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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창원.

일본의 봄이 눈처럼 하얀 벚꽃의 계절이라면, 일본의 가을은 온 산과 사찰과 공원을 붉게 물들이는 단풍의 계절이다. 간사이 지방의 가을은 한국보다 약 한 달 가량 늦게 찾아오는데, 올해는 평년보다도 따뜻한 기온 덕에 단풍의 절정은 11월 말이나 되어야 볼 수 있다고 한다.

아직은 따뜻한 날씨, 나무들도 아직까지는 푸르름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았지만 계절은 이미 가을에 접어들었음을 알려주는 전시가 있으니 바로 매년 10월 하순부터 11월 초순에 걸쳐 나라국립박물관에서 개최되는 특별전-쇼소인(正倉院)전이다.

쇼소인은 나라(奈良)현이 자랑하는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도다이지(東大寺)에 소속되어 있는 보물창고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쇼소(正倉)”는 원래 나라시대(710~794)와 헤이안시대(794~1185)에 걸쳐 각 지역과 사찰 등을 중심으로 건설된 곡식이나 재화, 도구 등을 보관하는 창고를 의미하는 말로, 이러한 “쇼소”가 여러 채 모여있는 곳을 이르는 말이 보통명사로서의 “쇼소인”이었다고 한다. 쇼소인이 오늘날 도다이지에 있는 창고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쓰이게 된 것은 다른 여러 쇼소인이 역사의 시간과 함께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현재의 쇼소인이 특별한 이유는 단지 오랜 세월을 이겨냈기 때문만은 아니다. 가로 33미터, 세로 9.4미터, 높이 14미터, 남북으로 길게 지어진 거대한 건물 내부는 북창(北倉), 중창(中倉), 남창(南倉)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곳에 일본의 국보급 보물 약 9000점이 보관되어 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쇼무(聖武)천황(701~756)의 사후 49제에 맞추어 그의 왕비였던 코메이(光明)황후가 도다이지에 헌납한 보물들로 북창에 보관되어 있다. 죽은 왕의 명복을 비는 것과 동시에 사랑하던 남편을 생각나게 하는 생시의 애장품을 옆에 두고 볼 수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로 칼, 거울, 악기 등 약 600여 점의 공예품과 쇼무천황을 치료하기 위해 썼던 진귀한 약재 60여 종을 헌납하였다고 한다.

이들 헌납품은 <국가진보장(國家珍寶帳)>과 <종종약장(種種藥帳)>이라는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중창에는 주로 752년에 거행된 도다이지의 대불(大佛) 개안회(開眼会) 때 황족과 귀족들이 대불에 헌납한 칼, 허리띠, 유리제품 등과 행사에 참석했던 신라 사절들이 기증한 보물들이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창은 당시 행사에 쓰였던 각종 불구(佛具), 악기, 가면 등과 헤이안시대에 도다이지의 다른 창고가 파손되었을 당시 그 창고에 있던 물건들을 옮겨 함께 보관하고 있다.

▲ 나라의 야경.

이들 보물의 절반 정도는 나라시대(8세기)에 일본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 밖에도 사산조 페르시아, 중국 당나라, 한반도의 통일신라 등 동시대의 아시아 여러 국가의 보물들이 거의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어 일본뿐 아니라 그 밖의 나라들의 당시 문화를 연구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다만 이러한 보물들은 평상시에는 공개되지 않고 1년에 한 번 ‘쇼소인 특별전’을 통해서만 극히 부분적으로 공개된다.

보물들은 헌납된 당시부터 창고를 관리하는 승려 이외에 황족, 쇼군(將軍)과 같은 최고 권력자들을 제외하고는 접근이 금지되었다. 메이지유신 후 1875년에 도다이지로부터 내무성으로, 이후 다시 궁내성으로 쇼소인의 소관부처가 바뀌면서 보물들의 관리는 한층 더 엄격해져 현재에 이른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46년부터 일반에 공개하고는 있지만 매년 전시되는 보물은 대개 70점 안팎이다.

▲ 아수라전.

이 중 인기가 좋아 최소한 몇 년에 한 번씩은 전시가 되는 보물들도 있음을 감안하면 쇼소인의 보물들을 일람하는 데에 한 사람의 인생으론 부족하다. 올해로 61회를 맞는 쇼소인전이지만 이번에 전시되는 66점 중 12점이 최초 공개일 정도이다.

엄중히 보호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도난을 당하거나 훼손된 보물들도 많다. 쇼소인을 대표하는 보물 중 하나인 “나전•호박거울”의 경우 원래는 비슷한 거울이 다수 보관되고 있었으나 가마쿠라시대(1185~1333)에 상당수가 도난 되어 부서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교토 등에 장물로 등장하였으나 나전과 호박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거울이 당시 사람들의 취미에 맞지 않아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쇼무천황과 코메이황후가 도다이지 대불의 개안회 때 썼던 관도 훼손된 상태로 전해지는 대표적인 예다.

이 역시 가마쿠라시대에 천황의 즉위식에 쓸 관을 만들 때 참고하기 위해 대출되었다가 사고로 파손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사고로 파손’되었다는 것은 핑계일 뿐 관의 일부를 새로운 관을 만들 때 썼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황족과 귀족들, 최상층 관료들에 의해 대출되었다. 반납되지 않은 경우도 많아 헤이안시대의 사가천황(嵯峨天皇, 재위 09~823)이 대표적인 예로 나전오선비파, 신라금(新羅琴), 당풍의 병풍, 왕희지(王羲之)의 글 등을 대출한 후 반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창원의 보물들을 직접 접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는 것이 출세의 척도가 되기도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나가 등의 무장(武將)들에게 쇼소인의 보물을 구경하는 것은 그가 천하인(天下人)이 되었다는 증거였다.

이처럼 많은 이들의 동경을 받았던 쇼소인의 보물들은 천황을 신성시 하였던 메이지유신 이후의 오랜 기간 동안 완전히 봉인된다. 쇼소인 보물을 궁금해 하는 일반인들을 위해 1940년 현(現)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열렸던 특별전에 20일 간 약 42만 명이 다녀갔던 것도 그만큼 보기가 힘든 보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때에도 북창의 보물들은 전혀 공개되지 않았는데, 때문에 북창의 보물은 메이지시대부터 더욱더 신비한 보물로 여겨졌다.

아직도 다 벗겨지지 않은 쇼소인 보물의 신비감 덕분에 ‘쇼소인전’은 매년 대성황이다. 올해는 특별히 현 천황의 재위 20주년을 기념하여 평년보다 3일 연장 전시(10월 24일~ 11월 12일)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전시뿐만 아니라 이 기간 중 거의 매일 열리는 각종 공개강좌와 해설회 등에도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4년 전 아예 박물관 마당에 진을 치고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에 놀라 금년엔 가장 사람이 없을 것 같은 월요일에 찾아 갔지만 여전히 45분 동안 줄을 서서 기다려서야 간신히 전시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올해는 몇 년 간 전국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흥복사(興福寺)의 진품 아수라(阿修羅)상을 보러 온 관광객까지 겹쳐 사람들이 더 늘었다고 한다. 이왕 나라에 간 김에 아수라도 보고 싶었지만 2시간 넘게 기다려야 하는 줄을 보고 포기하고 말았다.

전시관에 발을 들여 놓은 후에도 전시품을 잘 보기 위해서는 상당한 몸싸움(?)이 필요하다. 인기가 많은 보물들 주변에는 사람들이 빼곡히 에워싸 가까이 접근하는 것도 쉽지 않고, 좋은 위치에서 충분히 감상하는 일 역시 거의 불가능하다. 소장 작품들의 거의 대부분을 상설로 전시하는 서양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라면 일본의 전시회나 박람회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들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바둑 팬에게 ‘쇼소인전’은 이러한 모든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한번쯤 구경해볼 가치가 있다. 다행히도 바둑판과 바둑알 등이 쇼소인 소장품 중에서도 상당히 인기가 있는 보물이어서 거의 매년 관련된 보물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도 이미 많이 알려진 “목화자단 바둑판”은 “나전•호박 거울”, “자단목화조 비파” 등과 함께 일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보물 중 하나여서 자주 공개된다.

“목화자단 바둑판”과 관련해서는 여러 지면에서 소개가 되었지만 다시 한 번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북창에 보관되어 있고 <국가진보장>에도 등재되어 있는 보물로서 쇼무천황의 애장품이다.

바둑판은 화려한 장식과 한 쪽에서 열면 반대쪽도 동시에 열리게 되어 있는 서랍형식 등도 볼만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상아와 녹각 등으로 만들어진 5개의 꽃잎을 가진 17개의 화점이 더욱 주목을 받는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화점 17개를 사용하여 바둑을 둔 것은 우리 고유의 방식이라고 알려진 순장바둑뿐. <국가진보장>에 이 바둑판이 어떻게 전래되었는지에 관한 기록이 없어 일본에서는 중국 당나라로부터 전해진 물건이라는 것이 다수설이지만, 통일신라나 백제로부터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는 것도 바로 이 17개의 화점 때문이다.

“목화자단바둑판”은 “금은귀갑기국감(金銀龜甲碁局龕)에 넣어져 보관되고 있었는데, 녹색과 주황색으로 염색된 녹각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목화자단바둑판”에 비추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이 나무 상자 역시 <국가진보장>에 등재되어 있는 보물이다.

전래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목화자단바둑판”과 이를 보관하였던 상자와 달리 백제에서 전해진 것이 <국가진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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