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에 깊게 빠져들 무렵 바둑이 내게로 왔다. 메사추세츠 바둑협회로 향하던 바로 그 날이, 미국에 도착한 뒤 가장 가슴 두근거리는 날이었음을 기억한다.
바둑협회는 지하철 레드라인 데이비스역에서 10분만 걸어가면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다. 건물 현관 유리문에 작게 쓰여진 ‘Massachusetts Go Association’이라는 글자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인지 ‘GO’라는 단어가 입체로 느껴진다(유감스럽지만 대부분의 서양사람들이 사용하는 바둑의 명칭은 일본이 만든 GO다).
건물에 들어서니 정적이 흐른다. 그 누구도 없어 고요하다. 주소를 따라 지하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곤 심장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고요한 공간, 공기의 흐름을 타고 들려오는 ‘또옥, 또옥, 또옥’ 소리. 낯선 땅 미국에서 낯설지 않은 단 하나. 그것은 바둑이었다.
미국에서 바둑을 두고 싶다기보다는 현지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영어 실력이 금방 향상된다는 이야기를 귀가 아프도록 들었기에 ‘알차게 바둑을 이용해 먹자’고 찾은 곳인데 왜 이렇게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인지. 취미가 바둑이었지만 바둑기자라는 직업을 갖게 되면서 나도 모르게 바둑과 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새록새록 바둑에 대한 열정이 다시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다.
◀ 메사추세츠 최고수 윌터(오른쪽)와 함께
메사추세츠 바둑협회의 첫 인상은 차분하고, 꽉 찬 느낌이었다. 금요일 저녁 8시, 몇몇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서 바둑을 두고 중국계 고수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샌드위치를 먹으며 열심히 복기를 하고 있었다. 여자는 없었다. 익숙한 풍경이다.
메사추세츠 바둑협회는 매주 화, 금요일 오후 8시에 모임을 갖는다. 보통 화요일에 많은 사람들이 클럽을 찾는데 20여 명이 모이며 입문자들은 화요일 7시부터 8시까지 1시간 동안 고수에게 지도를 받는다. 그리고 1년에 4번, 1등 상금 100달러의 토너먼트를 연다.
그들은 이방인을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바둑에 빠져든다. 잠시 어색함이 있었지만 특유의 친화력으로 밝게 인사하며 아는척했는데 그들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 하지 않았다. 단지 바둑 두길 원하냐고 물었고 1단 실력이 되는 중년 남성과 대국할 것을 권했다. 복기를 하던 남자가 다가와 실력을 묻더니 중년 남성에게 2점만 놓으라고 말한다.
▲일본에서 유래된 바둑의 명칭, 영어로는 GO.
바둑돌을 집어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바둑을 두려니 두렵기도 했지만 꼭 이겨야겠다는 욕심이 생긴다. 최신 기보라도 놓아 보고 오는 것인데. 후회가 밀려왔다. 그래도 바둑 강국 한국에서 왔는데 꼭 이겨야지. 무의식 중에 그런 집념이 생겼는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1시간 가량의 대국 결과. 졌다! 집중은커녕, 몇 수 앞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 했다. 패한 뒤에는 항상 표정 관리가 어렵다. 어지럽기까지 한 것을 보니 꽤 당황했던 것 같다. 혼자만의 생각일 수 있지만 몇 안 되는 사람들은 내가 1단에게 불계패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실망하는 눈치를 보내왔다.
다음 대국자는 샌드위치 먹던 젊은 남자 월터(Walther Chen). 내 바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던 월터는 2점을 깔아보라고 한다. 반항하고 싶었지만 이미 기가 꺾인 상황이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바둑 삼매경에 빠진 나와 월터는 2시간 넘도록 승부를 겨뤘다. 보스톤에 있는 동안 나는 월터와 몇 번의 살 떨리는 승부를 치렀는데 이날에 비교할 만한 바둑은 없었다.
보스톤 최고수가 한국에서 온 여자와 대국을 하니 볼거리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관중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시종일관 한국-중국-미국 영토를 넘나들며 싸웠다. 많은 관중에 쇼맨십이 발휘된 것인지 처음 대국 할 때와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이 또렷해지고 머리가 맑아졌다.
▶ 미국의 대형 국기(성조기)를 배경으로, 미국에선 국기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듯
12집 승리. 첫 대국의 패배를 만회할 수 있는 큰 차였다. 관중들은 믿을 수 없다며 1단한테 참패를 당하더니 어떻게 보스톤 최고수에게 2점을 깔고 대차로 이길 수 있냐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이것이 보스톤 최고의 강자(아마5단) 월터와 나의 첫 조우였다. 월터는 노스이스턴(Northeastern) 로스쿨에 다니는 학생으로 메사추세츠 바둑협회 회원들의 ‘인기 짱’ 선생님이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월터의 말 한 마디.
“그녀는 아주 강합니다. 이제부터 그녀에게 많은 것을 배우십시오.”
이날 이후로 월터는 자신이 바쁠 때면 다른 사람에게 나를 소개하며 “나와 비슷한 실력입니다. 한 수 배우십시오”라는 말을 하곤 했다. 패한 뒤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랐던 나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월터를 보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또 다른 패배를 느꼈다. 그러나 이런 패배의 느낌은 인간성장에 도움이 된다.
이렇게 시작된 월터와의 인연으로 나는 많은 챙김(?)을 받게 됐다. 그는 바둑협회에서 하는 행사가 있을 때 항상 메일을 통해서 연락해주었다. 외국 생활의 허전함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 고마운 사람이다.
나는 참으로 좋은 취미이자 특기를 가지고 있어서 행복한 사람이다. 한국에서는 가까이 두고도 잊고 지냈던 친구가 어느 때보다 가까워졌다. 낯선 미국땅에서 낯설지 않은 단 하나의 친구, 바둑!
▲메사추세츠 바둑협회에 꽉 차 있는 바둑서적
▲ 미국에서의 코스튬 (게임,만화,연극 등 의 캐릭터, 유명인의 의상을 입거나 분장을 하고 즐김)
타이젬에서 바둑전문기자로 5년넘게 맹활약하였으며, 뜻 한 바 있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바람의 딸 '한비야'로부터 조언을 듣고, 새로운 인생을 개척중이다. 바쁜 일상에서 틈틈이 월간바둑 해외통신원을 겸하고 있다. 사이버오로와 월간바둑은 바둑의 '세계화'를 회사의 정책으로 삼고 있어, 얼른 정기자를 섭외, 포섭(?)하였다. 이제 정연주 기자의 글은 월간바둑과 사이버오로에서 확인 할 수 있다.
◀ 노천카페에서 정연주(좌), 오른쪽은 행인
PS. 2009년부터 월간바둑에서 인기리에 연재되고 있는 '정연주의 좌충우돌 세계棋행'. 인터넷에는 오로,파란,야후바둑의 해외뉴스란을 통해 월간지 1회분이 매주 2회로 나눠 연재되며, 이후 격주로 연재될 예정.
[글 | 정연주]
