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흐르다가 채림을 잃어 버렸다. 향미와 내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열심히 찾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빠르고 비트가 강한 음악으로 정신이 혼미해질 때쯤이다. 춤을 추던 흑인 리더가 크고 작고, 중간 정도 키의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3명의 어른과 3명의 어린이를 세워두고 뛰어 넘겠다는 것인데 그 앞에 채림이 서있었다.
우리는 서로 안도의 눈빛을 교환했다. 앞에 나가서 흥겹게 어울린 있는 채림이의 행동이 재미있어서 계속 웃음이 나왔다. 짧은 머리에 보이시한 채림을 남자어린이로 착각했는지 아빠 정도 나이의 미국인이 허리를 덥석 끌어안는다. 채림은 ‘최강 동안(童顔)’으로 중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다.
“헉! 언니 숨을 못 쉬겠어요!”
순진한 채림은 당황해서 10분 이상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얼음자세가 돼있었다. 여기서 잠깐, 브레이크댄스 하니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바둑만큼 스포츠에도 관심이 많은 독자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되어 삼천포로 빠져본다.
▲타임스퀘어에서
미국와서 꼭 봐야할 스포츠 경기는 야구, 농구, 풋볼이라고 한다. 가난한 어학 연수생에게 스포츠 경기 관람은 큰 지출이다. 좋은 좌석도 아닌 농구 경기가 50불. 50불이면 한 끼니의 식사가 다섯 번, 1달 지하철 패스권 값이다.
그래도 ‘경험만큼 값진 것은 없다’는 자기 최면을 걸며 ‘보스톤 셀틱스’와 ‘피닉스 선즈’의 NBA 경기를 보러 간다. 셀틱스가 이번 시즌 7연승을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관중은 평소보다 많았다. 이왕 간 김에 농구 팬들과 한 몸이 되기 위해 34번 셀틱스의 폴 피어스 유니폼까지 챙겨 입고 열혈관중의 모습을 갖춘다.
경기는 이상하리만큼 아주 조용히 진행된다.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응원을 하는 사람도 없다. 재미있는 것은 천장에 붙은 전광판에 ‘소리를 질러라, 디펜스라고 외쳐라’라는 명령어가 나온다. 이럴 때만 사람들이 합창을 한다. 이게 무슨 응원인가, 이래서 선수들에게 힘이 되겠나 싶기도 하지만 아주 깔끔하고 정갈한 응원문화다. 야구 ‘보스톤 레드삭스’의 경기를 본 사람들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나는 열심히 목 터져라 외치며 춤을 추는 한국 야구 문화가 좋다.
농구장이 처음인 나는 말로만 듣던 골대만큼 키가 큰 NBA 선수들의 덩크슛을 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비록 셀틱스가 이번 시즌 최초로 패점을 기록했지만 매력적인 선수들의 동작에 매료되어 만족했다.
경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비보이들이 흥에 겨워 멋진 춤을 선보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순식간에 몰려든다. 돌연, 어디선가 나타난 경찰이 지금 그만 두지 않으면 당장 수갑을 채울 것 같은 무서운 표정으로 힘껏 호루라기를 불며 제재를 가했다.
NBA의 덩크슛을 보며 흥에 겨웠던 사람들은 경찰을 향해 야유를 보낸다. 경찰은 씨익 웃으면서 리듬을 타며 호루라기를 불더니 사람들의 권유에 못 이기는 채 비보이들과 댄싱배틀을 벌인다. 작고 작은, 그러나 틀에 얽매이지 않는 그 자유가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
▶ 셀틱스 유니폼을 입고!
다시 뉴욕의 밤으로 돌아온다. 밤 늦도록 연애, 학교 이야기 등으로 수다를 떨다 결국은 한국 바둑 발전과 보급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 선 향미와 채림. 뉴욕의 화려한 모습, 미국의 많은 볼거리들을 놓쳐 버리고 뉴욕에서 석 달을 아침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바둑에 푹 빠져서 지낸 20대 초반 젊은 그들. ‘뉴요커’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문화와 생활까지 진하게 체험했으리라. 분명, 그들은 뉴욕을 스쳐 지나는 관광객이 아니었다.
"서양 바둑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지만 실력 향상에는 한계가 있다. 처음에 놀랐던 점이 ‘뉴욕 고 센터’가 생겼을 때 있었던 일본, 중국의 바둑서적으로만 공부를 하다 보니 여전히 1990년대 유행 포석과 정석으로 바둑을 둔다. 조훈현, 이창호, 이세돌까지는 알아도 한국 프로기사에 관련된 정보나 한국 바둑에 관련된 내용은 거의 접할 수 없다.”
◀ 뉴욕 바둑협회에 있는 바둑책들, 90년대 일본의 바둑서적이 많다
한국바둑 세계화의 청량한 기운이 하루빨리 이런 곳까지 닿았으면 좋겠다. 바둑에 파 묻혀 뉴욕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그들은 오랜만에 밖으로 나와 뉴욕 공기를 마셨다. 나 또한 미국 최대의 도시 뉴욕에서 잊지 못할 밤을 보낸다.
엠파이어스테이트 전망대에서 다양한 인종들이 펼치는 문화의 흥분상태, 빌딩들이 빼곡히 들어차서 눈조차 쉬어 갈 수 없을 정도로 휘황찬란한 그 모습을 바라본다. 바둑판 무늬다. 전 세계 현대 문명의 발전을 웅변하는 바둑판 무늬. 뉴욕 맨하튼 한복판에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게임 ‘바둑’이 도도히 자리하고 있음을 기억하리라.
▲뉴욕바둑협회에서 바둑두는 사람들
▲뉴욕바둑협회, 보리스와 젤, 이향미, 김채림
▲일본어와 함께 표기된 뉴욕바둑협회
타이젬에서 바둑전문기자로 5년넘게 맹활약하였으며, 뜻 한 바 있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바람의 딸 '한비야'로부터 조언을 듣고, 새로운 인생을 개척중이다. 바쁜 일상에서 틈틈이 월간바둑 해외통신원을 겸하고 있다. 사이버오로와 월간바둑은 바둑의 '세계화'를 회사의 정책으로 삼고 있어, 얼른 정기자를 섭외, 포섭(?)하였다. 이제 정연주 기자의 글은 월간바둑과 사이버오로에서 확인 할 수 있다.
◀ 뉴욕 노천카페에서 정연주
PS. 2009년부터 월간바둑에서 인기리에 연재되고 있는 '정연주의 좌충우돌 세계棋행'. 인터넷에는 오로,파란,야후바둑의 해외뉴스란을 통해 월간지 1회분이 매주 2회로 나눠 연재되며, 이후 격주로 연재될 예정.
[글 | 정연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