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느낌을 준 바둑은 오청원이 유일하다" - '조훈현 9단,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바둑의 패러다임을 바꾼 인물, 그로부터 현대바둑이 시작됐다" - 문용직 박사의 평가
올해 99세 생일을 맞은 우칭위안(吳淸源, 오청원, 1914년 5월 19일 중국 푸젠성 출생, 본명은 吳泉)의 페이스북에는 한중일을 비롯한 전세계 바둑인과 바둑팬의 생일축하 메시지가 끊이지 않았다. 이 생일이 음력인지 양력인지 헷갈리지만 그를 추앙하는 팬들에게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다.
그를 아는 바둑인들은 흔히 '살아있는 기성'이란 수식어를 최고의 존경을 담아 그의 이름 앞에 붙인다. 어떤 때는 그냥 길들여진 버릇처럼도 그렇게 붙인다.
기성(棋聖). '바둑의 성인'이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러울 만큼 그의 인생은 현대바둑에 큰 영향을 끼쳤다. 어느 분야에나 천재들이 있고 바둑에도 많은 천재가 있지만 그의 행마와 생각은 확실히 다른 어떤 천재들보다 큰 영향을 끼쳤다. 우칭위안 전의 바둑과 후의 바둑이 있을 뿐이다,란 말이 나올 정도로.
99년의 인생이다. 큰승부와 피를 말릴 만한 상황도 꽤 많았지만 일단 상징성이 강한 2판의 바둑과 전설이 된 '십번기'로 간추려 그의 99세 인생을 간략히 살펴본다.
○● 덤의 발견
1938년 일본기원이 덤(흑 공제)을 도입하기 이전엔 흑백이 덤 없는 바둑이었다. 정확히는 우칭위안이 특별히 흉내바둑의 파격을 선보이기 전까진 '덤'에 관한 규정의 필요성을 상상하지 못했다.
'덤'을 기본규칙으로 한 오늘날의 '호선' 바둑은 역사가 그리 길지는 않다. 바둑을 '가문의 직업'으로 여기던 일본에선 공식대국은 치수제였다. 덤이 없는 호선(互先 흑백을 교대로 잡음), 선상선(先相先 흑2번 백1번), 정선(定先 흑만 잡음), 선이선(先二先 흑2번 두점치수1번)과 같은 치수제로 실력의 높고 낮음을 나눴다. 4판 이상의 승수차이가 나면 치수를 바꿨는데 이런 식의 치수고치기를 '쟁기(爭棋)'라고 했다. '선(先)'은 덤없이 흑을 잡는 것을 뜻한다.
우칭위안의 상상력은 덤없는 바둑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소년 우칭위안은 '괴동환'이라는 불리며 일본바둑의 촉망받는 인재이자 바둑 선배였던 기타니 미노루(木谷 實, 1909년~1975년)를 상대로 자신의 발상을 시험한다.
▼ 1929년 6월 3일~25일 신문게재
시사신보 주최 吳소년출세기 제7국
치수 : 선상선 /282수 백3집반승
●우칭위안 3단 ○기타니미노루 4단
28년 가을, 14세의 바둑신동 우칭위완은 어머니 서문(舒文), 맏형 완(浣)과 일본에 왔다. 스승인 세고에 겐사쿠(瀬越憲作)와 일본 바둑계인물들이 노력한 결과였다. 우칭위안은 독학을 통해 13세때에 이미 일본 중견프로와 선으로 동등하게 둘 수 있었다. 29년에는 4단들을 선으로 연파해 드디어 괴동환(怪童丸) 기타니 미노루와 만난다-이때 엄숙한 승부를 기대하던 기타니는 모욕을 받았다고 느낀다.
이 바둑은 덤이 없는 흑(우칭위안)이 중앙 천원에 첫수를 두고 나머지를 백과 똑같이 대칭되는 점에 따라두는 흉내바둑이다. '덤이 없다면 흑은 언제나 이 수법을 통해 어떤 상대든 편하게 상대할 수 있다. 바둑판의 좌표는 상하좌우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착수는 교대로 한 수씩 놔야만 한다. 언제든 그 대칭을 둘 수 있다는 점을 파고들었다.
"바둑은 조화다."
우칭위안의 말처럼 '모든 게임은 조화다'. 현대의 'IT기획자'나 '게임 기획자'는 게임 전체의 재미와 몰입에 영향을 미치는 '균형(밸런싱)'에 지나칠 정도로 신경을 쓴다. 게임의 재미, 더 나아가 중독과 몰입은 '균형'으로부터 나오며, 균형이 깨지는 순간 그 게임은 지루해지고 말기 때문이다.
우칭위안의 발상과 비슷한 면이 있다-다른 점이라면 현대의 IT기획자들이 전체의 균형에 집착하는 대신 게임을 직접 마스터하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점 되겠다. 기획자는 게임의 룰을 파악하는 순간, 그 게임에서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멀어지는 수도 많다. 관점은 비슷하되 수법의 마스터가 되는 길과는 이런 것이 다르다.
우칭위안은 이미 중앙의 가치, 혹은 전체 바둑의 균형을 위주로 한 포석과 정석의 활용에 대한 '신포석'을 나름 구체화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칭위안의 흉내바둑으로 인해 바둑은 '덤(흑공제)'이란 개념과 룰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덤 없는 바둑에서 흑이 흉내를 낼 경우, 바둑의 '균형'이 깨지기 때문이다.
'덤'이 있는 현대바둑은 그 이전 덤이 없는 치수제 바둑과 완전히 다른 방식의 길을 걷게 된다.
▲ 슈사이 명인과의 환갑 기념대국 모습
○● 신포석
귀에서 변, 변에서 중앙으로 발전한다. 바둑의 논리다. 물론 타당하다. '신포석'은 이런 이론에서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갔다.
우칭위안은 '전체의 균형', '조화'를 중시하는 좀 더 새로운 방식을 제시했다. 신포석이다. '신포석'은 1933년 기타니 미노루와 우칭위안이 함께 제기했다. 야스나가 하지메(安永一)가 글로써 두 사람의 생각을 담았다. 세 사람의 공저가 된 ['바둑혁명, 신포석'] 은 당시 10만 부가 넘게 팔렸다. 야스나가의 시니컬한 '글빨'이 바둑계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쳐 바둑을 둘 줄 아는 모든 사람들은 '신포석과 바둑혁명'을 입에 달고 살 정도가 됐다.
▼ ○본인방 슈사이(秀哉) 명인 ● 우칭위안 5단
슈사이 명인 환갑기념대국, 제한시간 24시간, 정선
1933년 10월 16일 시작 ~ 14차 34년 1월 29일 종료, 백2집승
일본의 마지막 바둑명인, 슈사의 명인의 환갑기념 대국이다. 요미우리 신문사에서 16명의 기사를 초청해 토너먼트로 환갑기념대국에 나설 대국자를 선정했다. 우칭위안의 흑 1,3,5가 신포석을 상징한다. 3.3과 화점 천원을 놓고 있다. 3.3은 당시 일본바둑에서 금기의 수였다.
감히! 명인 '슈사이'는 격노했다. 신포석을 익히 들어 알았지만 자신의 앞에서 금단의 수들을 뻔뻔히 들고 나오리라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불패의 명인'이라는 명예에 집착했으며 까마득한 후배와의 대국을 일종의 '사무라이의 진검승부' 혹은 '쟁기'로 보았다. 이후 '십번기'에서도 나타나지만 우칭위안의 '승부관'과는 많이 다르다.
에사키 마사노리의 책을 보면 흑의 1,3,5 대각선 포석은 "전통을 무시한 반역행위"이며 "극심한 무례"로 비쳐졌다. '바둑에선 어느 곳이나 둘 수 있다' 요즘에야 당연한 얘기지만, 그것을 우칭위안은 상기시킨 것이다. 이런 파격은 당시의 일본인 기사들로선 불가능하고 '이방인'인 우칭위안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에사키'는 쓰고 있다.
우칭위안의 파격을 일본인들도 응원했던 듯하다. 이창호 1인 독주시대에 이어 이세돌이 등장하고 나서 바둑TV PD들은 이세돌이 결승에 오르기를 속으로 기원하곤 한다. 시청률 때문이다. 당시 우칭위안이 환갑기념 대국의 도전자로 결정되자 요미우리 신문 사장이 패자인 하시모토에게 "당신이 져서 기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마 구독률 때문이었을 거다. 우칭위안은 파격을 상징하는 바둑계의 인기인이었으며 이 부분 이세돌과 닮았다.
대국은 4개월간 진행됐다. 13차례에 걸쳐 명인이 중지하고 싶을 때 중지했고 시작하고 싶을 때 다시 시작하곤 했다. 바둑 한판이 이렇게 14차까지 이어진다. 명인에게 엄청나게 유리한 '룰'이었으나 당시엔 당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둑이 우칭위안에게 질 것 같은 분위기로 흐르자 명인의 스트레스는 높아만 간다.
본인방 슈사이는 본인방 문하의 제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스승의 바둑을 검토했으며 가끔 스승이 그들의 검토를 지켜봤다. - 반칙이다. 명백한 '훈수'가 될 수 있다. - 아니나 다를까 명인의 묘수가 터진다.
슈사이는 160의 묘수로 전세를 역전시켜 252수만에 백2집승을 거둔다. 명인의 묘수가 '제자의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제자의 이름은 '마에다 노부아키', 그는 "스승이 가끔 제자들의 검토를 보곤 했지만 참여는 안했다"라고 말했다.
그래. 그럴 것이라곤 다들 짐작했지만 '마에다가 명인에게 묘수를 제공했다'는 의혹을 입 밖에 내는 것은 또다른 금기가 됐다.
'마에다'의 이름을 기억해두자. 그의 이름을 거론한 것으로 인해 우칭위안의 스승 세고에는 후일 곤란에 처하게 되고, 그 여파로 우칭위안은 일본기원에서 자신도 모르게 탈퇴 당해 '객원'이 된다. 스승의 곤란은 그의 사형인 관서의 하시모토 우타로가 일본기원에 반발하고 독자적인 관서기원을 세우는 한 가지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의도하지 않은 우칭위안의 '공로'는 반상외적인 대국 규정의 공정성에 관한 것이다. 어느 대국자 일방의 뜻대로 대국을 중지하고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다.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일본'의 8시간 이상의 대국에서 '봉수'라는 제도가 생긴 방아쇠 역할을 한 게 이 대국이다.
하긴 그의 스승 세고에는 일찍이 더 나아갔었다. "바둑을 빠르게 잘 두지 않으면 진짜 명인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했으며 하루 안에 모든 대국을 끝마쳐야 공정하다고 내다봤고(보다 짧은 시간제 바둑의 도입) 마치 씨름처럼 관중 앞에서도 자신의 실력을 내보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장고(長考)를 통해 예도의 경지를 추구했던 당시의 보수적인 일본기원 풍토와는 크게 대비된다.
▲ 기타니 미노루와 대국하는 우칭위안
○● 10번기/ 명국의 조건 - 우칭위안을 둘러싼 환경
"우칭위안 선생과의 10번기는 39년 9월부터 41년 6월까지 벌어졌지, 그동안 기타니 선생께선 다른 시합에는 일체 참가하지 않고 이 10번기에만 몰두할 정도로 정력을 기울이셨다네" - 조남철 9단의 회고록. 우칭위안-기타니 10번기에 관한 회고.
故 조남철 9단(1923~2006, 1941년 한국 최초의 프로기사가 됐으며 44년 귀국해 한국기원 창립)의 스승인 기타니 미노루는 신포석의 부상에 있어서 우칭위안만큼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10번기로 인해 큰 상처를 받았다. 조남철 선생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전력을 다했지만 패했다. 평소 내색을 않기로 유명한 기타니 선생도 10번기 패배만큼은 충격이었던지 삭발까지 했다. 당시 기타니도장의 분위기는 초상집처럼 우울했다'고 전한다.
정작 우칭위안 스스로는 바둑 이외의 것에는 무심했다. 현대바둑으로 치면 무심(無心)의 이창호가 생각날 정도지만, 그보다 더 심한 면이 있다. 말수가 적었던 이창호는 적어도 일정이나 행사에 불만이 있으면 "이것이 한국기원 공식행사입니까?"라는 식으로 이유를 물어보곤 했었다.
우칭위안은 어쩌면 스스로 현실에서 도피했다고 봐야 하겠다. 억지로 눈을 감고 있었거나 말이다. 국적 이동의 시기부터가 심란하다.
천재로 부각된 우칭위안은 1934년부터 일본 귀화의 압박을 받는다. 결국 1936년 4월 고이즈미(小泉)로 개명하고 일본에 귀화한다. 42년엔 일본인 오카즈코(吳和子, 2012년 12월 29일 별세, 향년 90세, 中原和子 - 나카하라 가즈코)와 결혼해 평생을 함께 한다. 42년은 28세의 나이로 일본 최연소 8단이 된 해다.
반면 중일관계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1931년 9월,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이란 이름의 식민국가를 만든다. 1937년 7월엔 일본의 100만 관동군이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탈한 중일전쟁이 발발한다. 중-일의 관계가 이렇게 악화되는 와중, 우칭위안은 35년 단신으로 중국 텐진에 건너가 홍만회(紅卍會)에 가입하고 오혁령(吳奕靈)이란 도명까지 받았다. 우칭위안에겐 스스로의 종교적 희생이 필요했다.
십번기는 기본적으로 이방인 '우칭위안'과 일본인들과의 바둑대결이란 구도가 숨어 있다. 중국의 천재소년 우칭위안을 제자로 받아준 스승 세고에는 당시 일본바둑계로선 매우 개방적인 인물이며 개혁파에 속했다. 당연히 본인방 세력 위주의 일본기원 기사들과는 대립되는 면이 있었다.
▲ 후지사와 구라노스케와의 10번기 장면. 후지사와는 십번기에 연달아 진 후 잠시 일본기원을 탈퇴했다 이름을 후지사와 호사이로 개명하고 복귀한다.
실제로 45년 일본 패전과 함께 우칭위안의 일본국적은 소멸됐고 49년 대만국적을 취득한다. (이후 1979년 일본 국적을 재취득했다.) 치수고치기 십번기(덤이 없는 바둑)가 이즈음부터 시작된다. 이미 이때쯤의 우칭위안은 바둑의 1인자였다.
'십번기 기획'은 요미우리 신문이 맡았다. 우칭위안과 요미우리의 협력 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우칭위안은 1939년 기타니 미노루(5승 1패) 전의 승리를 시작으로 기타니-오청원의 투톱시대를 마감하고 우칭위안의 1인독주 시대를 시작한다.
이후 41년 가리가네 준이치(4승 1패), 42년 후지사와 호사이와 10번기(정선치수로 시작, 6-4로 후지사와 승리), 46년 사형인 하시모토 우타로와 1차 십번기(하시모토와 합의해 당시로선 파격인 제한시간 7시간으로 줄임, 6승 2패), 48년 이와모토와의 십번기(5승 1패, 10시간 바둑), 50년 하시모토 우타로와 2차 10번기(5승 3패 2무승부, 10시간 바둑. 이즈음 새우교 교주 새광존에게 거액의 대국료를 헌납함), 51년 후지사와 호사이와 2차 10번기 (6승 2패 1무승부), 52년 후지사와 호사이와 3차 10번기(5승 1패, 상대를 선상선에서 정선으로 떨어뜨림, 충격으로 후지사와 일본기원 은퇴), 54년 사카다 에이오와 10번기(6승 2패, 정선으로 떨어뜨림), 55년 다카가와 슈가쿠와의 10번기 (6승 2패)까지 20년 가까이 진행된 '십번기'의 전설로 남게 된다.
우칭위안은 덤이 없는 치수고치기 룰로, 거의 모든 최정상급의 기사들을 상대했으며, 상대의 치수를 선상선, 혹은 정선까지 떨어뜨린다. 패배를 감수하고 잘 버틴 사람들도 있었던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십번기의 열기가 가장 가열된 때는 전쟁후 '후지사와 구라노스케'와의 두번의 대결이다. 명국의 조건이 모두 갖춰졌다. 고액의 대국료를 기본으로 대국자 양측에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게다가 장고(長考)로 대표되는 보수적인 일본의 순혈주의가 '우칭위안 타도'를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47년에 우칭위안은 일본기원에서 탈퇴한다. 사실상의 제적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스승인 세고에가 일을 진행했다고 하는데 정작 우칭위안이 탈퇴사실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20년쯤 뒤다. 우칭위안은 그 시절 내내 스스로를 일본기원 소속기사로 생각하고 있었다. 우칭위안은 애처로울 정도로 이런 부분이 둔하다-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그러나 이런 무심함이 승부에는 도움이 됐을 것이다.)
말하자면 47년 이후의 십번기는, 일본국적을 소멸하고 일본기원을 탈퇴해 요미우리 신문사에서 거액의 연봉을 받는 이방인 우칭위안과 일본 순혈기사들의 대결, 진검승부가 된 셈이다.
'세고에 겐사쿠' 패밀리와 일본기원과의 마찰도 '일본기원과 우칭위안'이라는 대립구도에 불을 질렀다. 전쟁 후 일본기원 이사장을 맡았던 세고에는 48년 기사총회에서 금기의 '마에다'를 언급하고 이사장직을 반강제로 사임한다. 세고에는 기어코 '마에다의 훈수'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지만, 본인방 문중기사가 많은 일본기원이었다. 그의 제자 하시모토 우타로는 이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후 관서기원을 독립해 나갔다. '세고에 패밀리'가 일본기원과 등을 돌린 셈이다.
게다가 당시 일본기원 섭외부장 오쿠야마는 대기업의 중역으로서 십번기의 대국자인 후지사와 호사이의 장인이었다. 일본기원은 후지사와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우칭위안을 내세운 요미우리의 상업성을 비난했으며, 요미우리는 우칭위안을 옹호하며 일본기원이 비겁하다고 비난했다.
부담을 떠안을 수 없을 만큼 떠안은 후지사와는 패한다. 그것도 십번기를 두번이나 연속으로 패해 치수는 호선에서 선상선, 선상선에서 정선이 된다. 그는 오랫동안 일본기원을 떠난다.
우칭위안을 둘러싼 상황은 적대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칭위안이 십번기의 승리를 더해갈수록 그는 점점 더 인간세계와 동 떨어진 '바둑의 신'처럼 되어갔다. 일본바둑은 타이틀전 위주의 프로기전이 확산되고 있었지만 요미우리 신문 소속의 우칭위안은 노는 무대가 달랐다. 본인방 타이틀을 우승한 프로들은 당연히 우칭위안과 대국을 해야 하는 것으로도 여기게 됐다. 그는 타이틀 위에 존재하는 사람, 신이었다.
다만 현실로부터 애써 도피한 것인지, 혹은 정말 모른 것인지, 정작 우칭위안 자신은 이런 흐름으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그의 스승이 우칭위안의 일본기원 탈퇴를 처리한 것은 지금도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았다-세고에와 일본기원이 우칭위안의 탈퇴를 처리한 것은 우칭위안의 '영향력'이 누구도 어쩌지 못할 만큼 커졌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십번기의 과정을 거치며 그는 바둑계에 있으면서도 공식적으로는 일본바둑계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이 된다.
▲ 제자를 가르치는 우칭위안, 아마 그의 제자인 린하이펑일 것으로 추정된다. 린하이펑은 나이가 들어버린 우칭위안 대신 많은 타이틀을 따냈다. 전후 우칭위안은 대만의 국민영웅이 됐고 대만정부로부터 대국수(大國手) 칭호를 받았다.
○● 승부관
"욕망과 결부된 신앙은 미신이다." - 우칭위안
우칭위안이 종교에 심취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종교관은 대체로 경건하고 소박하며 자기 희생적이다-그 희생으로 인해 교주에게 이용당한 적도 있지만 적어도 앞뒤 구분 못하는 믿음이었던 것은 아니다-승부관도 그렇다. 대체로 요즘 2000년대의 프로들과 오히려 비슷하다.
요즘의 프로들은 승부에 대해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다"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중요한 승부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대량승부의 시대에서 '진검승부'의 자세는 장기적인 프로생활에 도움이 되지 못 할 수도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중요한 승부를 앞두고 '칼'처럼 날을 세운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들이 '칼'을 들고 대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칭위안은 10번기의 상대들이 '진검승부'의 장에 나서듯 비장했던 것과 달리 "이기고 지는 것은 운이며, 이 흐름에 몸을 맡긴다"는 식의 말을 한다. 확실히 그의 바둑두는 모습은 경건하긴 하지만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무사의 모습은 아니다.
우칭위안과 함께 신포석을 창안했던 기타니는 훗날 이런 말을 남겼다. 이 말은 한국에서도 은근하게 유명해져서 영화나 만화에서도 즐겨 써 먹는 어구가 됐다. 정상에 오르지 못한 자의 회한이 담긴 말이라 중독성이 있다.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다."
세고에의 마지막 제자가 된 조훈현은 제자인 이창호와 함께 덤 있는 바둑시대, 타이틀 프로기전의 시대의 황제였다. 조훈현은 이런 말을 했었다. 공식 인터뷰가 아닌 98년 여름의 어느 도전기 점심 식사 때였다.
"강한 놈(者)이 이기게 되어 있는 것이야."
부연 설명을 하자면 당시 일본바둑이 세계대회 성적을 못 내는 이유에 대해 "100미터 스프린터와 42km를 뛰는 마라토너가 다르듯이 바둑도 그러하다"라는 식의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조훈현 9단은 그런 설명을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조훈현-이창호'의 대국이 이미 세계바둑 최강자들의 바둑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슨 놈의 스프린터! 무슨 놈의 마라토너! 속기건, 3시간짜리건, 8시간이건, 일년짜리건 강한 놈이 이기는 거야."
조훈현의 말은 저 멀리 스승인 세고에의 말과도 묘하게 일치하는 바가 있어 흥미롭다. 세고에는 우칭위안, 하시모토 우타로, 그리고 조훈현의 스승이다.
▲ 요미우리 주최, 일본 1회 명인전 리그에 참여한 우칭위안. 우칭위안은 본인방, 명인등의 타이틀과는 인연이 없었다.
○● 명예로운 이방인
"재미는 덤이 없을 때 더욱 크다. 덤이 없다면 흑을 잡으면 100%, 백을 잡으면 0%의 승률이 나올 것이다. 그러므로 덤은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 이창호
"결국 덤과 관계없이 실력이 반영되지 않을까요?" - 이세돌
'덤'에 관한 이창호 이세돌의 대답이다. 문용직 박사는 그의 저서 바둑의 발견에서 "4판의 연속적인 승수 차이가 실력의 차이를 정확히 말하지 못한다. 그런 통계나 과학의 측면에서 4판의 승차로 치수를 고치는 치수고치기 방식은 부적절하다"고 밝힌다. 4판의 차이가 났다고 해서 우칭위안의 십번기 패자들 중 일부처럼 너무 비감해 할 필요는 없었던 셈이다.
이어 문용직 박사는 "덤이 없는 바둑과 덤이 존재하는 바둑은 프로기사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덤이 있으면 중반의 두터움과 끝내기가 포석의 연구보다 승부에서 중요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칭위안은 본격적인 덤 있는 바둑, 프로기전 타이틀의 시대에서는 이전만큼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교통사고로 인한 건강악화도 있었고 나이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우칭위엔이 51세일 때 우칭위안과 요미우리 신문과의 오랜 관계가 끝났다. 십번기의 시대, 덤 없는 바둑의 시대가 우칭위안과 함께 저물었다.
우칭위안은 비로소 일본기원에서 (스승에 의해) 스스로 탈퇴한 사실을 알았다. 일본기원이 주최하는 타이틀전에 출전하려 했으나 객원의 신분이라 별도의 허가가 필요하다 했기 때문이다.
일본기원은 그가 이미 탈퇴했으니, 소속기사로서 활동하고자 한다면 다시 복귀를 신청하라 했고, 우칭위안은 남이 대신 한 탈퇴에 대해, 왜 자신이 그 탈퇴를 인정해야 하느냐며 일본기원이 요구하는 복귀방식을 끝내 거부했다. 일본기원 또한 우칭위안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현재에도 일본기원 홈페이지에는 여전히 명예객원으로서 그의 소개가 나온다.
▶ 우칭위안의 2012년 모습
우칭위안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때로부터 영원히 우칭위안은 일본기원의 '명예객원'으로 남았다. 명예로운 이방인, 영원한 이방인이 되었고, 신의 영역에서 인간의 영역으로 돌아오지도 않았다. 그는 그냥 '살아있는 기성'이 됐다.
본인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우칭위안은 자신의 승부를 통해 바둑을 보다 공정한 룰로 인도했으며 바둑을 좀 더 넓게 자유롭게 만들었다. 오늘날의 바둑이 스포츠로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아주 멀게는 우칭위안의 공로도 있을 법하다.
바둑은 '우칭위안의 십번기시대' 이후 더욱 재미있어 졌을까? 더욱 조화로워지고 있을까? 한국바둑이 세계바둑을 휩쓸고 있을 무렵, 한 중국기자가 우칭위안에게 물었다. 한국바둑이 지나치게 이기는 것에만 몰두해 바둑의 창조성과 예도라는 부분을 무시하게 된다는 그런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정확치는 않지만 이런 내용이었다.
- "한국바둑은 오로지 이기는 것에만 몰두하고, 사활에 치우쳐 있습니다." (기자)
- "바둑이 원래 그런 것입니다." (우칭위안)
처음의 흉내바둑으로 돌아가본다. 그의 바둑 이론은 '컴퓨터 바둑' 프로그래머들이 굳이 '361!'을 모두 연산할 필요가 없음을 컴퓨터가 등장하기 아주 예전에 증명했다. 뭐, 그렇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
바둑판은 좌우상하의 완벽한 대칭이며, 바둑판 전체로서 가치있는 수순들이 필요한 곳은 당연히 '361!'이 아니어서 획기적으로 경우의 수가 줄어들게 된다. 컴퓨터 바둑이 프로기사를 이기는 그날, 그의 이론은 어떤 식으로든 그 컴퓨터 바둑에 프로그래밍되어 있을 것이다.
○● 링크 1 : 사이버오로 우칭위완 관련 기사 ☜
○● 링크 2 : 吳淸源 선생을 만나고 (문용직 칼럼)☜
○● 링크 3 : 吳淸源 명예객원기사 프로필(일본기원) ☜
본문에서 다음의 책들을 인용함
- 오청원 스토리, 에사키 마사노리 글, 서림문화사 1997년
- 조남철 회고록 세번의 눈물, 조남철 양형모 한국기원 2004년
- 오청원대국집, 도서출판 현현각 양지 2002년
- 바둑의 발견 1,2 문용직 지음 도서출판 부키
- 재미이론 라프코스터 디지털미디어리서치 2005년
[사진 | 일본기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