는 서울대학교 바둑부 정내혁 회장(수학교육과 2년)

학생회관에서 간단히 점심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2국부터 4국까지 계속됐다. 대국 후 안타까운 표정으로 복기를 하는 곳은 주로 갑조와 을조의 경기고, 바둑이 마냥 즐겁기만 한 병조에서는 화기애애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실수투성이일지언정 한 판의 바둑을 끝까지 두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대견한 표정들이다. 오늘 심판으로 참관한 백찬희 2단도 잠깐 시간을 내어 갑조의 강자와 흔쾌히 지도기를 벌인다.

아침부터 강행했던 모든 대국 일정이 끝나고 시상식이 진행된다. 각조 우승과 준우승에 이어 3위까지 상금과 트로피가 주어졌다. 얼마 되지 않는 상금이지만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해주는 훈훈한 분위기. 모름지기 이겨야 좋은 것이 승부지만 때로는 지고도 즐거운 것이 바둑 이라 했다.

손끝으로 나누는 즐거운 대화, 즉 수담. 모든 상념들을 뒤로하고 종일토록 바둑삼매경에 빠질 수 있었던 옹골찬 하루였다. 언제 어디서든 다시 만날 수 있는 젊음이 있었고, 기꺼이 바둑판 앞에 다시 앉을 수 있는 정겹고도 소중한 인연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