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대학 잔디 위에 세계의 천재들과 나란히 앉아서 샌드위치도 먹어보고, MIT 도서관에서 세계의 천재들과 마주보며 책을 읽는다. 찰스강변을 유유자적 걷는다. 지금 고막에 작은 흥분을 전하고 고개를 까닥거리게 만드는 이 음악은 빌보드차트에 올라 있다.
길을 걷는 사람들, 스쳐가는 사람들에게서 몸에 배인 여유와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잠이 깨어 눈 뜨면 아직 한국에 있는 것 같지만 창문 열어 집 앞의 나무와 도로만 봐도 새로운 세상에 있음이 느껴진다.
한 달 정도의 적응기가 끝나고 몸이 근질근질 거리기 시작했다. 보스톤 메사추세츠바둑협회(Massachusetts Go Association)에서 활동하는 동안 용기가 생겼나 보다. 여기저기 참견도 하고 싶고, 이제 본격적으로 미국 생활을 즐기고 싶어질 때쯤 한국에 있는 후배가 소식을 전해왔다. 뉴욕 어딘가에서 명지대학교 바둑학과 여학생 둘이 바둑보급 투어 중이라는 얘기였다.
단지 학교 후배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고민 없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기특한(?) 그들을 보기 위해 뉴욕행 티켓을 예약한다. 6년간 기자생활의 습관이 아직 몸에 배어있는지 이거다, 하고 감이 오면 바로 실행에 옮긴다. 이거, 괜찮은 버릇일까 몰라.
보스톤에서 뉴욕까지는 운 좋으면 4시간, 운 나쁘면 9시간 정도를 논스톱 버스 안에서 고문을 당해야 한다. 대부분 미국 버스에는 화장실이 버스 뒷 좌석에 마련돼있어 가능한 이야기.
뉴욕까지 갈 수 있는 가장 저렴한 버스요금은 15달러. 차이나버스다. 미국사람들은 위험할 것이라는 선입견으로 절대 차이나 버스를 권하지도, 타지도 않지만 경험해본 결과 다를 것이 없었다.
▲제국의 심장, 뉴욕의 야경, 엠파이어 빌딩에서, 뉴욕의 거대한 빌딩과 야경을 따라한 세계의 도시들은 예외없이 후유증을 앓았다. 쉬운 말로 불황과 공황이다. 두바이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뉴욕이 가진 다양성과 폭넓은 문화를 따라한 곳은 지속가능한 허브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크다. 뉴욕의 가장 큰 장점과 특징은 마천루가 아닌 다양성이다. 한국의 여러 대도시들도 현재 기로에 서 있다.
차이나버스의 운전기사는 백인, 미국버스의 운전기사도 백인인데 뭐가 위험하다는 것인지. 버스를 중국에서 만들어서 수입한 것도 아니고, 차이나버스라서 차가 더 밀리는 것도 아닐텐데…. 비스듬히 앉았다, 누웠다를 반복하며 그나마 나는 5시간을 달려 적당히 운 좋게(?) 뉴욕에 도착했다. 이제 세계 현대문명 발전의 결정체 뉴욕에 발도장을 꾹, 찍어주련다.
종이에 그려간 지도와 달랑 주소만 적혀있는 메모지를 꺼내든다. 뉴욕은 유명한 바둑판 무늬 도로. 주소만 봐도 쉽게 길을 찾아갈 수 있다. ‘길치’인 내가 주소만 보고도 어떻게 찾아 갈 것인지 머리 속에 순식간에 그릴 정도였으니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에게는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후배들이 예쁜 마음을 써 마중나오겠다고 했으나 일하는 후배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혼자 찾아갈 수 있다고 선배답게(험!) 근엄하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바둑판 무늬의 도로는 나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기만 했고 1번 블럭에서 2번 블럭까지 가는 거리는 알려주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나오겠지? 땀을 닦아가며 2시간을 걸어간 끝에 뉴욕바둑센터를 찾는 데 성공했다. 나중에 지하철 노선을 보게 됐는데 이런, 우라질네이션! 지하철이나 버스로 20분 거리도 되지 않는 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왜 이제서야 알게 됐더란 말인가. 아무튼 도착!
323E 52nd St. New York, NY 10022. 뉴욕바둑센터는 1995년에 일본기원 이와모토 9단이 맨하튼에 기부하면서 시작됐다. 작년 겨울, 학교에서 우연하게 맨하튼 한복판에서 두 달간 머물 실력자를 구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들은 큰 고민 없이 미국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간도 크군! 이향미(2학년)와 김채림(3학년)은 명지대학교 바둑학과 재학생으로 수준급 실력파. 그들은 주중과 주말 할 것 없이 9, 10판의 지도대국을 소화하는 강행군을 하고 있었다.
▲뉴욕 바둑클럽, 바둑에 빠진 모습은 세계공통
내가 도착했을 때도 지도 다면기에 몰입해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결과는 열정을 배신하지 않는 법. 성의를 다해 지도하는 고수들과 바둑이 두고 싶어 안달난 사람들은 클럽이 오픈도 하기 전에 문을 두드리곤 했다. 그들은 말했다.
“부랴부랴 눈곱만 떼고 나와 지도하는 일이 허다해요.”
뉴욕바둑센터는 3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부분의 대국은 1층에서 진행된다. 지하 1층과 2층은 토너먼트를 할 때 개방한다. 뉴욕에는 이렇게 크고 작은 규모로 시작된 바둑클럽이 20개 정도 있는데 일본의 협찬과 기부로 지속되는 클럽이 5개나 된다. 적자라는 사실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데 일본에서는 아까워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있다고 한다. 아, 부럽다.
바둑 삼매경에 빠진 그들의 얼굴을 본지 5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제대로 인사를 나누고 뉴욕바둑센터을 둘러본 뒤 보리스(Boris)와 대국을 한다. 보리스는 단지 바둑이 배우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한국에 와서 6개월을 지냈다는 바둑마니아. 코스튬을 좋아하는 미국 청년으로 곱슬곱슬한 머리에 하얀 모자를 눌러쓴 모습이 애니메이션 캐릭터 같은 친구다.
보리스는 채림, 향미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영어 공부에도, 미국 문화 공부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보리스는 나중에 나에게도 ‘네가 영어 공부를 하는데 무엇을 어떻게 도와줄까?’라는 메시지를 날리며 친절을 베풀었다. 마음이 예쁜 청년이다.
◀ 이향미, 김채림
바쁜 하루 일정이 마무리된 뒤 여자 셋은 뭘 하고 밤을 지새울 것인지 머리를 굴렸다. 뉴욕에 온지 두 달이 지났지만 바둑센터 지킴이 역할을 하느라고 제대로 거리구경을 해본 적이 없는 채림과 향미 그리고 뉴욕에 첫 발을 딛은 나는 밤 10시가 넘어 마실을 떠났다.
맨하튼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으로 가는 길, 화려한 네온사인을 뒤로 하고 흑인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브레이크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꼭 뉴욕이 아니더라도 이렇다. 미국 어디를 가든 쿵짝거리는 음악이 들리면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잠깐의 여유를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쇼 타임~~. 호기심 많고, 흥도 많은 사람들이다. [계속]
▲뉴욕, 비보이들의 길거리 공연에서 어린아이로 착각받다
▲뉴욕, 비보이들의 길거리 공연
▲차이나 버스, 싸다.
타이젬에서 바둑전문기자로 5년넘게 맹활약하였으며, 뜻 한 바 있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바람의 딸 '한비야'로부터 조언을 듣고, 새로운 인생을 개척중이다. 바쁜 일상에서 틈틈이 월간바둑 해외통신원을 겸하고 있다. 사이버오로와 월간바둑은 바둑의 '세계화'를 회사의 정책으로 삼고 있어, 얼른 정기자를 섭외, 포섭(?)하였다. 이제 정연주 기자의 글은 월간바둑과 사이버오로에서 확인 할 수 있다.
◀ 뉴욕 노천카페에서 정연주
PS. 2009년부터 월간바둑에서 인기리에 연재되고 있는 '정연주의 좌충우돌 세계棋행'. 인터넷에는 오로,파란,야후바둑의 해외뉴스란을 통해 월간지 1회분이 매주 2회로 나눠 연재되며, 이후 격주로 연재될 예정.
[글 | 정연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